[Review] 오이디푸스의 제국, 전화벨이 울린다

글 입력 2018.04.07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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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오이디푸스의 제국
전화벨이 울린다


 작년쯤에 유병재의 개그를 좋아해서 한창 관련 영상을 모두 찾아본 적이 있다. 유병재의 코미디는 대부분 재미도 메시지도 있어서 대체로 재밌었지만, 그 중에서도 유난히 띄는 영상들이 있었다. 아르바이트 연결사이트인 '알바몬'과 연계한 캠페인 겸 광고였다. 그는 아르바이트생에게 가해지는 무례를 그만의 스타일로 표현하고 꼬집었다. 특별한 기술도 경력도 없는 대학생인 필자 입장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노동시장'이 알바였기 때문에 집중해서 봤었다. 연극을 보는 내내 그 영상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나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야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마주한 사람을 물건 다루듯이 한다. 그들이 낸 돈이 그만큼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돈은 참 무섭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오늘날 계좌에 찍힌 그 뻣뻣한 숫자들로 인간을 조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그건 어쩔 수 없는 돈의 특성이기도 하다. 돈은 값을 지불하는 역할을 지니고 있고, 값이 치뤄지는 대상은 더이상 철학이 아닌 시장의 논리에 따라 상품이 된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심각한 빈부격차를 보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돈은 더 거대한 영향력을 획득한다. 거대한 자본 아래에서 굴려지는 단순 노동자들은 돈이 더 절실해지는데, 자본 앞에서는 그들이 절실해지는만큼 그들의 값어치는 떨어진다.

 이익을 창출하는데 있어서 그들은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아르바이트생을 비롯한 단순노동자들이 권리를 찾지 못하는 것도 이익창출의 논리 앞에서 그들이 인간이 아니기 떄문이다. 인간이 아니어서 값을 매길 수 있고, 교체할 수도 있고, 절실함을 무시할 수 도 있다. 이들의 과거과 미래도 당연히 고려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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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 노동자들이 '교체될 수 있는' 계급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더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단순한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가난한 부모님 아래에서 비정규직이나 단순노동자의 굴레에 빠지지 않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렇듯 복잡한 문제로 얼룩져있는 비정규직 문제는, 단순히 노동자 개인의 문제로 이해되어서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착잡한 연극 <전화벨이 울린다>는 불안한 노동시장에서 자아를 매물로 내놓은 수진과 그를 가르치는 연기 선생 민규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공순이의 딸, 콜순이 수진은 이 사회에 굳게 자리잡은 빈부계급론의 생생한 증거다.

 그녀는 구조의 희생자지만, 똑같이 돈으로 휘둘리는 사람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가해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행태를 비판할 수는 없다. 오늘날 사회에 존재하는 문제는 개인의 인성과 노력으로 떠밀어버리기엔 너무 거대하다. 그녀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행위를 그녀의 개인적인 문제로만 치부한다면, 단순해진 문제가 편안할 수는 있어도 해결되지는 않는다. 문제인 사회를 바꾸는 것보다 그 안의 개인을 바꾸는 것이 쉬워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이런 식의 해결은 매년 인간 제물을 바치는 원시 사회의 해결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다.

 <전화벨이 울린다>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오이디푸스의 제국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우리는 연극에서 오이디푸스의 비유를 적극적으로 차용했다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고시원에서 민규와 수진은 오이디푸스를 연기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가 끔찍해서 자신의 눈을 찌르고 온나라를 딸과 돌아다녔다. 세상을 가장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을 찌르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서 자신의 눈을 찔렀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테베를 돌아다니는 장님 오이디푸스는, 인간이라기보다 망령에 가깝다. 그는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어있다.  민규는 오이디푸스의 연기를 위해 오이디푸스 연습했지만, 수진은 끔찍한 세상의 오이디푸스를 연습하고 있었다. 수진도 자신의 자아를 부정하고 호호 웃으며 고객들을 응대했다. 그녀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죽어 있었다.

 수진이 호호 웃고, 오디션에 떨어진 민규가 객석을 떠돈다. 그들은 모두 가난한 고시원에 사는 가난한 이들이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치지만, 자신의 눈을 찌르고 배회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놓여있다. 수진과 민규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객석을 떠도는 민규의 망령처럼, 오늘도 우리는 오이디푸스의 제국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눈가를 만져봐야 한다. 우리는 살아 있는가? 영혼이 살아있지 않으면 왜 우리는 살아가야 하는가? 연극은 끝났지만, 테베의 시민들은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간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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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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