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시 읽는 수능 지문 눈길_이청준 [문학]

그날 새벽, 노인과 나의 '눈길'
글 입력 2018.04.06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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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새벽, 노인과 나의 '눈길'
<눈길>_이청준

이청준의 <눈길>은 교과서에 다수 수록된 작품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한번쯤 읽어본 작품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 소설이 말하는 것은 단순히 어머니의 사랑뿐은 아니다. 먼저 이 소설의 뛰어난 부분을 꼽자면 ''나'의 심리묘사이다.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작품의 서술자인 ‘나’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어머니에 대한 ‘나’의 감정과 태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나’는 아내와 함께 오랜만에 고향집에 내려오지만 본래 예정과 다르게 하루만에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 ‘나’는 고향집에서 ‘금세 어디서 묵은 빚 문서라도 불쑥 불거져 나올 것 같은 조마조마한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를 ‘노인’이라고 부르고, 끊임없이 ‘빚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어머니에 대한 심리적인 거리감을 드러내고 있다. 작품 속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어머니와 자신의 사이를 설명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형의 주벽으로 가계가 파산을 겪은 뒤부터, 그리고 마침내 그 형이 세 조카아이와 그 아이들의 홀어머니까지를 포함한 모든 장남의 책임을 내게 떠맡기고 세상을 떠난 뒤부터 일은 줄곧 그렇게만 되어 온 셈이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와 군영 3년을 치러 내는 동안 노인은 내게 아무것도 낳아 기르는 사람의 몫을 못 했고, 나는 또 나대로 그 고등학교와 대학과 군영의 의무를 치르고 나와서도 자식놈의 도리는 엄두를 못 냈다. 노인이 내게 베푼 바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럴 처지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대로 형이 내게 떠맡기고 간 장남의 책임을 감당하기를 사양치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인과 나는 결국 그런 식으로 서로 주고받을 것이 없는 처지였다. 노인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대해선 소망도 원망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다 어머니가 지붕개량사업에 대한 소망을 내비치자 ‘노인에 대해선 빚이 없음을 골백번 속으로 다짐’하며 불편한 기분을 느끼고, 결국 일정을 당겨 돌아가려 한다. 노인의 소망과 ‘나’의 속마음을 눈치챈 아내는 ‘나’의 행동을 질책하지만 ‘나’는 참견 말라는 눈빛을 보낼 뿐이다.

그랬던 ‘나’는 아내가 이끌어 내는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가장 거북스럽게 시선을 피해 오던 곳’인 옷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 옷궤를 보면 17년 전 이미 팔린 집에서 아들을 위해 남아 저녁밥 한 끼를 지어 주던 어머니의 사랑을 마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외면하고 싶은 ‘나’는 그 옷궤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떠돌이 살림에 다른 가재 도구가 없어서도 그랬겠지만, 이 20년 가까이를 노인이 한사코 함께 간직해 온 옷궤였다. 그만큼 또 나를 언제나 불편스럽게 만들어 온 물건이었다. 노인에게 빚이 없음을 몇 번씩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가도 그 옷궤만 보면 무슨 액면가 없는 빚 문서를 만난 듯 기분이 새삼 꺼림칙스러워지곤 하던 물건이었다. 이번에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노인의 방을 들어선 순간에 벌써 기분을 불편스럽게 해 오던 옷궤였다. 그리고 끝내는 이틀 밤을 못 넘기고 길을 다시 되돌아갈 작정을 내리게 한 것도 알고 보면 바로 그 옷궤의 허물이 컸을지 모른다.

 
‘나’에게 옷궤는 언제나 자신을 불편스럽게 만드는 ‘액면가 없는 빚 문서’이다. 그냥 빚 문서도 아니고 액면가가 없는 빚 문서이니, 그 크기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여기에서 ‘나’가 계속해서 ‘빚이 없다’고 반복하던 말이 사실은 빚이 없음을 믿고 싶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내가 옷궤의 내력을 ‘나’에게 들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나’ 역시 어머니가 팔린 집에 옷궤를 남겨두고 자신을 기다린 이유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날의 이야기를 일부러 잊으려 했으며, 어머니에게 진 빚이 없다는 말로 어머니의 사랑을 외면하고 싶어 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의 진심을 마주하게 될 뻔한 순간들을 ‘나’는 계속 ‘위험한 고비’, ‘위태로운 고비’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 집을 떠나게 되면 지붕도 옷궤도 빚문서도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며 잠에 든다.

그러나 그날 밤 끝끝내 어머니의 속마음을 모두 꺼내려는 아내의 노력으로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만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그날의 상황, 즉 자신이 떠난 후의 상황을 듣게 된 것이다. 가장 깊이 묻혀 있던 ‘묵은 빚 문서’를 들추어 낼 수밖에 없게 된 그 상황을 ‘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날 밤-아니 그날 새벽-아내에겐 한 번도 들려 준 일이 없는 그날 새벽의 서글픈 동행을, 나 자신도 한사코 기억의 피안으로 사라져 가 주기를 바라 오던 그 새벽의 눈길의 기억을 노인은 이제 받아 낼 길이 없는 묵은 빚 문서를 들추듯 허무한 목소리로 되씹고 있었다.

(중략)

나는 차를 타고 떠나가 버렸고, 노인은 다시 그 어둠 속의 눈길을 되돌아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건 거기까지 뿐이었다.
노인이 그후 어떻게 길을 되돌아갔는지는 나로서도 아직 들은 바가 없었다. 노인을 길가에 혼자 남겨 두고 차로 올라서 버린 그 순간부터 나는 차마 그 노인을 생각하기 싫었고, 노인도 오늘까지 그 날의 뒷 얘기는 들려 준 일이 없었다. 한데 노인은 웬일로 오늘사 그날의 기억을 끝까지 돌이키고 있었다.

(중략)

나는 갑자기 다시 노인의 이야기가 두려워지고 있었다. 자리를 차고 일어나 다음 이야기를 가로막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럴 수가 없었다. 사지가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온몸이 마치 물을 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몸을 어떻게 움직여 볼 수가 없었다.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달콤한 슬픔, 달콤한 피곤기 같은 것이 나를 아늑히 감싸 오고 있었다.


‘나’는 아들을 보내고 혼자 돌아가는 길에 어머니가 느꼈던 심정을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그동안 노인에 대한 빚은 없다며 살아온 세월에 대한 부끄러움과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으로 ‘나’는 ‘불빛 아래 눈을 뜨고 일어날 수가 없’다. 눈을 뜨지 못하는 ‘나’의 모습은 햇빛에 눈을 뜨지 못했던 어머니의 모습과 대비를 이룬다. 이 장면에서 ‘나’는 단순히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는 것을 넘어  지금껏 감추려 했던 자신의 진짜 마음과도 직면하는 것이다.

이처럼 소설의 곳곳에 어머니에 대한 ‘나’의 감정을 짐작하게 해주는 표현들이 있다. ‘나’가 어머니에게 ‘노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이유, ‘빚이 없다’는 말을 반복하는 이유, ‘나’의 심리를 표현하는 서술들, ‘옷궤, 빚 문서, 불빛’ 등의 소재에 대한 ‘나’의 묘사를 포작하고, ‘나’의 감정을 제대로 따라가며 작품을 읽을 때 이 소설의 결말을 더욱 감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

‘눈길’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눈길’의 의미를 살펴보자. 작품에서 눈길의 의미는 인물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층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눈길이 주는 이미지는 ‘나’와 어머니에게 다르게 작용한다. ‘나’에게는 어머니와 함께 의지하며 걸었던 공간이고, 지금은 외면하고 싶은 공간이다. 어머니에게는 아들을 떠나 보내고 둘이 걸어왔던 발자국을 따라 밟으며 아들을 그리워하던 길이며,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만 빌’었던 길이다. 또한 두 사람이 함께 서로를 도우며 걸어갔던 눈길과 어머니가 혼자 돌아오던 눈길의 의미가 사뭇 다르다.

두 사람이 함께 걷던 눈길은 한 명이 넘어지면 다른 한 명이 일으켜 주며 걸을 수 있었으므로 힘들지만 외로운 길이 아니다. 함께 걷는 모자의 모습을 통해 가족의 사랑과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어머니가 혼자 돌아간 눈길은 외로우면서도 자식에 대한 미안함과 사무치는 그리움, 사랑이 담겨 있는 길이다. 그 날을 회상하는 어머니의 발화는 독자들로 하여금 가슴 먹먹한 감동을 전해 준다. 이처럼 ‘눈길’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


[김새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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