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다프네, 달아나는 여자들

한강 소설『내 여자의 열매』에 드러난 인간성의 부정과 식물화의 의미
글 입력 2018.02.20 16:5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aa31_657_i1.jpg


 아내는, 내 여자는 무언가로부터 자꾸만 달아난다. 상계동 아파트에 전셋집을 얻어 신혼살림을 차리고 충실한 남편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 여자의 삶은 얼핏 보기엔 매우 평화롭고 고요해 보인다. 하지만 아내의 내면은 그렇지 않다. 짧은 소설의 전반부가 남편의 목소리로 서술되는 까닭에 아내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정은 직접 드러나지 않지만 아내의 몸 상태나 그녀가 얼핏 흘리는 말들, 남편의 말에 대한 반응에서 아내가 이 평화를 묵묵히 견디고 있었을 뿐이라는 걸 유추할 수 있다. 평화를 견딘다니, 얼핏 보기엔 굉장히 모순되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분명 아내는 무언가로부터 자꾸만 달아나려고 한다. 아내의 삶이 평화로운 것도, 일단은 사실이다. 아내의 우울과 불안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녀의 도피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평화로운 삶의 진짜 실체는 무엇인지 살펴봐야 할 듯하다.
    

  
아내와 다프네, 달아나는 여인들


 일생을 쫓기면서도 아내는 자신을 괴롭히는 혼령의 정체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아내는 잠시 멈추어서 그것을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달아날 뿐이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도 이렇게 달아나는 여인이 있다. 페네이오스 강의 신의 딸 다프네다. 다프네는 에로스의 금화살을 맞아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게 된 태양신 아폴론으로부터 달아난다. 아폴론은 다프네를 쫓으며 달콤한 유혹의 말을 흘리지만 다프네는 잡히면 끝장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달아날 뿐이다.
 다프네는 본래 이성에게는 별 취미가 없는 처녀였다. 사랑의 신 에로스가 어떤 신인지, 결혼의 신 휘메나이오스가 어떤 신인지도 알지 못했다. 오로지 숲 속을 돌아다니며 동무들과 놀거나 들짐승을 사냥하는 일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다프네는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묶고 숲 속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그녀는 달과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따라 영원히 처녀로 남고 싶었다. 아내 역시 결혼이나 이성에는 별 관심이 없는 여자였다. 아내는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는 여자였다. 결혼 전에 아내는 그동안 모아둔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들고 이 나라를 떠나 자유롭게 살다가 자유롭게 죽고 싶어 했다. 그렇게 아내는 “세상 끝까지, 가장 먼 곳으로” 가고 싶어 했다. 이들의 본성은 통하는 데가 있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쫓기는 다프네보다 쫓는 아폴론이 빨랐던 것이다. 아폴론에게는 에로스의 날개, 즉 사랑의 날개가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붙잡힐 위기에 처하자 다프네는 강의 신인 아버지에게 그녀를 불행하게 한 아름다움을 거두어달라고 애원한다. 강의 신은 자신의 딸을 월계수로 변신시킨다. 마찬가지로 ‘아무래도 헤어질 수가 없어서’ 결혼을 택한 아내는 결혼생활과 답답한 도시를 견디지 못하고 식물로 변신한다. 결국 이들에게 ‘식물로의 변신’은 더 이상 도망갈 곳 없어진 현실에서 극에 몰린 여성들이 선택한 일종의 도피다.

 이들은 대체 무엇으로부터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걸까? 자신을 쫓는 무언가에 그토록 염증을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다프네의 경우에는 그 답이 명확하다. 사랑의 신 에로스는 아폴론에게는 처음 본 상대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느끼게 하는 금화살을, 다프네에게는 처음 본 상대에게 맹목적인 증오를 느끼게 하는 납화살을 쏘았다. 에로스의 장난에 놀아난 두 남녀는 한쪽은 붙잡으려 하고 한쪽은 달아나려 하는 상황에 놓인다. 다프네의 증오와 염증은 일종의 숙명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자신이 무엇에 쫓기는지 알지 못한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왜 달아나려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어릴 때부터 몸속의 나쁜 피를 갈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아내는 일단은 자신의 답답한 바닷가 고향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고향 아닌 곳에서도 여전히 불행했다. 도시로 나와서도 여전히 불안감에 시달린 그녀는 다시 한번 도피를 꿈꾼다. 더 멀리,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고 싶어 하던 그녀의 소망이 그 ‘도피’의 구체적인 형태였다. 하지만 남편을 만나고 그와 결혼하게 되면서 아내는 곧 이 소망을 포기한다.


나는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어요. 어떤 끈질긴 혼령이 내 목을, 팔다리를 옥죄며 따라다녔을까요. 아프면 울고 꼬집히면 소리치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언제나 달아나고만 싶었어요. 울부짖고 싶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착한 얼굴을 하고 버스 뒷좌석에 웅크리고 앉아, 어머니, 주먹으로 유리창을 박살내고 싶었어요. 내 손등에 흐르는 피를 게걸스럽게 핥아먹고 싶었어요. 무엇이 나를 그토록 괴롭혀서,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겠다고 나는 지구 반대편까지 가려고 했을까요. 왜 가지 못했을까요, 병신처럼. 왜 훌훌 떠나 이 지긋지긋한 피를 갈지 못했을까요.

 
 아내는 그녀를 옭아매는 것이 실체가 있는 공간이나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어슴푸레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고향을 벗어나도, 결혼이라는 새로운 삶은 택해도 여전히 혼령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아내는 여전히 자신이 도망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녀는 세상에 나면서부터 에로스의 납화살을 맞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녀는 벗어나려는 욕망과 자유를 향한 갈망을 자신의 본성이라고 느끼며 남편은 아내의 이 본성을 ‘우울질의 낡은 피’라고 정의한다. 결국 아내의 우울질과 도피는 아내의 뿌리 깊은 운명이다.



십삼 층에서 죽어가는

  
 아내를 가장 가까이서 봐온 사람은 남편이다. 남편, 혹은 이야기 앞부분의 서술자인 ‘나’는 회사를 다니고 때때로 야근을 하며 가끔 출장을 가기도 하는 평범한 한 남자다. 경제적 수준도 풍족하진 않으나 두 식구가 살기에 부족하진 않은 듯하고 결혼을 파탄 낼만한 위험한 일탈을 저지르는 나쁜 남편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일탈, 모험, 방황 같은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다. 그의 삶과 가정은 완벽히 평범하고 평화롭다.
 그런 그의 고요를 깨뜨린 사람은 아내다. 평범하고 충실하게 아내의 역할을 잘 해오던 이 여자는 어느 순간부터 비정상적인 몸의 변화를 보이더니 어느 순간 식물이 되어 버린다. 그와 함께 ‘나’의 생활도 달라진다.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오며 드디어 안정적인 가정을 꾸렸다고 생각한 순간 그 안정이 파탄 난 것이다. 그의 삶에서 아내는 미워해야만 하는 가해자일까.   

 ‘나’의 결혼생활은 나름 행복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 ‘지난 삼 년은 나에게 가장 따뜻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힘에 버겁지도 못 미치지도 않는 직장일, 다행히도 무심하여 전세금을 올려 받지 않는 집주인, 만기가 가까워오는 아파트 청약금, 별다른 애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충실한 아내까지, 모든 것이 적당히 덥혀진 욕조의 온수처럼 찰랑거리며 내 고단한 몸을 어루만져주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행복한 서술의 이면에 있는 것은 행복한 남자의 삶에 부품처럼 존재하는 한 여자다. 애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충실한 아내. 여자로서 엄청난 매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내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는 보조인. 아내의 존재는 그의 삼 년이 따뜻하고 평화롭기 위한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아내는 그에게 ‘만기가 가까워오는 아파트 청약금’ 정도의 의미와 가치와 심리적 만족감을 주는 존재인가 보다. 여기서 우리는 앞부분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내는 도망치려 하는데 가정은 평화롭다. 그 평화는 아내의 평화가 아니었다.
 그들의 평화로운 결혼생활은 한마디로 ‘무미건조’에 가깝다. 그들은 딱히 대화를 많이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딱히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다. 늦은 5월의 물컹한 햇살 속에서 아내가 몸을 봐달라는 말을 던지기 전까지 그들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공간에서 혼자 노곤함에 젖어 있을 뿐이다.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건조하고 메마른 상태다.
 ‘나’는 아내의 몸에 꽤 선명하고 큼직한 멍이 완전히 자리 잡을 때까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멍을 드러내기 위해 아내가 옷을 벗었을 때 그는 아내의 벗은 몸을 밝은 곳에서 보는 것이 꽤 오랜만이라는 것을 문득 생각한다. 어디서 이렇게 멍이 들어왔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다. 아내의 벗은 몸은 더 이상 ‘나’에게 열정의 대상이 아니다. 푸릇한 멍이 든 깡마른 몸을 안타까운 마음에 한번 끌어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초여름에 아내가 다시 멍에 대해 얘기하기 전까지 아내의 변화에 대해 까맣게 잊고 지낸다. 아내는 결혼 생활 내내 말라갔다. 한때 고등학생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던 귀염상의 얼굴은 이제 천진한 이목구비에 어울리지 않는 피로의 흔적이 역력하다. 풋사과 같던 뺨은 깊이 패었고 낭창낭창하던 허리와 보기 좋게 유연한 곡선을 그리던 배는 안쓰러워 보일 만큼 깡말라 있다. 이렇게 아내가 서서히 말라갈 동안, ‘나’는 하나뿐인 식구의 몸에 저만한 멍이 든 것도 모른 채 살아간다. 아내가 말라가던 삼 년이 ‘나’에게는 가장 따뜻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변신의 책임을 ‘나’에게 모두 떠넘기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다. 아내가 ‘나’의 무관심 속에서 죽어가고 있던 것은 맞지만 사실 아내는 결혼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자신이 죽어갈 것임을 예감했고,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죽어가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애초에 정말로 살아있었던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상계동 아파트에 사는 것이 싫다며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고 ‘나’는 회상한다.


인구 칠십만이 모여 산다는 거기서 천천히 말라죽을 것 같아. 수백수천 동 똑같은 건물에, 칸칸마다 똑같은 주방에, 똑같은 천장에, 똑같은 변기, 욕조, 베란다, 엘리베이터도 싫어. 공원도, 놀이터도, 상가도, 횡단보도도 다 싫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갈 것 같단 말이야. 그 십삼 층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 같단 말이야.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단 말이야.


 정말로 아내는 이 아파트에 산 첫해 잔병을 자주 앓았다. 그리고 ‘좁은 어깨를 시든 배추잎처럼 늘어뜨린 채 베란다 유리문에 뺨을 붙이고 서서 질주하는 차들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서 있곤 했다.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거기 서 있었다. 무관심한 남편이 아니더라도 이미 아내는 그곳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죽어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편은 모든 것이 ‘노말’하다는 의사의 진단 이상의 통찰이나 이해를 보여주지 못했을 뿐이다. 다프네와 달리 아내는 ‘눈앞의 증오스러운 저 남자’와 같은 명료하고 가시적인 적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식물로의 변신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이 서로 미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부부는 나름대로 서로를 사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소개받은 아내에게 끌림을 느꼈고, 아내는 ‘헤어질 수 없어서’ 결혼을 선택한다. 둘은 서로에게 나름대로 충실했다. 하지만 아폴론이 금화살을 맞고 다프네가 납화살을 맞았던 만큼 이 둘은 달랐고 남편은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극히 일상적인 인물인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일상적임’에서 비죽 튀어나와 있는 타인을 이해하기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남편의 무관심을 이제는 ‘몰이해’ 정도로 칭해도 좋을 듯하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나’는 아내의 도피에 책임이 있다.

 아내 몸에 흐르는 ‘우울질의 피’의 실체와 근원에 대해 생각해보기 전에, 아내의 변신이 얼마나 절박하고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의 선택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아내는 사실 살면서 꽤 여러 번의 도피를 시도했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지겨운 고향에서의 도피가 그 첫 번째다. 아내는 일부러 번화가 가까운 곳,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만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아마 그녀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바닷가 빈촌과 가장 멀게 느껴지는 곳을 고집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여전히 그녀는 실체를 모르는 혼령에 쫓기고 있었고, 행복하지 않았다.
 두 번째 도피는 더 멀고 더 다른 곳으로 떠나 정착하지 않고 살아가고자 하는 소망이었다. 단순히 시가지로 나오는 것만으로는 ‘고향’에서 완벽히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 도피는 아내가 ‘나’와의 결혼생활을 선택하면서 이루어지지 못한 소망으로 남고 만다. ‘나’는 아내가 이렇게 쉽게 소망을 접은 데 대해 그것이 ‘어린아이 같은,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몽상’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단정한다. 남편의 몰이해는 결혼 전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하지만 작품을 다 읽고 나니 어쩌면 아내는 자신이 지구 반대편으로 가더라고 ‘나쁜 피를 갈아버릴’ 수 없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망을 포기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두 차례의 실패를 겪은 뒤 세 번째 도피는 보다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소설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진 않지만 ‘나’가 묘사하는 아내의 일상에서 매우 눈에 띄는 부분은 아내의 ‘잠’이다. 아내는 초저녁 잠이 많았고 한 번 자면 죽은 듯이 잤다고 말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도피보단 포착하기 어려운 형태의 도피다. 전통적으로 ‘잠’은 작은 죽음이며(그리스 신화에서 잠의 신 히프노스는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와 형제지간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죽음을 영원한 잠으로 생각했다), 죽음은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도피다. 이처럼 ‘잠’이 소극적인 저항과 도피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다른 작품이 있다. 은희경의 단편소설 「아내의 상자」다.
   

... 그런 난리를 치른 뒤 폭파하듯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니 아내는 소파에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우리가 부순 문에서 불과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자리였다. 아내가 그녀의 안락의자에 파묻혀 잠든 것을 보면 이따금 그때 생각이 났다. 뚜껑이 닫힌 상자들 곁에서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 그것은 자신을 상처 입힌 세상을 향해 빗장을 지르고 잠들어 버린 그때의 모습과 비슷했다.



 여기서 아내의 잠은 곧 거부이다. 이 작품에서 아내는 미술 실기 시험장에서 환청을 듣고 난 후 병원에서, 숨 막히는 신도시의 아파트를 바라볼 때, 남편의 갑작스러운 짜증과 분노에 놀랐을 때 잠을 잔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때도 늘 낮잠을 잔다. 남편은 아내가 ‘몸이 아플 때나 걱정거리가 있을 때, 심지어 화가 났을 때조차’ 잠을 잔다고 말한다(32p). 아내의 잠은 무의식으로의 침잠이며 일종의 껍질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행위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도 역시 아내의 잠은 침잠이며 거부이고 도피다. 여기서는 식물로의 변신 이전에 거치는 일종의 선행 단계로도 볼 수 있다. 아내는 오래전부터 바람과 물과 햇빛만으로 살 수 있기를 바라 왔다고 말한다. 그렇게 살 수 없는 한 아내는 어디에서나 무언가에 쫓길 수밖에 없다. 십삼 층에 갇혀 죽을 것 같이 느껴졌을 때, 벼랑 끝으로 몰렸을 때 아내는 더 이상 이상적인 외부 어딘가의 세계를 찾아 헤매지 않게 된다. 오히려 그녀는 이제 자신의 내부로 숨기 시작한다. 거의 먹지도 않고 인간으로서의 육체를 조금씩 변형시키며 외부와 자신을 차단해나간다. 그 시작이 잠이었다.



우울질의 낡은 피


 이렇게 아내가 내면의 혼란을 겪고 있을 때 ‘나’는 어느 때보다 안락한 결혼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결혼 생활 삼 년 차의 이들 부부는 이제 뜨거운 연인이라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동반인 정도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한때는 그들도 서로에게 열정적이었다. ‘한때는 8월에 창문을 죄다 열어젖힌 채 한낮에도 몇 차례씩 서투른 사랑을 나누다가 녹초가 되곤’ 했으니까. 그러나 이제 그들은 아내 몸에 손바닥만 한 멍이 여러 개 생길 때 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섹스리스 부부다. 그리고 늦은 5월, 너무나 오랜만에 아내의 벗은 몸을 보았을 때 ‘나’는 그녀를 끌어안아준다.


오두마니 서서는 “병원에 가볼까?”하고 다시 자문을 구하는 아내의 모습이 그지없이 한심하고 가엾고 서글퍼서,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애틋한 마음이 되어 아내의 깡마른 몸을 꼭 한번 끌어안아주었을 뿐이었다.


 그지없이 한심하고 가엾고 서글프다. 평화롭고 따뜻한 나날을 보내는 남자가 아내를 보고 가질만한 감정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감정의 묘사는 왠지 우리에게 낯설지가 않다. 다만 이 묘사의 대상이 대개 아내가 아닐 뿐이다. 한심하고 가엾고 서글픈 대상은 보통 우리네 어머니가 아니던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어머니들 개개인을 말하는 건 아니다.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다 늙어버린, 그러느라 현실의 변화는 따라가지 못해 어눌하고 촌스럽고 한심한 어머니, 그래서 너무나 가엾고 서글픈 어머니, 그 위대한 모성을 꼭 끌어안아주고만 싶은 어머니는 한국의 어머니상이며 문학에서의 어머니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보편적인 상으로서의 어머니다.   
  작품의 뒷부분에서 관점이 이동한 뒤에는 아내가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는(혹은 말을 건네는, 어떻게 봐도 좋을 것 같다. 어차피 아내 내면의 독백이니까.)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독자는 그 부분에서야 비로소 아내가 직접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어머니한테 세상은 그 바닷가 빈촌이지요.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셨지요. 그곳에서 아이를 낳고 그곳에서 일하고 그곳에서 늙어오셨어요. 언젠가는 그곳의 선산 기슭에 아버지와 나란히 누우실 거예요.   어머니, 어머니처럼 될까 봐 나는 멀리멀리 여기까지 떠나왔어요. 열일곱 살 때였지요, 무작정 집을 나와 달포 넘게 헤매 다녔던 부산, 대구, 강릉의 시가지들을 잊을 수 없어요. 일식당에서 나이를 속여 홀 심부름을 하고 저녁이면 독서실에서 새우잠을 자면서도 나는 그곳이 좋았어요.

 그 우울질의 낡은 피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무엇이다. 가난한 곳에서 나고 자라 배운 것 없이 그저 결혼하고 자식을 길러낸 전통적인 어머니가 딸에게까지 전달해준 우울질의 실체는 무엇일까. 아마 아내의 어머니도 그 어머니로부터 그것을 물려받았을 것이다. 어머니에게서 딸로, 그 딸이 어머니가 되면 또다시 그 딸에게로 유전되는 우울질은 낡은 피다. 이 낡은 피는 여성에게서 대물림되는 가난, 모성, 충실한 아내의 역할, 일상,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딸로, 아내로, 어머니로, 여자로 존재하는 한 절대 갈아버릴 수 없는 납화살이며 뿌리 깊은 운명인 것이다. 이 납화살은 여성에게 ‘주체성이 결여된 여성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누군가의 딸, 아내, 어머니와 같이 끊임없이 남성의 시각을 통해 자신을 정립해야 하는 영원한 타자로서의 여성이다. 그런 아내에게 타자로서의 여성성을 요구하는 남편은 아내를 쫓는 혼령의 구체화된 모습이었을 것이다. 다프네를 쫓은 것이 아폴론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아내는 우울질의 낡은 피라는 이름의 납화살을 맞았고, 처음 만난 구체화된 남성성인 남편이 아폴론이었을 뿐이다. 그녀를 내몬 것은 남편의 모습을 한 남성 젠더인 것이다.



비인간성으로의 은닉


 결국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내를 짓누르는 실체 없는 혼령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아내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다. 앞서 살펴봤듯 물리적인 도피만으로는 아내는 자신을 괴롭히는 존재로부터 숨을 수 없다. 이 도피의 결말은 식물로의 변신이다. 아내의 몸 상태는 모두 <노말>이면서도 모든 장기와 기관이 서서히 사라져 간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의식조차 점차 흐려지며 아내는 비로소 다른 차원의 존재로 완전히 도피한다. 결국 아내의 도피는 인간으로서는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은 ‘존재’하는 이상 모든 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정립해나가고, 사회적 관계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인간 모두는 누군가의 아내, 남편, 자식, 부모, 동료, 이웃이다. 인간은 누군가의 ‘아내’ 혹은 누군가의 ‘친구’등의 역할을 거부할 수는 있지만 ‘자식’과 같은, 태어남과 동시에 부여받는 역할은 거부할 수 없다. 설사 이 모든 관계들에서 자유롭다 하더라도 인간이라면 반드시 가지는 존재적 특성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이며 ‘성(性)’을 가지고 태어난다. 개인이 가지고 태어나는 ‘성’은 이미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사회적으로 재단되고 규정된 의미를 부여받은 요소이다. 성적 규정은 인간성의 근본에 위치한다. 생물학적 성은 어떻게 해서도 벗어나거나 거부할 수 없는 것이며 이는 사회적 성으로 확대, 재정립된다. 그리고 이는 아내에게 족쇄로 작용한다. 아내가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성의 근본에 있는 성은 사회적 성(gender) 일뿐 아니라 인간 본연의 성 그 자체이다. 자신의 인간성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여성성을 거부해야 한다. 그만큼 성은 가장 본질적인 단계에서 인간을 규정한다.

 그리고 아내는 이러한 근본적인 ‘규정’을 견딜 수 없는, 나면서부터 납화살을 맞고 태어난 존재이다. 영원히 자신을 옭아매는 ‘여성성’으로부터 맹목적으로 도망치려 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바라는 자유는 인간이 스스로 끊어낼 수 있는 관계나 역할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따라서 아내가 완전하게 자유로워지려면, 다시 말해 오래도록 그녀가 바라 왔던 대로 바람과 햇빛과 물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려면, 그녀의 ‘인간성’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그녀가 인간인 이상 인간성이라는 근본적인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아내의 도피는 자기 존재로부터의 도피, 거부이다.
     
 이 소설에서 표면에 뚜렷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포인트는 아내의 불임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 아내가 불임이었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이 부부는 결혼 생활 사 연차에 아이가 없었으며 부부관계조차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의학적 용어로서의 불임은 아니더라도 아내는 잉태를 거부하고 있는 일종의 정신적 불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아내는 식물로 변신한 뒤 열매를 맺는다. 일반적으로 열매는 여성성과 관계된다. 아내가 식물이 되어서야 비로소 잉태한 ‘열매’는 남편의 개입 없이 스스로 맺어낸 것이다. 아내는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성, 여성성에서 벗어나 ‘중성’인 식물로 변한 뒤에야 열매를 맺었다. 성으로부터의 탈피를 욕망하는 여성의 모습은 박완서의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도 잘 드러난다.
     

종업원들은 다들 타이츠처럼 몸에 착 달라붙는 검정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몸매는 청년이라기보다는 소년처럼 군더더기 없이 청순하고 깡말라 보였다. 저런 걸 유니섹스라고 하는 걸까. 여자인지 남자인지 도저히 분간이 안 되는 젊은이들이었다. 하나같이 화장기 없이도 얼굴은 희고 곱살하고, 정결한 생머리를 짧게 커트한 애도 있고 뒤로 묶은 애도 있었다. 바지에 비해 다소 헐렁한 윗도리를 걸친 가슴은 아무렇지도 않게 빈약했다. 그녀는 그 애들의 중성적인 엉덩이나 넓적다리를 슬쩍 만져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곳은 아이스바처럼 단단하고도 시릴 것 같았다. 그 애가 만일 남자라면 그 짓은 성추행이 될 것이다. 온몸 도처에서 개칠한 냉기를 뚫고 열꽃처럼 피어나는 열망에 그녀는 으스스 전율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가부장적 성 역할에 메여있는 전형적인 중년의 여성이다. 초라한 가장인 남편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그 자신 역시 가정에서 성 역할에 매여 있는 인물이다. 그녀가 카페의 중성적인 직원들의 몸을 만지고 싶다는 충동은 ‘성’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젊은이들의 몸을 만져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은 성적 욕망과는 매우 거리가 멀며 오히려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성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난, 싱그러운 중성성에 대한 선망이라고 볼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아내가 중성성 자체를 지향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아내는 여성성에서의 탈피를 원했기에 결국 외부의 개입 없이 자신의 암술과 수술만으로 잉태하는 중성, 정확히 말하면 자웅동체의 식물이 되었다.



존재의 자유


 아내와 다프네는 그들을 괴롭히는 존재로부터의 도피에 성공하고 자유로움에 도달했지만, 그 자유로움은 그들이 본래 원했던 형태와는 차이가 있다. 특히 다프네는 자신이 혐오한 아폴론으로부터는 벗어났지만 평생 자유롭게 숲 속을 뛰놀며 살고 싶다는 소원은 더 이상 이룰 수 없게 되었다. 아내가 궁극적으로 바랐던 바도 엄밀히 말하면 식물로의 변신은 아니었다. 다만 아내가 바라던 형태의 자유가 식물의 모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남편인 ‘나’는 아내를 옭아매는 ‘인간적’인 관계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아내는 식물로 변한 뒤에도 남편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아내의 문제는 무엇일까. 어떤 괴로움이 심인성(心因性)의 장애까지 불러일으킨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여자가 이렇게 나를 외롭게 해도 되는 것인지, 무슨 권리로 나를 외롭게 하는 것인지 의아해질 때마다 막막한 염오감이 오래된 먼지처럼 켜를 이루어가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변신 전 아내는 남편의 행복한 일상을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부품일 뿐이다. 인간이 자연을 인간과 구분된 존재, 무제한적인 자원 공급자로 파악하는 것과 같이 남편은 아내를 남성적 ‘성취’가 발생하는 환경과 조건을 제공하는 존재로 여긴다. 아내는 남편으로 대표되는 사회의 주체들에게 환경, 배경으로 취급된다. 어머니로 대표되는 전통적 여성의 생활공간인 바닷가 고향에서 벗어나서도 여전히 아내는 타자이다. 그녀는 주체의 ‘배경’이라는 족쇄를 벗어날 수 없다. 식물로의 변신 뒤에도 남편은 여전히 아내를 ‘내 여자’로 지칭한다. 남편은 ‘내 여자’를 정성껏 돌보고 애정을 쏟으며 ‘내 여자의 열매’를 받아 소중히 화분에 심는다. 아내가 자유를 찾아 도피한 후에도 남편은 여전히 아내와의 관계를 예전의 그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와 다프네의 자유가 불완전하다고 볼 수는 없다. 아내와 다프네는 이제 기존의 인간적인 관계와 역할에 얽매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식물로의 변화는 단순히 이들의 겉모습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과는 아예 다른 차원의 존재로 탈피한 것이다. 이제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여성’이라는 인간적인 속성을 요구할 수 없다.


이상하지요 어머니.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고 맛보는 것이 없어도 모든 것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져요. 간선도로를 거칠게 미끄러져가는 차들의 질주를, 그이가 현관문을 열고 나에게로 다가오는 발소리의 미세한 울림을, 비 내리기 전이면 비옥한 꿈에 젖어 있는 대기를, 안개를 품은 새벽하늘의 희부연 빛을 나는 느껴요.


 아내는 식물로의 변신으로 비로소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얻었다. 그녀가 여전히 아파트 13층의 베란다, 좁은 화분에 갇혀 있으며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아내의 자유는 떠돌아다니는 것, 지구 반대편까지 가는 것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내 스스로가 예상했던 모습으로는 아니나 그녀는 식물의 모습으로 “바람과 햇빛과 물만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이 여전히 그녀를 ‘내 여자’라고 여기고 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 그녀는 인간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프네 역시 마찬가지이다. 월계수가 된 다프네를 보며 아폴론은 이렇게 말한다.

“내 아내가 될 수 없게 된 그대여, 대신 내 나무가 되었구나.”

 아폴론은 다프네의 가지로 수금과 화살통을 장식하고 다프네의 잎으로 월계관을 만들어 승자의 머리에 씌우겠노라고 말한다. 이에 다프네는 가지를 앞으로 구부리며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듯이 잎을 흔들었다. 이것은 주체(남성)의 사랑과 호의에 순응하는 일종의 타협이 아니다. 이미 그들은 다른 차원의 존재로서 자유로우며, 이는 운명에서 벗어나는 도피이다.


[이자연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