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문학]

글 입력 2018.02.15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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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경악한 적이 있다. 사연을 소개하고 사연의 주인공을 스튜디오로 초대해서 고민을 들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날의 사연 중 하나는 ‘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애인’때문에 고민하는 한 여성의 사연이었다. 별 생각없이 듣기 시작한 여성분의 이야기에 점점 화가 치밀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얘기인즉슨 애인이 시시 때때로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사진을 찍어 보고하길 원하고, 옷차림 지적을 비롯한 끊임없는 행동 제한을 일삼는다는 것이었다. 엄연한 데이트 폭력이었다.

 하지만 당사자는 본인의 자존감이 낮아서 자신에게 여자친구가 과분하다고 생각했다는 눈물 섞인 합리화를 했고, ‘충분히 멋져요. 자존감을 회복하시길 바래요.’라는 식의 훈훈한 마무리로 끝이 나는 걸 보며 멍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연을 보는 비슷한 상황의 가해자들이 행여나 저런 식의 이유를 대며 합리화 하진 않을지, 또 다른 피해가 양산되지는 않을지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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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슷한 시점에 <우리에게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도서를 접했다. 꽤 오래 전에 추천을 받고 꼭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학교 친구들과 소규모로 함께하는 문화모임에서 읽게 되었다. 책을 몇 장 넘기고 나니 왜 페미니즘 입문서라고 하는지 이해가 갔다. 항간에 들려오는 소식들, 일상의 그리 멀지 않은 반경 내에서 우리는 수많은 혐오와 폭력을 마주한다. 그러한 현장에서 대다수의 여성은 침묵한 채 괴로워할 수 밖에 없거나 입을 떼고 나서도 수많은 반감 섞인 말들을 듣는다.

이 책은 그런 상황에 대한 무례한 질문과 주장들에 대응하는 매뉴얼과도 같다. 굳이 친절할 필요도, ‘설득’하려 애쓸 필요도 없다는 거다. 나 또한 나의 생각을 공유 할 수 없는 무지한 상태의 사람과 대화를 하다 충격을 받거나 기운이 빠졌던 경험이 많았기에, 이 책은 일방적인 설명이 아닌 같은 시각에서 이해하고 공부하려는 노력이 되어줄 것이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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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앞부분에서는 본격적인 대화를 하기 이전 내가 지녀야 할 태도들을 순차적으로 제시한다. 우선 마음을 단단히 여미고 나의 입장부터 확실히 한 뒤에, 상대방의 입장이 무엇이지 파악하라고 이야기한다. 성차별에 관한 이슈로 대화할 때 발생하는 질문과 대답, 그리 효과적이지 않았던 대답들도 제시해주고 있다. 여기서 페미니즘에 관해 자연스럽게 드는 고민과 궁금증을 정리해주고 있어 모호하게 흩어져 있던 나의 입장을 명확히 할 수 있었다. 덕분에 대화를 하다 말문이 막히는 주장에 적절한 답과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열쇠를 얻은 것 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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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전편에서는 말그대로 실제 대화 사례를 제시하며 현실적인 대응 매뉴얼을 알려주고 ‘연습하기’ 코너도 준비되어 있다. 이 책의 좋은 점은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이라는 부제목에 걸맞게 스스로 발화해보기를 독려하고 우리가 혐오에 대응할 언어를 제시해준다는 점이다. ‘성희롱’, ‘여성혐오’ 등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던 현상들을 명명하는 언어들이 생겨났기 때문에, 공감과 연대, 힘이 생겨났다. 여성 혐오의 피해 사례를 전해 듣거나 경험했을 때, 감정적인 분노밖에 할 수 없었던 감정에 치우쳤던 날들에 대해 좀 더 현실적인 가이드를 해 주는 책이었다. 여러 가지 반성도 하게 됐고 꼭 성평등 담론에 국한되지 않는 일상을 살아가는 전반적인 태도에 있어서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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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다움은 없다.’ 혐오 앞에서는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성에서 오는 두려움도, 권력의 차이도, 보복이나 주변인의 반응에 대한 눈치 그 어느 것도 개인의 본질을 해하는 데 합당함이 될 수는 없다. 침묵해야 할 이유가 없다. 두려움이 부당함을 이겨낼 수 있는 토대가 필요하다. 더 많은 피해자들의 용기와 진실에 대한 폭로를 응원하고 있다. 혐오와 폭력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같은 상황에 대한 인식과 입장이 극명하게 갈리는 친구, 가족, 동료가 있다면, 명절 선물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책을 선물해 보는 것도 좋겠다.


[최은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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