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우리는 아직도 앤ANNE을 기다린다 : 뮤지컬 < 앤ANNE > 앵콜 공연

글 입력 2018.01.2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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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이 기다려온 캐릭터, 앤ANNE

 
최근 많은 사람들이 한국 서사의 계보를 향해 쓴소리를 내뱉고 있다. 골자는 여성 캐릭터의 부재. 아직도 서사 전면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가 드물뿐더러, 그중에서도 잘 만든 캐릭터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지금껏 많은 여성 캐릭터는 누군가의 어머니, 딸, 아내, 연인으로서 잠깐 얼굴을 비추거나, 남성 캐릭터의 욕망 성취를 위해 성녀 혹은 악녀의 구도 속에 박제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등장하지 않는 만인의 ‘썅년’이 되거나, ‘여자시체 1’이라는 배역 명에 갇혀, 누군가의 가학성과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로써 이용되거나.
 
관객들이 쓴소리를 내뱉으며 기다리는 것은, 여성의 욕망이 여성의 목소리로 발화되는 서사이다. 최근 공연계는 이러한 요구에 발맞춰, 변화를 꾀하고 있다. 지난 한 해만 봐도,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레드북>, <키다리 아저씨> 등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작품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모든 캐릭터가 잘 만들어졌다곤 말할 수 없다. 여성의 일생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 목소리를 앗아 남자 조카에게 줘버린 뮤지컬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같은 작품도 있었으니. 뮤지컬 <앤ANNE>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2017년 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렀고, 앵콜 공연으로 열기를 잇고 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과 동명의 만화 영화로 잘 알려져 있는 앤은, 뮤지컬 관객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던 여성 캐릭터이다. (출처, <더뮤지컬> 통권 162호 3월호 게재기사) 그 기대감에 부응하며, 앤은 하얀 길과 호수를 건너 우리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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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정말 이야?


<앤ANNE>의 시작은 걸판여고 학생들이 연다. 걸판여고 연극반이 <빨간 머리 앤> 공연을 올린다는 설정으로 극중극은 시작한다. 이는 미니멀한 세트와 소품으로 <빨간 머리 앤>을 펼쳐내기 위한 재간이었을 게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학생들이 앙상블로 등장하는 것도 용인할 수 있고, 남학생 둘이 오리발(?) 장난감을 들고 말(馬)로 분하는 것도 눈감아 줄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극중극으로 들어가는 길은 너무나 험난하다. 걸판여고 시퀀스는 손대기 힘들 정도로 가벼운데, 어수선한 오프닝과 유치한 대사, 유치한 설정이 큰 몫을 한다. 그래, 걸판여고 학생들이 걸판남고 학생들의 외모를 보고 공연을 하기로 했을 수도 있다. 안 될 건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극 안의 극 <빨간 머리 앤>에도 눈감아 주어야 할 어수선한 장치들이 널려있다는 것에 있다. 어수선한 오프닝에서 어수선한 극중극 시퀀스로 넘어가면,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정말, 내가 기다려온 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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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 앤이 세 명이라니! 극중극 속에선 앤1, 앤2, 앤3으로, 세 명의 앤이 무대에 오른다. 앤의 정착, 앤과 다이애나의 우정, 어른이 된 앤은 각각 다른 배우가 펼쳐낸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나면 모자를 브릿지로 다른 앤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연극반이기에 가능한 설정이다. 누가 앤 역할을 할지 고심하며 ‘누가 앤이야, 앤이 누구야’를 묻던 첫 넘버에서 시작하여, 세 앤의 이야기를 거치고 나면, ‘실수투성이’, ‘말썽꾸러기’ ‘빨갛디빨간 머리카락’의 앤은 ‘나’의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세 명의 앤이 펼쳐내는 이야기를 통해, 앤의 이야기는 단 한 명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열리게 되는 것이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우리의 지난날  


주근깨 빼빼 머리 빨간 머리 앤이 내가 되고 우리가 되는 건, 원작 <빨간 머리 앤>의 강력한 힘 덕분이다.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버림받을 뻔했던 앤, 빨간 머리라 사랑받지 못했던 앤, 그럼에도 밝게 살아가는 앤. 그런 앤이 가족을 만나고, 친구를 사귀며, 꿈을 찾고, 소중한 사람을 잃기도 하고, 사랑을 찾아가는, 이 일련의 성장담은 관객들이 만나고 싶어 한 앤의 이야기다. 남자아이가 아니라 환영받지 못한 여자아이, 외모 때문에 놀림당하던 여자아이, 친구와 함께 우정을 맹세하고 티타임 놀이를 하던 여자아이, ‘널 좋아하기 때문에’ 남학생이 너를 괴롭히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던 여자아이. 우리의 머리는 붉지 않더라도, 앤은 많은 여성들의 어린 날을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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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를 닮은 성장담은 그래서 눈물 나게 예쁘고 사랑스럽다. 남자아이가 아니라 환영받지 못했던 아이가, 에이번리 마을의 애정으로 성장하고, 빛나는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는, 여성 관객의 지난날을 그리고, 현재를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길 모퉁이를 돌면 분명 좋은 일이 펼쳐질 거라고” 우리를 다독거려준다. 엔딩 씬에서 앤1의 삶, 앤2의 삶, 앤3의 삶이 교차되어 펼쳐지면, 그 모든 순간이 앤이었고, 우리가 곧 앤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누구도 관심 가져주지 않았던, 이야기로 만들어지지 않았던 내 어린 날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 어떻게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있겠나. 여자아이가 자라나며, 어떤 말씨를 쓰고, 어떤 놀이를 하고, 어떤 괴로움을 겪으며, 끝내 어떻게 성장하는가. 관객들이 <빨간 머리 앤>을 기다려온 이유도 분명 여기에 있다.

 
 
다시 길 모퉁이를 돌아올 앤 ANNE 


예쁘고 사랑스러운 와중에도 한 가지 의문은 생긴다. 관객들이 원하던 앤의 이야기는 앤 한 사람의 성장담이, 앤 한 사람의 목소리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었을까? 세 배우가 나눠서 전달하는 앤의 인생은 응집력이 약해서, 무대 위 앤은 하나의 캐릭터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앤과 비슷한 여성들의 인생이 덧붙은 것 같이 느껴지니, 캐릭터로서의 앤의 특수성은 옅어진다. 앤이 무대에 오르지 않았던(아동극을 제외하곤), 그리고 좋은 여성 캐릭터가 이제야 조금씩 나오고 있는 창작 뮤지컬의 현실에선, 세 명의 여성 배우가 한 인물을 나눠서 연기하는 모습엔, 씁쓸한 현실의 자화상이 투영된다. 분명한 것은 앤을 만났음에도, 여성 캐릭터에 대한 목마름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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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내적인 아쉬움도 있다. 예쁘고 아름다운 성장 서사 곳곳에서는 성기고 어설픈 것들이 ‘딸기 주스 인 체’하고 있다. 빼빼 마르지 않은 학생에게 “넌 딱 맞는 역할이 있다”며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 올드한 코믹 요소엔, 왜 저 아이는 ‘앤’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지? 여자아이가 앤처럼 빼빼 마르지 않았을때, 앤이 되고 싶다고 나서는 게 비웃음을 당해야 하는 일인가 하는 불쾌감이 불쑥 고개를 든다. 거기에 극중극의 성긴 서사로 인해, 앤이 나오지 않는 장면에선 지루함까지 느껴진다. 딸기 주스가 아니라 포도주를 마시고 잠든 다이애나처럼 잠들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지사.
 
독한 포도주를 그냥 딸기 주스이려니 하고 꿀떡 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앤의 이야기는 더 잘 만들 수 있는,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아닌가. 만나고 싶은 이야기를 만났으니, 어설퍼도 괜찮다는 면죄부는 우리에게도 앤에게도 독이 되리라. 무엇보다 이제 우리에게 다가온 빨간 머리 앤이 곁에서 오래도록 성장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그리고 다시 길모퉁이를 돌아 우리에게 다가올 앤은 더 반짝일 것이라고 믿는다. 매슈의 믿음처럼, 마릴라의 믿음처럼, 앤의 믿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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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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