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런데도 여전히 삶은 계속된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

글 입력 2018.01.05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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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그런데도 여전히 삶은 계속된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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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빈곤이 문화가 된 젊은 세대에 보내는 작은 메시지

 좋은 제도가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나쁜 제도가 불행을 낳는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휴먼 서비스를 공부한 필자는 '나쁜 제도'가 가져다주는 고통에 익숙하다. 필자와 같은 전공생이 아니더라도 지금 청년들에게 '빈곤'은 '증상'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가 되어버렸다. 친구들 사이에서 수저 계급론과 N포 세대라는 단어가 장난스럽게 오갈 때마다 깨닫는다. 우리의 빈곤은 이미 해학이 아니라 냉소다. 빈곤이 개혁의 대상이 아닌 문화가 되어버린 것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치밀하게 짜인 계급체계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최선의 방법이 그것이었을 뿐이다. 필자는 청년 세대에게 책임이 없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구조 속에서 청년의 목소리가 소외될 수밖에 없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로 전국에 변화의 바람이 불면서 우리들의 냉소도 조금씩 씻겨나가기 시작했지만, 청년빈곤 문제가 나아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

 연극 <경남 창녕군 길곡면>에는 계몽적인 메시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연극은 제도의 부실함과 분노를 담아 거대한 담론을 이야기하는 대신,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들은 제도를 욕하지 않고 최대한 그들의 삶 아래에서 해결해나가려고 한다. 그런 점이 이 연극의 가장 재밌는 점이다. 연극은 특정한 방향을 제시하는 대신 부부의 문제와 행동을 비춤으로써, 단순히 '나쁜 제도'를 넘어서 '인간의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제도는 자주 개인의 삶을 고통의 나락으로 밀어 넣는다. 하지만 나쁜 제도와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연극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훌륭하게 포착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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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큰 담론이 아닌 가깝고 작은 이야기

 연극 <경남 창녕군 길곡면>은 우리 세대와 가장 닮은 부부가 등장한다. 비정규직 부부는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에 늘 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들은 높지 않은 소득수준을 가지고 있지만, 소위 부유층의 문화를 동경한다. 하와이에 가고 싶다거나, 비싼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그들의 모습은 평범한 우리의 모습을 담았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일반적이고, 일반적이기 때문에 불안정한 구성원이다. 맞벌이 시절에는 돈을 벌 때 조금씩 조짐을 보이던 빈곤은, 아내의 임신 소식으로 본격적으로 그들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들의 고통은 제도가 아닌 개인이라는 아주 작은 측면에서 다뤄진다. 그들의 불안한 상황을 만든 것은 거대한 구조고, 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당장'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그 구조에서 해답을 찾지 않는다.

 이들의 태도부터가 그렇기 때문에 극이 끝날 때까지 관객에게 연극은 한편의 '썰'에만 머무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것은 극의 이야기와 고통이 그만큼 흔하고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아내가 남편에게 한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은 주인공 부부가 살고 있는 지역의 이름이 아니라, 기사에 나온 부부가 살고 있는 지역의 이름이다. 기사에 따르면, 아내의 임신 소식으로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다. 아내는 기사를 읽고나서, "경남이 어딘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이야기 같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연출자는 '흔하기 때문에' 사소해 보이는 제도의 고통이 그 개인의 삶에서는 치명적일 수 있다는 점을 꼬집고 있다. 이런 연출은 단순히 이 기사뿐만 아니라, 무대에서도 두드러진다. 두 부부의 침대는 '아이의 탄생'으로 불편한 모양새를 띠게 된다(필자가 제목 위에 첨부한 사진을 확인하라). 가정의 안정을 상징하는 침대가 제대로 눕기 어려운 모양새를 띠게 된 것은, 빈곤이 이들의 소담한 가정의 안정을 흔들어 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맥락에서, 두 부부가 불편한 침대에서 껴안고 위로하면서 잠에 빠지는 장면은 이 연극의 가장 뭉클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3. 그런데도 여전히 삶은 연속된다.

 아내의 임신 사실로 일련의 사건이 있지만, 그들은 결국 아이를 낳기로 한다. 그 후 부부가 아이를 낳기 위해서 가계부를 검토하는 장면은 이 연극의 하이라이트다. 남편의 200만원 남짓한 월급을 기준으로 그들은 '필요 없는 것'들을 삭제해 나간다. 이 과정은 아주 해학적으로 그려진다. 돈 버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생활에 맞춰지고 나서야 가계부를 닫은 이들은 장래를 더 암담하게 떠올린다. 하지만 단순히 연극이 이런 일상적인 비극에서 막을 내린 것은 아니다. 필자가 이 연극에 어떤 특별한 감정을 가지게 된 것도 바로 훌륭한 엔딩 때문이다. 가계부를 정리하면서 부부는 많은 것을 포기한다. 그들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즐겼던 것들, 많다고 할 수 없는 작은 욕심들, 개인의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그런데도 기어코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남편의 색소폰이었다. 색소폰을 포기하려는 남편을 아내는 울면서 "당신이 전부터 꿈꿔왔던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린다.

 극의 끝을 남겨 둔 마지막 장면, 장래를 암담하게 그리는 부부의 모습은 우리가 걱정했던 그대로이다. 하지만 남편의 손에는 색소폰이 있다. 그는 아주 어색한 손놀림으로 색소폰을 분다. 그가 포기한 다른 것들이 아까울 정도로 아주 어색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두 부부는 웃고 있다. 색소폰은 결코 포기하지 못한 작은 소망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뒤로 밀려나는 N포 중 하나로, 정말 남편이 '바라는 것' 중 하나였다. 색소폰은 아이의 탄생과 같은 의미가 있다. 아이는 두 부부가 남몰래 조금씩 바라왔지만, 극 내내 현실의 장벽에 막혀 포기할까 말까를 고민했던 작은 소망같은 존재 였다. 그들이 새로 선택한 삶은 더 불안하지만, 남편이 색소폰을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부부는 아이를 지우지 않았다. 그것은 이 불안한 사회 속에서도 잊히지 않는 인간의 참된 작은 부분이었다. 그들은 현실의 장벽을 넘어 그 작은 소망을 다시 찾음으로써 정말로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들이 고통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한 선택은 위대하지만 평범한 것이다. 아니, 그 인간적 소망은 고통보다 더 강렬한 색을 가졌다. 연극은 인간의 일반적 삶을 그려냈다.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아름답고,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인류는 지금까지 생존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경남 창녕군 길곡면>은 새해에 찾아온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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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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