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새삼스럽고 전혀 다른, 그렇지만 따듯한 연극 그럼에도 프로젝트

글 입력 2017.11.29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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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온 지 이틀 만에 난데없이 비가 내렸다. 길가에 내린 빗방울을 즈려 밟으며 소극장 혜화당으로 향하는 기분은 새삼스러웠다. 주로 친구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필자가 간만에 홀로 극장을 찾으려니 그럴 수밖에. 그런데 웬걸, 마치 한 날 한 시에 우리 새삼스러워보자고 약속이라도 한 것일까. 연극 <그럼에도 프로젝트>는 최근 보았던 연극들 중 가장 익숙하면서도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프로젝트>는
우리가 길러진 시점부터의 이야기를
여러 개의 에피소드로 엮어,
 
나 자신의 정체성보다는
다른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길러진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해 그려냈습니다.
 
이 짧은 에피소드들을 통해
이해받지 못한 나,
위로받지 못한 나,
그리고
나와 다른 너를
 
‘그럼에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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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이 시선에 의해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의미를 가진 문장을 이미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각종 특강에서 들어봤을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쉽게 해내지 못하는 일이기에 가끔은 부담스럽고 거북하기도 한 그 말. 사방이 하얀 벽지로 환하게 발린 정사각형 모양의 방처럼 말이다. 하지만 연극 <그럼에도 프로젝트>는 말한다.


우리 작품엔 어떤 ‘교훈’이 없으며
그저 서로 ‘이해’하고 ‘위로’하고자 한다.
 

 그렇다. 이 연극, 선악의 대결이나 은근한 교훈, 개연성 있는 스토리나 치밀한 서사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6명의 배우들이 각자의 경험으로부터 발췌해 낸 6개의 에피소드가 때로는 이질적으로, 때로는 새끼손가락을 아주 느슨하게 건 채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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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째 돼지 (배우 박수아)

우리 엄마는 통이 커. 대-따 커.
또, 빠르게, 신속하게 지을 거야. 
그래야, 남들보다 더 잘 하는 거니까.
남들보다 더 빨리 해야 돼.
남들보다 빠르게 한다는 건 
남들이랑 클라스가 다르다는 거니까.

 
2. 까마귀 (배우 이창훈)

우리 같은 놈들이
왜 이렇게까지 따라하면서 사나?
언제든 그 무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너흰 좀 내려가.
여기 아니면 난 갈 데가 없단 말이야.

 
3. 테스터 (배우 하 영)

테스터 : 지금 나의 감정은?
로봇 : 인식 불가. 그건 내 능력 밖의 일이야.
테스터 : 내가 진짜 원하는 건
‘그때 거기 기억해?’ 이렇게 시작하는 말들이야.

 
4. 프리허그 (배우 김혜나)

남자 : 정말 혼자 다 할 수 있어요?
여자 : 그게 편하니까요.
누군가가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만큼
위로를 해준다는 보장이 있어요?
보장도 없는 위로를 내가 왜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데요?
...어차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구요.

 
5. 문앞에서 (배우 김명식)

카프카 <아버지에게 쓰는 편지>
'나의 아들도 나처럼 되면 어떡하지?'

 
6. 구두장이 (배우 최태용)

남이 고친다고 편해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요즘은 신발이 발에 맞춰지기도 한다더군요.
 
  
 6가지 이야기들이 각기 등장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낯선 전개 방식이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최소한 이들이 어느 정도 공통점은 있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돼지였다가, 까마귀였다가, 로봇과 사람을 거쳐 구두장이로 가는 여정이라니. 왜 이토록 무지막지하게 다른 이야기들이 살을 맞댄 채 부대끼고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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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그럼에도 프로젝트>에는 위에서 소개한 주요 이야기들 외에도 독특한 요소가 또 하나 존재한다. 바로 ‘암전’이다. 조명이 완전히 꺼지고, 형체를 알 수 없는 사람 몇 명이 숨죽인 채 걸어 나와 각자 손전등으로 천장과 벽면을 여기저기 비춘다. 그러면서 집 천장에 대해 물이 새 얼룩이 지고, 벽지가 벗겨지고, 당장이라도 마감재가 떨어져 내려올 것 같은데도 아무도 고칠 생각이 없다며, 덤덤히 내뱉는다. 약간 차이는 있지만 극중 두 번 정도 이러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놀랍도록 그들은 집 전체를 더듬으면서도 절대 ‘서로’를 비추지는 않는다. 비좁은 공간에 5명도 넘는 사람들이 발을 딛고 동그란 빛을 이리저리 휘두르는데도 말이다.
 
 잠시 주어진 어둠 속에서, 무심하고 답답한 장면을 앞에 놓고 홀로 남겨져서야, 무대 위에 마구잡이로 쏟아져있는 그림들이 하나로 그려졌다.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집처럼, 세상은 불안정하고 불완전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천장을, 세상을 고치거나 바꾸려 하지 않는다. 주어진 대로 살아가며 외부의 시선과 세상의 기준을 연장 삼아 자기 자신을 잘라내고 다듬고, 또 깎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 본모습을 어둠 속에 감추고, 동시에 같은 이유로 괴로워하는 상대방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길들여지는 고통을 울부짖으면서도, 바로 옆 사람과 옆 사람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알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이다.


당신을 길러낸, 혹은 당신이 길러낸 이 신발과 함께
앞으로도, 좋은 곳 많이 다니시길 바랍니다.

 
 비록 서로를 발견하지 못한 채 극은 끝이 나지만, <그럼에도 프로젝트>가 관객을 체념시키거나 좌절에 빠뜨리려는 ‘프로젝트’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구두장이가 '신발이 발을 길들이기도 하지만 발이 신발을 길들이기도 한다'고 말할 필요도, 굳이 좋은 곳 많이 다니라는 덕담같은 인사를 건네 한껏 경직된 몸과 마음을 훅하고 녹여버릴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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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프로젝트>는 티켓도 평범하지가 않았다. 매표소에서 브로셔만한 티켓을 받아들었을 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극을 보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1번부터 6번까지 자그마한 글씨가 빼곡한 종이도 가져가라는 것이다. 연극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며 한 장 씩 들여다보니, 사실상 극의 내용이 거의 다 적혀있었다. 창작물인데, 이렇게 전체 공개해버려도 되는건가?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럼에도 프로젝트>라면 가능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6명의 배우들이 만들어간 연극이지만, 결국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건 이 종잇장을 받아든,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두의 이야기니까. 곱씹을수록 참, 따듯한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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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정보

주취 및 주관 ㅣ 창작집단 봄의 주막

작/연출 ㅣ 공동창작 황지현(연출), 박예선(협력연출)

장소 ㅣ 소극장 혜화당

기간 ㅣ 11.23~12.17

시간 ㅣ 평일 오후 8시,  토일 오후 3시, 7시 월요일 없음

티켓 ㅣ 전석 3만원

문의 ㅣ 010-9232-7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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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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