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전국노래자랑'과 나의 기준, 나의 오만 [문화 전반]

오래된 프로그램을 통해 오늘도 배운다.
글 입력 2017.11.21 22:4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메인 전국노래자랑.jpg



"전국노래자랑? 또 온대?"


본가가 있는 고향에서 KBS의 <전국노래자랑> 촬영이 잡혔다. 이번까지 합하면 총 4번째 방문이다. 평소 각종 모임에서 노래 한가락하기로 유명한 아빠도 예선에 접수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관리자인 아빠의 친구가 우리 00이는 꼭 나가야 한다며 '선접수 후동의'를 구한 형태지만.

아빠의 예선 참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친한 친구와 몇 년 전에 열린 3번째 예선에 나간 전적이 있다. 다들 티 안 내더니 예선장 곳곳에서 동네 사람들을 발견했다는 게 그 날의 첫 번째 코미디요, 첫 소절 구성지게 부르고는 가사를 까먹어 아빠가 광속의 땡!을 받았다는 게 두 번째 코미디요(스스로 '사시나무증'이라고 일컫는 내 무대공포증의 출처를 20여 년 만에 알게 된 계기였다), 아는 모든 낯들이 남김없이 다 떨어졌다는 게 세 번째요, 그 탈락의 현장을 이웃들이 엄마에게 생중계해줬다는 게 마지막 코미디다. "아이고 이 집 양반 마이크 잡자마자 땡 맞았댜~" 공교롭게 모여있던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윤씨 가문 가왕의 추락은 엄마의 낯을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본인의 탈락이 퍽 충격이었던지 아빠는 며칠 시름시름 실의에 빠졌다. 본인과 달리 남들은 다 부르고도 떨어졌다는 유치한 명분으로 그날의 상처를 털어내긴 했지만. 시간이 더 흐른 뒤에는 종종 먼저 회자하는 즐거운 추억으로까지 자리를 잡았었다.

마침 그때의 기억이 흐릿해져 갈 즈음, 이번에도 다시 찾아온 것이다. 저번처럼 허무하게 기회를 날리기 싫었던 모양인지, 본선 진출이라는 원대한 꿈을 안고 아빠는 선곡부터 연습까지 꽤나 신경을 쓰고 있다. 아니, 사실 옆에서 엄마가 더 부추긴다. 그때 당한 망신이 내심 마음에 남아있었나 보다.



"순수하고 뜨거운 설렘으로"


아빠에게 들은 예선의 현장은 생각보다 뜨겁고 치열했다. 미국 <아메리칸 아이돌>의 조상이 <전국노래자랑>이었나 싶을 정도로 깐깐한 무반주 심사는 기본이었다. 음정과 박자를 틀리면 예외 없이 땡처리다. 그럼에도 본선을 진출하는 수많은 참가자들은 중년 문화생활의 꽃, '노래교실'에서 갈고닦은 솜씨로 보통 노련한 게 아니란다. 나이 든 사람들의 프로그램이라는 이유로 내심 얕봤던 스스로가 무안해질 정도였다. 그곳은 나이를 잊은 사람들의 순수한 열정이 가득한 곳이었다.

낮에 혼자 찾은 노래방에서 예전에 같이 떨어졌던 동네 사람과 어색하게 마주치고, 똑같은 곡의 1절만 주야장천 연습하고, 달달 긴장하며 심사위원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이 모든 과정들이 그분들에게는 특별한 '이벤트'다. 가슴 떨릴 일 많지 않은, 누군가를 평가하는 게 더 익숙한 나이인 우리네 부모님들에게 오랜만에 청년으로 돌아가 '도전'이란걸 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 바로 <전국노래자랑>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다르다. 기준도 다르다."


자취를 하며 TV와 멀어진 삶을 살았고, 대학공부를 시작하며 사색과 인문학적인 함양을 갖춘 볼거리에만 가치를 두며 살았다. 나의 '고고한' 기준에 <전국노래자랑>이 부합했을 리가 없다. 특산물 소개, 각설이 같은 분장을 하면 인기상, 트로트로 편향된 선곡 등은 내가 생각하는 훌륭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송해 선생님과 장수 프로의 역사는 인정하면서도 재미도 보람도 없는 게 왜 안 없어지는지 신기해했다. 지극히 내 기준의 오만하고 편향적인 시각이었다.

모든 TV 프로그램은 취향을 저격하는 세대가 있기 마련이다. 음악방송이 10대들을 겨냥하여 아이돌 위주로 바뀌었듯이, 중장년층과 노년을 위해 트로트 일색인 노래 방송 하나쯤은 메인 시간대에 남겨놔야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는다. 특히 조부모님 세대들에게는 별다른 이해력 없이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또한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일반인들을 공중파에 출연시켜준다는 것도 큰 메리트다. 어른들에게는 TV에 나온다는 게 여전히 큰 영광이자 기쁨이다. 오로지 가창 실력이라는 개인의 능력위주의 변별도 얼마나 정의로운지. 이 잠깐의 여정을 준비하는 동안의 설렘과 흥분이 어른들의 고단한 삶에, 혹은 권태로운 일상에 주는 파동은 마냥 작지 않다. 

내가 간과했던 <전국노래자랑>의 가치를 이제는 완전히 인정한다. 내 오만함은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 본 아빠의 설레어하는 얼굴과, 옆에서 잔소리와 훈수를 번갈아 하며 절치부심하는 엄마를 보며 와장창 깨졌다. 본가에 내려가는 주말마다 의무적으로 보던 프로였지만 이젠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엔 아버지가 본선 진출에 꼭 성공하셨으면 좋겠다. 부디. 제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이미지 출처: KBS N)


[윤단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