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참여 서사로서의 예술, 게임의 가능성 [게임]

게임 더 스탠리 패러블 을 중심으로
글 입력 2017.11.1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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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서사로서의 예술, 게임의 가능성
게임 <더 스탠리 패러블>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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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anley Parable


우리는 문화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쓰면서 예술이라는 단어를 쓰는데는 주저한다. 그사이에는 어떤 계급적인 것이 끼어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예술적'이다 라고 말할 때, 우리는 갤러리의 하얀 벽을 생각한다. 아니면 '아티스트'라는 단어에 비참하게 죽어간 천재 화가 고흐의 인생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차이의 발견은 오늘날에 와서는 무의미하다. 일례로 1917년에 예술의 환상을 뒤집는 뒤샹의 샘이 출품되었다. 아직 예술가의 기묘한 천재성을 신봉하는 예술의 경제구조가 뒤샹이 내놓은 <샘>의 충격만 답습하고 있지만, 이 양변기의 시작은 일상의 모든 것을 예술로 만들었다. 그 시간으로 부터 딱 1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의 세상은 4차 혁명을 앞두고 있다. 문화예술이라는 단어처럼 예술은 이제 문화의 영역이 되었다. 여기서 문화란 집단과 개인이 느낄 수 있는 모든 일상의 심미성을 말한다.

그런데도 아직 이루어지는 대중예술 VS 고급예술의 구시대적인 논쟁을 볼 때마다 필자는 곰 인형과 테디베어를 떠올린다. 요새야 드라마에서 재벌 남자친구가 선물하는 거대 곰 인형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겠지만, 필자가 꼬꼬마였을 시절에 곰 인형과 테디베어는 분명 달랐다. 그건 마치 '오늘 점심은 샌드위치야.'  와 '오늘 런치는 샌드위치야.' 와 같은 것으로 좀 더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어떤 계급 판타지를 둘렀건, 예술이건 문화건, 테디베어건 곰 인형이건, 런치건 점심이건, 그 실체는 같다. 우리는 심미성을 느끼는 모든 것들을 예술이라 부르고, 예술가라 칭하는 그 스스로 모두가 예술가가 되는 시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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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el duchamp, 1917


필자는 이번 글에서 사회 속에서 '테디베어'가 되지 못한 '곰 인형' 중 하나를 다루려고 한다. 그것은 바로 게임이다. 우리는 게임을 떠올릴 때 게임중독과 그와 관련된 법규를 연관시킨다. 스타크래프트의 유행으로 오늘날의 많은 세대가 게임을 경험하고 느꼈지만, 그것이 예술이라는 인식은 다소 흐린 것 같다. 게임은 종종 '철없는 짓'으로 여겨진다. 필자는 '키덜트'라는 단어의 탄생이 문화로 남을 수 있는 어릴 적 놀이가 더 영역을 확장하지 못했던 것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프라모델 부터 보드게임까지 명백히 문화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의 영역으로 남겨놓는다는 것은 그 둘 사이의 섞일 수 없는 경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 유입되는 문화예술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모든 문화와 예술에 뚜렷한 대상이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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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anley Parable 게임의 오프닝.
주인공(플레이어)는 벌집같은 사무실에서
버튼 하나만을 계속 누르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는 버튼을 계속 누르면서 일하다가....
모든 사원들이 사라진 것을 깨닫게 된다.


기술과 시스템이 부족했던 초반에는 실제로 게임이 예술의 영역에 들어가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의 게임은 단순 서사와 오락추구 적인 경쟁만이 존재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이는 게임 철학 그 자체 보다 게임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가 더 크게 기여했다. 온라인 게임 대신 인디 게임이 떠오르고, 그것을 거래하기 쉽게 만드는 스팀이라는 플랫폼이 떠오르면서 게임 양성의 풀은 더욱 풍부해졌다. 게임을 진지한 성찰의 도구로 생각하는 개발자가 생겨나면서 깊은 철학과 이야기를 가진 게임이 출품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더 스탠리 패러블 The Stanley Parable>은 게임이라는 '예술' 장르에 대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작품이다. 게임의 장르는 워킹 시뮬레이터로, 워킹 시뮬레이터는 플레이어가 키보드를 이용해 내레이션의 말에 따라 걷는 게임을 이른다. 단순해 보이지만 게임을 플레이 하는 내내 플레이어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내레이션은 플레이어가 '올바른' 길로 가길 바라고, 플레이어는 내레이션의 말에 따를 수도, 반항할 수도 있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게임의 엔딩은 달라진다. 플레이어는 빅 브라더의 세상을 인식할 수도 있고, 게임 밖을 뛰쳐나갈 수도 있고, 기억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아니면 이 모든 것이 게임이라는 것을 깨닫고 미쳐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게임의 진미는 진엔딩에 있다. 진엔딩에 따르면 게임은 게임 속 자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게임이라는 세계 속에서 플레이어는 '따르거나' '불복하거나'의 선택을 자유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게임이 제시하는 불완전한 자유이므로 진정한 의미의 자유라고 할 수 없다. <더 스탠리 패러블>은 게임 밖을 나가 그 누구도 주워주지 않는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찾아야 함을 강조한다.

이처럼 게임은 기존 예술처럼 심미적인 경험을 제공하면서 깊은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예술이 가져다주는 철학적 메시지를 보완하면서도, 그에 더해 게임만이 가지는 특징이 있다. 게임에서 감상자는 적극적인 참여자가 된다. 우리가 흔히 문화생활이라 하는 영화와 전시회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감상하는 데만 그치지만 게임에서 수용자는 선택을 통해 이야기를 뒤집을 수 있다. 감상자는 적극적인 경험을 통해 메시지에 좀 더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수용될 수 있다는 소프트웨어라는 점도 시공간을 요구하는 예술의 한계를 뛰어넘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앞서 말했듯이 게임은 현대예술에서 자주 실험되었던 '감상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있다. 하나의 게임을 예시로 들었지만 이미 많은 게임이 단순한 오락을 넘은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문화예술은 오늘도 확장을 넓혀가고, 많은 창작자가 새로운 도전을 한다. 이제 우리도 어느 공간의 갤러리가 아니라 각자의 PC를 갤러리로 부르는 시대를 기대할 만하지 않을까?


[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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