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공.감.대] 공간07. 나, 부산에 다녀와야겠어

글 입력 2017.07.23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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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부산에 다녀와야겠어



  버스커버스커가 유명해지고 난 이 후, ‘여수밤바다’가 시도 때도 없이 거리로 흘러나오던 시즌에도 나는 별 감흥이 없었다. 유명한 가수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관례적으로 리메이크해 부르는 특정 장소와 관련된 명곡들에서도 뭉클한 낭만을 깊이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그런 내게 로컬송이 처음으로 와 닿는 일이 나타났다. 에코브릿지와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을 들어버린 것이다.







부산에 가면 다시 너를 볼 수 있을까
고운 머릿결을 흩날리며 나를 반겼던

그 부산역 앞은 참 많이도 변했구나
어디로 가야 하나 너도 이제는 없는데

무작정 올라간 달맞이 고개엔
오래된 바다만 오래된 우리만

시간이 멈춰 버린 듯 이대로
손을 꼭 잡고 그때처럼 걸어보자

아무생각 없이 찾아간 광안리
그 때 그 미소가 그 때 그 향기가

빛바랜 바다에 비쳐 너와 내가
파도에 부서져 깨진 조각들을 맞춰 본다

부산에 가면




  잘 알려진 곡은 아닌 것 같다. 나도 이 곡을 알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요즘엔 거의 맨날 듣는데 들을 때마다 새롭게 들리는 가사가 있다. 특히 오래된 바다만 오래된 우리만이라는 표현에 시선이 머문다. 그 구절에 가만히 귀를 담고 있으면 '지금은 우리가 아닌 각자'로 남았지만 '부산을 잊지 않는 것'은 그들 사이에서 변치 않을 굳은 약속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그저 아련한 옛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곡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흔한 사랑의 실패, 그 흔한 오래된 이별 얘기를 들으면서 이상하게 여기엔 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일까. 내겐 두고 온 사랑 같은 것도 없는데 왜 가슴이 아린걸까. 한참을 반복해서 듣고 나서야 조금은 끄덕거릴 수 있었다. 그래, 어떤 이별은 이별로 영영 끝날 수 없기도 하지. 내내 혼자서 반복할 수 밖에 없는 만남이라는 것도 있지. 그 만남의 장소가 이들에게선 '부산'이었나보구나. 한 철 혹은 몇 년을 머문 곳에 대한 아련한 기억은 내게도 있다. 나는 사실, 부산에서 태어났다. 거기서 13년을 살았으니 초등학생 시절까지를 거기서 보낸 것이다. 한 때, 라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긴 시간인 것 같지만 이상하리만치 나는 그곳을 떠난 이래로 추억하고 그리워한 적이 없다. 다시 돌아가겠다거나, 꼭 기억하겠다거나, 뭐 그런 사소한 다짐도 하지 않았다. 13살이었으니 어렸기 때문이기도 할테지만,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을 가슴에 남길 수 있을 만큼은 컸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부산'이라는 노랫말이 언급될 때마다 자꾸만 옛날에 살던 집과 동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무의식 중에 나는 이 노래를 듣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열심히 ‘보는 중’이었던 것이다. 자꾸만 상기되는 기억들. 어느 순간부터 가사 속 '너'가 '나'로 들리기 시작했다. 10년 전, 부산에서 살았던 여자. 그때 거기를 떠났던 여자가 다시 고향을 찾아가 과거의 자신을 만나는 노래로.

  그러고 나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대뜸 선언했다.

 
아무래도 나, 부산에 다녀와야겠어!




부산에 가면 다시 너를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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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랴부랴 2박 3일의 여행 일정을 잡고 버스를 탔다. 첫 날엔 방학 동안 부산에서 지내고 있는 대학 후배에게 연락해 그녀와 함께 오후를 보냈다. 광안리 인근에서 밥을 먹고 해변을 따라 걸어 민락동 쪽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언니가 여기에 있다는 게 이상해.’, ‘나도 그래. 여기 부산 맞아?’와 같은 시답잖은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재미나게 깔깔거렸다. 부산에서 살았을 때는 몰랐던 사람을 부산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니. 바로 여기에서 얼떨떨하고 급작스러운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이 신기했고 좋았다. 내겐 너무나도 아득하기만 한 기억의 장소에 편안하고 익숙한 얼굴이 있다는 것이 재밌기도 하고 무엇보다 감사하기도 했다. 사실 그래서 그녀를 만나고 싶은 것도 있었다. 두번째 날 일정이 고향 동네를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약간은 용기가 필요했다. 옛 고향이 내게 어떤 곳이라는 설명은 그녀에게 구구절절 꺼내진 않았지만 그녀와 보내는 시간은 항상 격려가 된다. 많은 것을 털어놓지 않아도 깊이 환영받는 기분. 덕분에 저녁부터는 혼자여도 그럭저럭 평온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해운대 근처 숙소에 짐을 풀고 해변 산책을 오래도록 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고 해가 완전히 저물어 컴컴해지기까지의 긴 시간 동안 최백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컴컴한 바다 물빛 위로 잠결 같은 기억들이 반짝반짝 풀어진다.


어디로 가야 하나 너도 이제는 없는데


  다음 날, 조식을 먹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숙소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라 한숨 눈 붙여도 될 거리지만 두근거리고 떨리는 마음에 그러지 못했다. 굉장히 변했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도 이상할 것만 같아서.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 웃기기도 했다. '부산에 가면'의 주인공이 옛 연인과 실제로 다시 만나는 날이 생긴다면 그때 그의 기분이 이럴지도. 생각보다 1시간은 금방 갔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인근 역인 '구명'에서 내려 출구로 나와 주변을 몇 번 두리번거린다. 천천히 나의 눈은 10년 전 기억을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세상에, 내가 진짜로 여기라니.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도 어플을 종료하고 기억을 더듬으며 발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나.

  익숙한 횡단보도, 간판도 그대로인 문구점. 아, 나 저기서 500원 주고 김치만두 사먹는 거 좋아했는데. 그냥 백반집이었던 곳이 게장집으로 변했네. 여기 아래서 빼빼로 데이에 어떤 남자애한테 과자 잔뜩 담긴 상자 선물 받았었는데. 조금씩 신이 나기 시작하면서 샐샐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집근처 중학교 담벼락은 없었던 벽화로 알록달록해졌고 원래 슈퍼마켓이었던 곳은 창고가 되어 있었다. 작은 동네라 그런지 많은 사소한 것들이 변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마침내 예전에 살던 골목 입구에 다다라서는 일부러 더 천천히 걸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마음 한 구석에서 구깃구깃하게 구겨져 있던 그림이 펼쳐진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 마쉬고 음미할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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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그대로 있어줬으면, 하고 제일 바랐던 음악학원은 사라지고 없고 그 자리엔 뜬금 없이 어린이집이 차지하고 있었다. 애기들이 많이 살 것 같은 동네는 아닌 것 같은데. 찾아오는 내내 피아노 맑은 선율을 상상하며 걸었는데. 사라졌다니. 순식간에 낯설 허망함이 몰려왔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어깨가 풀리면서 심란해졌다. 결국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그래서 무엇을 구경하고 봐야할지 하나도 모르겠는 기분에 휩싸였다고 표현해야 할까. 10년 전 이곳에서 살았던 시절에 이 좁은 동네를 오고가며 내내 느꼈던 막막함과 무기력함이 다시 엄습해 온다. 해운대로 그냥 돌아가서 쉴까. 그렇게 기운 없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중, 다시 나를 붙드는 것이 있었다. 어린 시절, 세상 맛있는 것들이 전부 다 모여 있는 것만 같았던 구멍가게. 나는 홀린 듯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그때부터는 막힘없이 걸어보자 생각했던 것 같다. 10년 전의 어떤 여자애가 씩씩하게 걸었던, 울면서 걸었던, 뒤를 돌아보며 걸었던, 혼자 걸었던, 같이 걸었던, 그 모든 골목을 다시 밟아 나갔다.


시간이 멈춰 버린 듯 이대로 손을 꼭 잡고 그때처럼 걸어보자




그 때 그 미소가 그 때 그 향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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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에서의 마지막 날. 돌아다니느라 피곤에 찌든 몸을 억지로 깨워 나갈 준비를 하고 일찍 체크아웃을 해 해운대를 떠났다. 부산진역 근처 ‘문화공감 수정’ 카페를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일본식 가옥 구조로 된 공간이라 뜨거운 여름의 이미지와 잘 어울릴 것 같아 부산에 갈 일이 생긴다면 거기는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예상했던 것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음악도 없고 방문객들도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대화를 했기 때문에 고즈넉하고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잘 쉴 수 있었다. 마지막 일정으로 그곳에 간 것은 최상의 선택이었다. 다다미식 방에 앉아 시원한 녹차를 마시며 2박 3일간의 일정을 천천히 정리해 본다.
  
  사라진 음악학원 아래 여전히 옛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던 구멍가게를 보며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던 나. 신혼이었던 엄마아빠가 전세로 머무르며 나와 동생을 낳아 키웠던 그 집 대문. 동네에서 조금만 걸으면 바로 이어지던 기차역과 재래시장. 젊은 엄마가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꼬마였던 내 손을 잡은 채 자주 들어섰던 시장 앞 분식점. 그때 그 맛. 그곳 떡볶이 특유의 묵직한 단맛과 부드러운 매운맛의 조화로움. 여전한 맛. 울 뻔한 순간이 있었다. 고백하자면, 여러 번이었다. 사실 부산은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싫어하고 잊어버리고 싶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알았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사연은 여기서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곳을, 이 동네를, 떠난 이후로도 마음 한편에 자리를 내어주며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을 땐 주저앉아 울고만 싶어졌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하나도 늙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내밀 것만 같아서.
 
   이제 내겐 돌아가야 할 광주, 돌아가야 할 서울이 있다. 13년을 살았던 곳을 잠깐 여행객으로서 스쳐간다. '게스트' 하우스를 빌려, 투숙객의 신분으로, 지나치게 깨끗한 잠자리에서 이틀 묵었다. 그 이불보는 지금쯤 아주 청결하게 세탁되는 중이거나 이미 세탁이 완료되어 내 흔적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거기서 없어졌다. 그런데 부산은 명백하게 내 안에 걸어 들어와 있다. 아니, 원래 계속 그 자리에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거기에서 살았던 시절도 있었지, 하고 흐릿하게 상기되다가도 금방 증발해버리던 기억이었는데. 그래서, 10년 전 부산에서 살았던 소녀를 잘 만나고 왔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인사만 했고, 대화는 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어쩐지 지금으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고 꼭 덧붙이고 싶다. 그녀는 부산에 있는 내내 그냥 내 곁에 있어주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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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여행을 급작스럽게 결심하는 데에는 아무에게도 밝히지 못한 이유가 있다. 화해하고 싶어서다. 결핍과 원망, 조바심으로 가득했던 그곳에서의 삶 그리고 그때 그 어리숙한 여자애랑 말이다. 빛바랜 바다에 비쳐 너와 내가 파도에 부서져 깨진 조각들을 맞춰 본다. 사실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라는 듯 쓸쓸하게 울려퍼지는 노래의 마지막 가사가 떠오른다. 그리고 나도 ‘그냥 어느 날의 기억’ 정도로만 치부했던 지난 날의 퍼즐을 눈 앞에 보이도록 꺼내놓는다. 미완성, 아니 시작조차 되어 있지 않은 그것을 서툴게나마 다시 맞춰보고 싶어진 것일까. 그래서일지 광주로 되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아쉬움보다도 묘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아직 그 퍼즐은 거의 시작되지도 않았고 화해도 미적지근했음에도 이상하리만큼 충분한 기분이었다. 미적지근한 여행. 그곳에, 끝내 다녀왔고, 앞으로도 갈 수 있겠다는 어렴풋한 마음이 차창 너머로 빠르게 사라지는 부산의 풍경 위로 살짝 떠올랐던 것 같다.
  
  기억하겠다는 말과 잊지 않겠다는 말의 차이점을 생각해 본다. 기억하겠다는 것은 이따금 떠오를 수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자주 끌어 올리겠다는 뜻이다. 잊지 않으려는 것은 잊을 만할 정도로 시간이 흐르고 잊고 싶어져도, 그러지 않겠다는 거고. 지금 내 마음이 어느 쪽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간만에 버킷리스트가 편집된다. 나는 다시 여기로 올 것이다. 언젠가 연인과 부산을 가게 된다면 고향 동네 분식집에서 떡볶이 1인분과 떡오뎅 하나씩, 마무리로는 단호박 식혜를 먹을 거다. 그리고 바다 앞에서 이어폰을 나눠 끼어 최백호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꼭.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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