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이 글은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된 글이며, 내용누설이 포함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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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듯한 눈빛을 가진 그는 매 순간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늘 망설이지만, 결국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매번 후회하고 다시 고민하기를 반복한다.

 1만 4천 년을 살아온 그는 10년이 지나 또 다른 곳으로 떠날 때가 되었음에도 자신을 오래전부터 짝사랑해온 샌디가 눈에 밟혔고, 자신의 오래된 살림살이의 가치를 알아보는 동료 전문가들을 보고 어떤 충동이 일었다. 140세기를 살아온 인물에 대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어떤 분석을 내놓을지 궁금해진 존 올드맨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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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세기를 살아온 인물'에 대한 존의 이야기가 단순한 허구라는 전제하에 이를 듣기 시작한 교수들은 그 소재에 흥미를 느꼈고, 존이 그토록 오래 살아왔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면서도 그들 분야의 지식으로 그 주장의 신빙성을 검토한다.

 많은 사람의 경우, 당연히·반드시·마땅히 꼭 그럴 것으로 생각되던 자신의 상식을 거스르는 주장을 접했을 때 보이는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부정하고, 믿지 않고, 그 주장이 자기 상식을 제압하는 한이 있더라도 새로운 주장을 거부한다. 존 올드맨 역시 숱한 경험을 통해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인류학, 고고학, 생물학, 신학, 심리학이라는 각 분야의 선지자로 뽑히는 동료 교수들만큼은 이런 사고로부터 좀 더 유연할 것이라 잠시 기대했다. 그리고 곧 그게 바보 같은 생각이었음을 깨닫게 된 존은 후회한다. 그의 말을 들은 대부분의 교수는 학문적인 흥미를 보였지만, 자신의 지식과 상충하는 대목에서는 가차 없이 부정했기 때문이다.

 자기 분야의 권위자일수록 그 권위와 지식에 기반을 둔 신념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그들 역시 처음엔 새 지식을 얻고자 하는 지적 호기심으로 학문을 시작했겠지만, 불행히도 세상의 합의된 지식이 머릿속에서 토대를 갖출수록 그들의 생각 역시 굳어져만 간 것이다.

 오직 고고학자 댄만이 존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는데, 그는 학문적으로 모두 들어맞는 존의 삶에 흥미를 느낀다. 그는 '모든 것이 가능하며, 우리가 아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우리가 아는 것 너머에 있는 미지의 세상을 꿈꿔본다. 존 또한 댄에게서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을 느끼고 나중에 어떻게 사는지 들려달라는 댄의 청에 진심으로 그리하겠다 약속한다.



인생과 죽음

 그들의 대화에 뒤늦게 참석한 늙은 심리학자 윌 그루버는 황당한 존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경험인 것처럼 말하는 존의 태도에 분개한다.

 14000년의 세월을 살아왔다면 주변인들의 탄생과 죽음 또한 숱하게 봐왔을 것 아닌가. 혼자서 그 많은 슬픔을 봐왔으면서도 어찌 자신의 죽음 없는 삶에 대한 죄책감이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생은 다른 사람의 수명을 빼앗아왔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며, 저 말이 거짓이라면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어 타인의 죽음을 한없이 가볍게 만드는 그를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

 존은 어젯밤 윌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윌은 존의 태도가 인간의 덧없는 삶을 비웃는 것 같아 화가 났고 이윽고 그에게 총을 겨눈다.


 상황이 정리된 후 윌 그루버는 존이 정신이상자이거나 의도적으로 자신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존이 자신을 진심으로 원시인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기 아버지에 대한 결핍이나 트우마로부터 기인했을 거라고 윌은 단정 짓는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는 슬픔에 눈이 멀어 죽음 있는 삶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가늠하지 못한다. 윌은 죽은 생명들을 뒤로한 채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불사가 괘씸하고 원망스러웠다. 늙은 사람이 자기 앞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 젊은 사람에게 성내는 것과 같다. 하지만 시간이 제약되어있는 보통의 삶과 죽지 않는 삶 중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 삶인지, 어느 쪽이 더 삶다운 삶인지는 우리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14000년이라는 무수히 많은 시간을 보내온 이에게 과거라는 것이, 현재라는 것이, 미래라는 것이, 시간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볼 뿐이다.

 존은 자신의 주장이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트라우마에서 기인한다고 의심하는 그의 아들을 가슴이 미어지는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역사와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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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디스는 신학자답게 독실한 교인이다. 그녀는 자신이 예수이며, 교리로 전해지는 모든 것들은 거짓이라는 존의 말에 충격을 금치 못한다. 존의 말에 따르면 예수는 부활하거나 죽은 사람을 되살려낸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그저 14000년을 살아온 특이한 인간에 불과하며, 부처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전달하고자 한 사람일 뿐이다. 그녀가 알고 믿고 가르쳐오던 성서의 기록과 예수의 가르침들이 모두 왜곡된 거짓이라는 것을 이디스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에 대한 신화적 기록들이 묻는 족족 모두 해명되는 것을 본 그녀는 존 올드맨에게 "넌 예수가 아니야.", "네 말은 신성모독이야."라는 등의 말밖엔 할 수 없었다.
 
 매 시대의 개인으로서 존재해왔을 뿐이지만 자신의 가르침을 왜곡해 서로 다투는 후손들을 바라봐야만 하는 것도 존 자신의 몫이었다. 이디스는 존의 말이 사실이 아니길 진심으로 바랐고, 그의 말이 자신의 신념을 깨부술 때마다 고통스러워했다.

 모든 역사의 기록은 변질될 수밖에 없으며, 역사는 공백을 싫어해 교활한 누군가에 의해 어떻게든 채워지고야 만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건의 기록들은 시간을 돌리지 않는 한 결코 증명될 수 없다. 우린 단지 우리가 믿고자 하는 것을 믿는 것뿐이다. 그녀 역시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었다.

 존은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자신은 신도 예수도 14000년 된 인간도 아니며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고. 그냥 재미로, 다들 속아 넘어가길래 한 번 놀려준 거라고.

 이디스는 안도한다. 하지만 진실은 참으로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디스는 헤어지기 전에 자신의 손을 뻗어 예수일지도 모르는 이의 얼굴을 한 번 만져본다. 그러고는 그의 뺨에 의미심장한 키스를 남기곤 다시 한번 그의 뺨을 만진다.
 
 다 떨쳐내려는 듯 이내 발걸음을 옮긴다.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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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디는 그녀가 존을 처음 봤을 때부터 10년 동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존 역시 숱하게 겪어온 일임에도 자신을 오랫동안 사랑해온 그녀가 마음에 걸렸다. 존이 자신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데에는 샌디에 대한 고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60년 전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자식까지 낳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가족들을 내버려 둔 채 10년이 지나 떠나야만 했다.

 그는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고, 더 이상 누군가에게 그와 같은 문제로 트라우마와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샌디가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아니, 적어도 자신이 그런 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을 듣게 된다면 미련 없이 자신을 보내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샌디는 그의 말을 믿었다. 적어도 그의 말을 존중해주었다. 그가 누구든, 몇 년을 살았든, 그의 말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그런 것들은 샌디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녀는 존을 사랑했고, 나중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지금에 충실하고 싶었다. 샌디는 석학들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고, 마지막엔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날이 저물고, 모든 대화가 끝나고, 모든 사람이 떠났다. 이젠 존도 10년 간의 '존 올드맨'을 떠날 때였다.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존은 차를 타고 떠난다.

 하지만 자신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듣고도 전혀 비웃지 않은, 지금 놓지 않으면 오랜 시간을 사랑하고 또 그리워해야 할 샌디에게 선택권을 준다.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 순간뿐일지라도 자신과 함께 하겠냐고.

 샌디는 그 대답으로 올드맨도, 페일리도, 세비지도 파티도 아닌 존 그 자신의 차로 발걸음을 옮긴다.



감상

 처음 이 영화를 접했을 때, 영화에 대한 가장 큰 논의는 종교에 대한 문제였다. 누군가는 '기독교인은 이 영화를 보는 것을 지양해야겠다. 기독교인이 싫어할 영화다.'라고 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종교가 얼마나 무논리적인지 보여주는 영화'라고도 했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이 영화는 현재 많은 사람이 믿고 있는 특정 종교를 비판하는 것도, 모든 역사와 우리가 아는 지식이 거짓이라고 단정 짓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 영화가 다음과 같은 생각들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1. 14000년이나 살아온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그 사람은 신일까? 전지전능하며 모든 것을 알까?
아니다. 동일한 조건에서 그저 오래 살기만 한 사람이라면 현재의 우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며, 그 역시 실수를 하고 후회를 반복하는 사회 속 개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2.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지식과 역사, 그리고 신념들이 '고정된 진리'라고 보증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가능하며,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사실들은 뒤바뀔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것을 두려워하며, 이에 대해서는 지식이 많은 똑똑한 사람들도 예외일 수 없다. 진실을 눈앞에서 맞닥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의 생각은 그토록 바꾸기 어렵다.

 3. 우리는 늘 신중한 행동을 추구하고 미래에 상처받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또다시 사랑에 빠지기를 반복한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종교나 가치관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이 영화는 논란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분노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믿음을 가지는 것은 개인에게 보장된 자유이며, 그 사람의 삶을 지탱해주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나는 오히려 존과 샌디의 사랑 이야기가 더 눈에 들어왔다. 존에겐 샌디로 인해 순간의 행복을 얻겠지만, 샌디가 죽음과 동시에 영원한 그리움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샌디에게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늙지 않으며 죽고 난 뒤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존으로 인해 슬퍼지는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함께 떠난다.

 14000년 산 사람에게도 유효한 사랑의 가치란 뭘까. 영원한 슬픔도 감당하게 만드는 순간의 사랑은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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