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 이방인 >에서 살해된 아랍인 이야기, < 뫼르소 살인사건 > [문학]

글 입력 2017.07.1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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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을 받은 작품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L’Etranger)>는 전 세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소설 속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뫼르소’의 삶에 대한 태도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았으나, 정작 살해 당한 피해자인 알제리의 ‘아랍인’은 그 이름도, 외양 묘사도 자세히 이뤄지지 않은 채 주목 받지 못한다. <이방인>이 발표된 지 70년도 더 지난 2013년, 알제리 출신 작가 ‘카멜 다우드’는 살해당한 아랍인의 동생의 입장에서 서술한 소설을 발표하여 큰 화제를 모은다. 이 소설에서 목숨도 이름도 잃어버린 형을 되찾기 위해, 서술자인 ‘하룬’과 그의 어머니는 일평생 고군분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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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 살인사건(Meursault, contre-enquête)>의 저자 카멜 다우드(Kamel Daoud)


그런데, 죽은 것은 뫼르소가 아니라 무싸이듯, 죽은 것은 무싸이지 하룬이 아니다. 그러나 <이방인>에서 무싸가 ‘엑스트라 배우’도 못 되는 존재로서 지워졌듯, 하룬의 인생에서는 무싸만 남고 자기 자신이 지워졌다. 하룬은 소설 전체에서 빈번하게 형과 자신을 스스로 동일시하거나, 동일시되는 자신을 관조하며 부채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어머니에게 떠밀려 저지른 살인 이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종의 해방감을 맛보았던 살인을 통해서도, 하룬은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한다. 자기 아버지가 그랬듯이 자신의 인생에서 죽은 형의 ‘경비원’으로 살아가는 하룬의 삶과 그 속에서의 어머니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무싸가 죽은 이후 엄마와 하룬은 무싸의 죽음을 파헤치고 살인자의 흔적을 찾으려 방방곡곡을 돌아다닌다. 오랜 시간동안 엄마는 무싸의 죽음에 관한 과장된 이야기를 끝없이 지어내기도 하고 하룬 역시 무싸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프랑스어를 배우는 등 그에 일조하며 두 모자는 수십년 동안 무싸의 죽음으로 둘러싸인 삶을 살아간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무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 날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과거에 묶인 삶을 살아가는 동안, 엄마에 의해, 그리고 스스로에 의해, 하룬의 인생에는 자기 자신이 없었다.

하룬이 느끼기에 엄마에게 자기 자신은 그저 ‘형 대신 죽었어야 할 존재’와 다름없다. 죽은 무싸가 오히려 산 사람 취급을 받고, 자신은 죽은 사람 취급 받으며, ‘몸에 상처가 나면 마치 무싸 자신을 다치게 한 것처럼’ 여긴다고 말한다. 일생을 큰아들의 죽음을 밝히는 데에만 몰입한 엄마는 그러면서 둘째 아들은 안중에 두지 않고, ‘짐짝’ 취급하며, 하룬도 자신처럼 무싸의 죽음에 일평생 머무르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엄마와 하룬은 무싸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시간 외에는 일종의 대치 상태에 끊임없이 놓여있다. 엄마가 이처럼 ‘끝없는 애도라는 쾌락’에 빠져 있는 동안, 둘만의 시간과 공간에서 하룬은 유령이 됨을 느낀다. 이러한 상황에서 찻잔 속에 엄마가 숨겨둔 설탕이나 빵을 몰래 훔쳐먹고 엄마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뿌듯함을 느끼는 등의 하룬의 다소 퇴행적인 행동은 엄마의 관심과 사랑의 결핍이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형의 사건에만 집착하고 자신에게는 사랑과 관심을 주지 않는 엄마의 행동은, 죽은 형에게 까지 질투를 느낄 수 있는, 기울어진 모성애의 벽에서 절망하는 전형적인 아이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어머니의 태도의 연장선상에서, 하룬의 삶에 있어 형의 사건은 항상 그 중심에 있고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핵과 같다. 하룬은 스스로를 ‘카인’이라고 생각한다며, ‘이쯤 되니 형을 죽인 것은 뫼르소가 아니라 자기인 것만 같다’고 고백한다. 형의 죽음은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었고, 살인자의 사과를 바랄 수도, 파도가 휩쓸어간 형의 시신도 찾을 수 없다. 아랍인이라는 피지배계층을 우발적으로 사살해도 벌을 받지 않는 조국의 시대적 상황에서, 자신의 가족을 비롯한 수 많은 알제리 동포의 희생자들에 대한 프랑스의 정식 사과를 바랄 수도 없었으며, 이처럼 아무리 용써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그를 더욱 더 죄책감의 수렁에 빠지게 한다.

죄책감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지면서, 하룬 스스로가 죽은 사람은 형 무싸가 아닌 자기 자신이라며 자조하는 것에 까지 이른다. 하룬은 무싸의 시체를 ‘내 시체’라고 말하며 이에 더하여 ‘무싸와 엄마, 뫼르소가 합세하여 자신을 죽인 것’이라고도 말한다. 형의 죽음으로 인한 극도의 죄책감과 일평생 가지고 사는 고통은 마치 죽은 것은 자기 자신인 것 같은 생각까지도 들게 하는 것이다. 엄마가 자신을 무싸의 대용물로써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는 것은 자존감에 큰 상처가 되어, 무싸의 존재감을 스스로 넘어설 수 없는 평생의 원인이 된다. 상처는 아주 어린 시절에 생겼으나, 그 사이 흐른 세월은, 하룬 자신이 정체성을 두고 있는 형의 죽음의 근본적인 회복 불가능성에 기인하여 평생을 안고 가는 고통으로, 부조리한 그의 인생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하룬은 소설 중반부에 어머니의 손과 압박에 이끌려 한 프랑스인을 살해한다. 이 살인은 온전히 그의 자의에 의해 벌어진 사건은 아니었지만, 살인 이후 무싸의 죽음에 압도되어 살아온 삶에서 찰나의 해방감을 맛본다. 이 사건은 하룬을 다른 의미에서 옥죄므로 진정한 해방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요구에 순응함과 동시에 벗어나려는 나름의 치열한 노력이 되며, ‘무싸의 죽음과 엄마의 감시가 쳐놓은 울타리 속에서 광활한 대지로 벗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송세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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