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피로사회 >

글 입력 2017.06.04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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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11기 지원을 위해 본인의 블로그에서 발췌, 수정한 글임을 알립니다.)


성과사회로의 이행과 긍정성

 통제하고, 통제받는 대상이 분류되어있던 규율사회에서 인간 간의 지배·피지배 관계가 없어진 성과사회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부정성'을 박탈당했다. 이전에는 우리에게 '~해야한다'라고 하는 당위성들이 우리에게 부여되었고, 이에 따른 시스템 속에서 사회의 적이란 사회 외부의 존재들, 혹은 해충과 전염병 같은 것들이었다. 전체의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것은 이러한 구체적인 적들이었다. 이 규율사회는 부정성이 지배하는 사회였는데, 여기서 부정성이란 앞서 말한 '~해야한다'는 폐쇄적인 당위성만으로 한 개인의 역할이 충족되는 사회, 맞서 싸워야할 적이 분명한 사회라고 이해된다. 이 사회의 개인에게는 제한적으로나마 자신의 역할이 분명히 주어져있었고, 이 제한된 역할을 수행하고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주변인들과의 유대, 놀이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여유 속에서 자신의 삶과 생활에 대해 돌이켜 반성해보고 더 좋은 삶을 고찰할 수 있는 또다른 돌이켜보기, 부정성의 시간을 찾았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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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무한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성과사회로 넘어오면서, 우리가 극복해야할 사회의 적은 물리적인 요소들이 아닌 개개인의 정신적인 문제들로 바뀌었다. 이 문제들은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우울증과 정신적 낙오 현상으로 구체화되어 사회를 피로하게 만든다. 피로의 원인은 앞서 언급했듯 긍정성의 과잉과 부정성의 박탈이다.

 성과 사회는 그 자체의 발전을 위해 구성원들에게 생산성을 요구하게 되고, 개개인에게 당위가 아닌 능력을 요구한다. 사회는 개인에게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열려있는 긍정성을 심어주고, 자연히 개인이 개인을 생산성 향상을 위한 소모품으로 전락하도록 부추긴다.



부정적 피로, 정신적 여유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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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과정에서 개인은 비판적으로 사색하고, 자신의 삶에 관조할 수 있는,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하는 능력인 부정성을 박탈당한다. 여기서 성과를 위해 등떠밀려진 개인에게 남는 것은 생존에 대한 강박 뿐이다. 이런 인간은 동물로서의 여유를 가지지 못한 채 기계화되고, 결국 탈진하기에 이른다. 저자는 여러 인용을 통하여,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관조적인 면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힌트케를 인용해 그는 자아피로, 긍정적 힘의 피로와 반대되는 부정적 힘의 피로를 주장한다. 성과사회의 피로란 오직 스스로의 탈진에 의한 것이므로 누군가와 공유할 수 없고, 영혼이 없으니 타인과 동질감과 친밀감을 느낄 수 없다. 뒤와 양옆을 볼 수 없도록 눈이 가려진 경주마처럼, 사람들은 주변을 둘러볼 수 없기에 자기 자신에게만 갇혀있는 것이다. 오직 스스로가 스스로를 채찍질하므로 아무도 스스로를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저자가 강조한 부정적 힘의 피로는 무위의 피로이므로 이 피로에는 어떤 차별성으로 인한 긴장관계가 필요없다. 이는 근본적인 피로이며, 자아를 개방하게 하여 세계와 타자와의 접근을 허용하여 우리에게 동물다운 여유를 갖추게 해준다. 피로사회의 반대편엔 눈 밝은 피로, 일종의 무위의 능력이 있다. 이 부정성의 피로는 맹목적인 일중독으로 인한 탈진이 아니라, '성과'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먼 곳을 보라는 계시로 읽힌다. 죽을 때까지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게 아니라, 하루를 마치고 노곤한 피로를 온몸으로 느끼며 자신과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는 정신적 여유를 갖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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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 피로사회 >와 실존주의

 현대사회의 우리는 생각을 박탈당했다. 우리에겐 더이상 '~만 하면 돼!'와 같은 명령이 없다. '넌 뭐든지 할 수 있어!'만이 우리에게 주어져있고, 우리는 자신의 몸뚱아리 하나를 보존하기 위해 발버둥치며 적정선을 모른 채 자신을 내버려두질 않는다. 우리는 기계가 아님에도, 우리에겐 일과 놀이시간을 정해주는 주인이 없으니 아무도 우리를 멈추려 하질 않는다. 다만 사회는 자기자신보다 더 능력있어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을 보여주면서 우리를 끊임없이 자극시킬 뿐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끝을 모른 채 기계처럼 일을 하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약속되지 않은 성공을 향해 질주한다. 그러다가 결국 절망하고 포기하고 탈진하여 우울증에 걸린다. 우리 개개인은 서로 다른 색깔과 능력치를 갖고 있음에도 획일화된 기준과 자신을 견주며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곤 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강조하는 '인문학', '생각하기', '명상'또한 그러한 과잉행동을 부추기는 것에 불과하다. 진정 그것의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좋은 삶에 대한 고찰', 혹은 '나를 어떻게 완결지을 것인가'에 대한 실존적인 문제는 제쳐두거나, 이조차 자신을 더 효율적으로 일을 시켜 배를 불리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다.  여기에서 개인은 그저 성공을 위한, '넌 뭐든지 할 수 있어!'에 부응하기 위한, 어려서부터 머릿 속에 심어져 있는 '잘 살기'에 따를 뿐이다.

 피로사회를 읽으면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이 실존주의의 맥락과 비슷하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그가 진단하는 사회를 하이데거의 언어로 비유하자면, 이 사회는 그저 객관적이고 가시적인 것으로 획일화된 '존재자'에 대한 탐구만 강행할 뿐 그것을 이루고 있는 개인의 본질로서의 '존재'에 대한 탐구가 결여되어있다. 때문에 우리 사회는 '객관적'이고 '경쟁적'이라 평가되는 기술과 과학은 발전시켰을 지 몰라도 그 의미와 우리의 도덕적 삶에 대한 성찰을 소홀히 했다. 무분별한 무기개발과 환경오염 등의 문제는 이에 대해 보수적으로 접근하지 못한 사회의 탈진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 야스퍼스, 사르트르로 이어지는 실존주의의 기본적인 컨셉은 대략적으로 이렇다. 우리는 우리 개인에 대한 주도권이 있으며 우리의 삶과 세계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끊임없이 구성된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본질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 실존주의의 기본적인 주장이다. 이런 맥락에서, < 피로사회 >의 저자는 내적인 성찰 없이 맹목적인 경쟁을 하는 우리를 질책하는 듯 보였다. 우리의 모든 선택과 이에 따른 행위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환경 탓을 하면서 이에 매몰되어간다.

 성과사회, 혹은 경쟁사회를 사는 우리는 긴장이 아니라 이완이 필요하다. 우리의 삶과 이 세계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며, 우리는 이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관조할 수 있음을 꾸준히 상기해야만 한다. 이로써 < 피로사회 >는 우리에게 실존주의적 책임감을 부여한다.


[주유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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