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오페라 < 자명고 >, 주인공은 누구인가?

글 입력 2017.05.28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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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 자명고 >, 주인공은 누구인가?


 오페라 < 자명고 >의 무대는 훌륭했다. 주연 가수들의 연기는 물론이고 노래도 뛰어나서 오페라를 실제로 처음 본 나로서도 굉장한 실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호흡이 척척 맞는 앙상블도 그에 지지 않았고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긴장감을 조성했다. 공연을 보면서 한국어가 오페라라는 장르에 잘 녹아들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은 사라졌다. 무용단의 움직임에도 감탄했다. 특히 초장에서 막을 올림과 동시에 펼쳐지는 오고무는 한국 미술의 전통인 곡선과 색깔을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하게 부각시켜 너무나 아름다웠다.

 내용 또한 서양의 오페라보다는 친숙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친숙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공감이 가지 않았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이유는 오페라의 주인공이 낙랑공주도, 호동왕자도 아닌 자명고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이 자명고라니, 프리뷰에서 기대했던 바와는 너무 달랐다. 조국과의 분쟁에 얽힌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의 사랑을, 현대인이 공감할 수 있는 정서로 풀어내는 것. 혹은 그들을 비극으로 끝나게 한 그 ‘민족 통합’이라는 대의를 설득시키는 것. 둘 중 하나라도 만족했으면 했는데, 이번 < 자명고 >는 둘 다 하려다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친 것처럼 보였다.


자명고 3.jpg
(사진: 국립 오페라단 제공)


 연출 의도를 보면 낙랑 공주를 그저 사랑에 빠져 자신도 버리고 나라도 버린 여자로는 절대 보이지 않게 하겠다는 의도가 느껴진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조국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호동 왕자로 인해 ‘하나 된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진정 조국을 위한 길이라 깨우친다. 그녀가 호동을 사랑하게 된 것도 그가 이러한 단단한 신념을 가지고 있음에 경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낙랑은 결코 호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하나 될 자신의 부강한 조국을 위해 자명고를 찢고 자결해버리는 것이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점은 이처럼 공주를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한 국민으로서 묘사하면서도 정작 그녀의 이름은 작품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주 이름을 낙랑으로 한 것인가 해서 영어 자막을 유심히 봤더니 호동은 “Prince Hodong”으로, 공주는 “Princess of Nakrang”으로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대적인 재해석”을 내세우는 연출에서 왜 이런 점은 신경 쓰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자명고 4.jpg
(사진: 국립오페라단 제공)



 한편 민족통합이라는 대의라는 것에도 크게 공감이 가지 않았던 것은 극 중에서의 근거로 오직 “우리는 한 핏줄”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진대철은 낙랑을 도와주면서도 오랑캐라는 이유로 배척하고, 고구려는 적국이지만 한 핏줄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 현대적인 교훈을 준다고 하기에는, ‘원래 하나였다’는 이유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이 얽혀 있는 우리네 사정과 비교하기 힘들다. 이 ‘민족통합’이라는 대의는, 낙랑을 침략하려는 적국의 왕자인 주제에 오랑캐와 손잡지 말라는 말을 하는 호동의 비합리적인 면모나, 사랑까지도 버리고 자결한 낙랑 공주를 만들어내는 등 극을 원작보다 더 경직되게 만들어버렸을 뿐이다.

 민족 통합을 위해 가족도 조국도 사랑도 버린 낙랑 공주. 그녀에게 자명고를 찢으라고 부탁했으나 그 과정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호동. 이들은 왜 부자연스러워질 수밖에 없었을까? ‘자명고’가 그들에게 속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도 개인도 사라지게 만든다. 극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자막으로 등장한다.

태초에 형제는 하나였거늘
역사 이래 민족은 하나였거늘
하늘을 가르고 땅을 가르고 바다를 가를 수 있어도
형제는 가를 수 없느니라
민족은 가를 수 없느니라
차라리 나를 가르라
나를 찢으라
산산이 조각내거라
그래서 하나 되거라
태초에 형제는 하나였도다
역사 이래 민족은 하나였도다

 이 외침은 언뜻 보면 민족 통합을 기원하는 낙랑의 신념이 담긴 구절인 것 같다. 그러나 나에겐 이것이 자명고의 탈을 쓴 ‘대의’의 망령이 말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름조차 갖지 못했던 공주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지도 못하고, 찢어진 자명고의 덕으로 낙랑을 점령한 호동 왕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개인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 통합이라는 거대한 그림 위의 말로서 잠시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 자명고 >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차라리 < 자명고 >의 주인공은, 자신을 찢으라고 종용하는 자명고 자신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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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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