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유산진흥원] 항일독립정신이 서려있는 서대문 일원 (2)

글 입력 2017.04.19 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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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전 3월

국권회복을 위해 민족자존의 가치를 드높인
순국선열의 고귀한 희생을 함께
되새겨 보는 시간입니다.

항일독립 정신이 서려있는 서대문 일대,
지나간 역사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해설과 함께 역사문화 유적지
주변을 깨끗이 청소합니다.

이동경로
서대문역 3번 출발 → 돈의문 터 → 경교장 →
홍난파 가옥 → 딜쿠샤 → 서울 성곽 → 사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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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

1919년 3·1 운동 독립선언서,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을 외신으로 처음 보도한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의 가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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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 옛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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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 현재 모습


테일러는 1923년 현재의 서울 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에 지하1층, 지상2층짜리 양옥을 지었어요. 앨버트는 항일 독립운동을 돕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후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당할 때까지 약 20년간 이곳에서 아내와 함께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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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사랑한 미국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


딜쿠샤라는 이름은 앨버트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가 인도의 딜쿠샤 궁전에서 따와 작명한 것이라고 합니다. Dil Kusha는 힌두어로 '이상향', '희망의 궁전'이란 뜻이라고 하네요. 붉은 벽돌, 아치형 창문 등 양옥 중에서도 독특한 외관을 가지고 있고 벽돌을 쌓은 방식이 매우  특이해서 건축사적으로 가치 있는 건물로 평가된다고 합니다.

테일러 일가가 추방된 뒤 이 주택은 오랫동안 자유당의원 조경규가 소유했는데 1963년 그는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대한민국 정부에 몰수되었으며 이후 방치되어 빈민들이 무단 점유, 거주하는 집으로 전락하였습니다. 딜큐샤 옆에는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끌었던  권율 장군의 집터와 그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450여 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서 있습니다. 인근 주민들은 이 건물을 '은행나무집'으로 부르기도 했답니다.

현재 서울시는 딜쿠샤의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회복시키기 위해 복원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앨버트 테일러

그는 1896년 금광기술자였던 아버지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한국에서 금광 사업과 무역상을 하였으며 UPI 통신사의 서울 특파원을 겸임했다고 합니다. 1917년 영국 출신의 메리 린리 테일러와 결혼하여 1919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해 3월1일 한국 민족대표 33명이 작성하고 낭독한 독립 선언서를 앨버트 테일러가 입수하여 테일러의 동생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몰래 몸에 지니고 도쿄로 반출하여 도쿄의 통신사망을 통해 타전하여 한국의 3·1운동을 세계에 알리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고 스코필드,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 총독에게 항의 방문 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협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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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며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테일러 가족은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고, 이듬해 5월 조선총독부의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미국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광복 직후인 1945년에는 한국에 남겨두고 간 재산을 찾기 위해 한국에 입국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948년 6월 미국에서 73세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이송되어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독립문

현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는 독립문은 원래는 종로구 교북동에 있었던 것을 1979년 이곳으로 이전하여 복원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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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독립협회가 한국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 자리에 전 국민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하여 독립문을 세웠어요. 당시 독립의 의미는 기존의 중국 중심의 세계, 홀로 서지 않고 중국과 같이 섰던‘양립’으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홀로 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에쿠알 개선문을 본떠서 서재필이 스케치한 것을 근거로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를 했다고 합니다. 재료는 주로 화강암을 사용하였고, 구조는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습니다. 문 앞에는 구영은문의 주초였던 두 돌기둥이 있어요.

1979년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곳으로 이전하여 복원하고 예전 자리에는 독립문지라는 표지판을 묻어 놓았습니다.






[한국문화유산진흥원]
임지원 엮음





[한국문화유산진흥원]
소공재 소개

'소통, 공감, 재미'의 머리글자를 딴 '소공재'는 우리 문화유산을 통해 소통하며 공감을 나눔으로써 재미를 추구하는 사단법인 한국문화유산진흥원의 산하 봉사단체입니다. 우리 고유 문화에 대한 애호사항을 고취하고 회원 간의 친목과 이해를 증진시키며 문화유산 진흥을 위한 봉사활동을 통해 공익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ARTINSIGHT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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