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클래식제국, 로마

글 입력 2014.07.01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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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클래식제국, 로마

글 - 김승열 (음악칼럼니스트)



    2006년 8월 초, 나는 유럽을 처음 찾은 학창시절 친구들과 함께 이탈리아 반도를 종단했다.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를 거쳐 닿은 2006년 8월 4일 금요일의 로마에서 나는 콜로세움을 목도했고,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 날의 화룡점정은 그러나 당일 밤 9시부터 카라칼라 야외욕장에서 펼쳐진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관람한 일이었다. 서기 217년에 건립된 카라칼라 야외욕장은 콜로세움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세워진 로마 최대 규모의 노천탕이었다. 당대에는 한 번에 1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어졌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야외욕장 본연의 기능은 상실한 지 오래다. 옛 로마제국의 영화를 짐작할 수 있는 고대건축물로서만 그 존재가치를 부여받았던 옛 유적이 여름철 야외 오페라무대의 요람으로 구실하게 된 것은 1937년에 들어와서다. 당시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의 우두머리였던 무솔리니는 이 유적지의 한복판에 가설무대를 세우고 매년 7,8월의 한여름에 오페라 페스티벌을 개최하도록 했다. 이후 8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매년 7월이 되면 어김없이 열리고 있는 카라칼라 야외 오페라 페스티벌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구경한 것이 바로 2006년 8월 4일 금요일 밤이었던 것이다.



-무지막지함과는 거리가 먼 알맞은 스케일의 야외 오페라무대, 카라칼라


로마 카라칼라 야외오페라무대1.png▲ 로마 카라칼라 야외오페라무대 - ⓒ C. M. Falsini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가 컸던 부분은 프랑스의 명지휘자 알랭 롱바르가 이 날 ‘아이다’의 지휘봉을 잡는다는 예고였다. 프랑스 사람이면서도 어쩐지 롱바르는 나의 파리 체류 당시 파리의 주요 음악무대에 등장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일찍이 스트라스부르 필과 보르도 국립 아키텐 오케스트라를 명조련한 정통 프랑스 지휘자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이 날 롱바르를 초대면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나의 바람과는 달리, 당시 66세의 롱바르는 어쩐 일인지 실바노 코르시라는 이탈리아 지휘자로 대체되어 버렸다. 거기다 라다메스로 등장할 예정이었던 테너 니콜라 마르티누치도 프랑코 파리나로 교체된 사정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코 파리나는 암네리스의 메조 소프라노 마리안네 코르네티와 더불어 최상의 컨디션을 과시했기에 어설픈 대타라는 오명을 듣지는 않았다. 오히려 예정대로 투입된 아이다 역의 소프라노 마리아 카롤라가 미흡했다. 당시 적어둔 관극수첩에는 그녀의 졸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불분명한 종지악구 처리 및 절구통처럼 굵기만 하고 통제가 안 되는 카롤라의 음성은 안타까웠다. 롱바르 대신 투입된 코르시의 지휘도 악단과 합창단의 엇나가는 호흡을 간간이 노출해 아쉬움을 남겼다.”


jpg 로마 카라칼라 야외오페라무대2.jpg▲ 로마 카라칼라 야외오페라무대 - ⓒ C. M. Falsini


    이와 같은 몇몇 출연진의 난조에도 고대 로마제국 수도의 한복판에서 감상한 ‘아이다’는 매우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야외무대임에도 3500석에 불과한 알맞은 객석수는 오랑주의 8600석이나 베로나의 몇 만석 객석보다 인간적인 스케일로 다가왔다. 무지막지한 몇 만석 객석 덕분(?)에 무대 소리가 굼뜨게 들리는 베로나의 아레나보다 카라칼라 무대의 적절한 스케일은 야외 오페라무대로서는 제격이었던 것이다. 단 하나, 가설무대라는 인위적 요소를 야외욕장에 가미시킨 관계로 작위성이 느껴지기도 한 것은 옥의 티였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8년 전 로마의 카라칼라에서 들은 ‘아이다’를 잊지 못한다. 당시 나와 대동했던 한 친구는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이 날의 감동을 잊지 못해 ‘아이다’ 음반만 여러개를 사서 들으며 로마에서의 감동을 되씹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영원한 상징, 로마 오페라극장


로마 오페라극장 외관2.png▲ 로마 오페라극장 외관 - ⓒ Silvia Lelli


    이튿날 나는 로마가 품고 있는 나머지 음악명소들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그 첫 번째 행선지가 바로 그 유명한 로마 오페라극장이었다. 사실 카라칼라 야외 오페라무대는 로마 오페라극장의 여름무대로 기능하고 있는 로마 오페라극장의 여름분관이랄 수 있다. 매년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의 한 시즌에는 로마 오페라극장에서 그들만의 오페라가 장대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1880년 도메니코 콘스탄치(1810-1898)가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 당대 밀라노의 유명건축가 아킬레 스폰드리니(1836-1900)에게 의뢰해 건립한 로마 오페라극장은 초창기에는 콘스탄치 극장으로 불렸다. 1880년 11월 27일의 개관 기념으로 로시니의 ‘세미라미데’를 올린 것이 로마 오페라극장의 출발이었다. 이후, 1890년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1900년 푸치니의 ‘토스카’를 초연하면서, 스폰드리니가 어쿠스틱에 공을 들인 2212석의 콘스탄치 극장은 세계적인 각광을 받게 된다. 1907년 흥행사 월터 모키(1870-1955)가 콘스탄치 극장을 사들이면서 극장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특히, 1912년부터 1926년까지 모키의 아내, 엠마 카렐리(1877-1928)가 새로운 극장장으로 활약하면서 콘스탄치 극장은 혁신적인 오페라들을 무대에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바그너의 ‘파르지팔’과 생상스의 ‘삼손과 델릴라’,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잔도나이의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푸치니의 ‘서부의 아가씨’와 ‘투란도트’, ‘삼부작’ 등이 이 시기 콘스탄치 극장 무대에 올랐고,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도 이 시기 로마의 콘스탄치 극장을 찾았다.


크기변환_123jpg 로마 오페라극장 내부1.jpg▲ 로마 오페라극장 내부 - ⓒ C. M. Falsini


    그처럼 영화로웠던 콘스탄치 극장을 1926년 11월 매입한 장본인은 바로 로마 시의회였다. 공공기관인 로마 시의회는 매입과 동시에 콘스탄치 극장을 로마 왕립 오페라극장으로 개칭했고, 당대의 명건축가 마르첼로 피아첸티니(1881-1960)에게 극장의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맡겼다. 15개월 간의 공사를 끝마치고 로마 왕립 오페라극장은 1928년 2월 27일, 보이토의 오페라 ‘네로’로 재개관한다. 이후 파시스트 정권이 초래한 파란만장한 격랑의 세월을 관통한 로마 왕립 오페라극장은 파시스트 정권의 몰락과 궤를 같이하며 1946년, 로마 오페라극장으로 간판을 단일화한다. 1950년대 중,후반에는 로마 시의회가 말년의 마르첼로 피아첸티니에게 리모델링 및 현대화 작업을 재차 위임해 극장의 환골탈태를 밀어부쳤다. 1600석으로 객석수가 줄어든 대신, 에어컨설비를 새로이 구축하는 등 극장은 몰라보게 컴팩트해졌고 청량해졌다. 1958년 1월 2일에 있은 재개관 기념 벨리니 ‘노르마’ 무대에서 타이틀롤로 등장한 당시 34세의 마리아 칼라스는 이탈리아 대통령이 임석했음에도 1막 후 컨디션 난조를 호소하며 공연을 중도취소해 버린 떠들썩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1964년의 ‘피가로의 결혼’과 1965년의 ‘돈 카를로’는 명연출가 루키노 비스콘티(1906-1976)와 명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1914-2005)가 의기투합한 명무대로 지금껏 회자되고 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잔 루이지 젤메티의 후임으로 로마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으로 내정된 리카르도 무티가 2010년 10월, 이탈리아 오페라하우스들이 처한 총체적 난국에 대해 ‘라 레푸블리카’지에 격렬히 토로하면서 음악감독직을 돌연 사임한다. 이후 무티는 특정한 직함 없이 음악감독에 준하는 역할을 로마 오페라극장에서 수행해 오고 있다. 아마도 무티가 수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지금이 로마 오페라극장의 새로운 황금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로마 오페라극장 내부2.png▲ 로마 오페라극장 내부 - ⓒ C. M. Falsini


    내가 이 날 둘러본 로마 오페라극장은 파리나 베를린, 런던의 이름있는 오페라하우스들에 비해 결코 화려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의 심장, 로마를 대표하는 오페라하우스로서 무티를 수장으로 모셔왔다는 사실은 작금의 로마 오페라극장이 구가하고 있는 클래스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과거 툴리오 세라핀과 마리오 델 모나코, 레나타 테발디가 주무대로 삼았던 1950/60년대의 영화를 지금의 로마 오페라극장은 재현하려는 야심에 불타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로마의 관현악 메카, 파르코 델라 무지카 오디토리움


로마 파르코 델라 무지카 오디토리움 외관3.jpg▲ 로마 파르코 델라 무지카 오디토리움 외관 - ⓒ Moreno Maggi


로마 파르코 델라 무지카 오디토리움 외관.jpg▲ 로마 파르코 델라 무지카 오디토리움 외관 - ⓒ Moreno Maggi


    이 외에 반드시 놓쳐서는 안 될 로마의 음악명소로 파르코 델라 무지카 오디토리움을 필히 언급할 수밖에 없다. 파리의 퐁피두센터를 설계한 것으로도 유명한 이탈리아의 명건축가 렌초 피아노(1937- )가 설계해 2002년 개관한 이 음악명소는 유명한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의 본거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60년 개최된 로마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올리 언덕과 올림픽 마을 사이에 건립된 이 멀티콤플렉스 음악단지에서는 연중 끊이지 않고 온갖 음악이벤트들이 벌어진다. 음악공원이란 뜻의 파르코 델라 무지카 오디토리움에 입주해 있는 연주회장은 총 세 개로 나뉜다. 2742석의 메인홀인 살라 산타 체칠리아와 1133석의 살라 시노폴리, 673석의 살라 페트라시가 그것이다. 이 새 개의 연주회장은 20세기 이탈리아가 낳은 유명작곡가 이름을 따서 명명한 2800석 규모의 야외 원형극장, 루치아노 베리오를 중심으로 주변을 에워싸듯이 건립되었다. 2004년 이래 로마음악재단이 파르코 델라 무지카 오디토리움을 운영하고 있고, 2008년에는 악기박물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세 개의 연주회장 모두 납으로 만든 지붕을 설비하는 등 탁월한 어쿠스틱을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에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던 필자의 한 죽마고우는 이 곳에서 2008년 연말 들은 다니엘레 가티 지휘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바그너 ‘파르지팔’ 콘체르탄테 무대가 후련한 어쿠스틱 덕으로 매우 감명 깊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개인적으로도 로마의 이 음악명소에서 언젠가는 걸출한 라이브무대를 접하리라 나는 생각하고 있다.


로마 파르코 델라 무지카 오디토리움 중 살라 산타 체칠리아 내부.jpg▲ 로마 파르코 델라 무지카 오디토리움 중 살라 산타 체칠리아 내부 - ⓒ Moreno Maggi


    로마 오페라극장을 진두지휘하는 거물 리카르도 무티가 있고, 파르코 델라 무지카 오디토리움에서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를 조련하는 명장 안토니오 파파노가 버티고 있는 로마라면 클래식음악의 제국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로마는 바로 그 같은 음악의 제국이라 불러 마땅할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제국이 쇠락하기 전에 하루 빨리 로마로 떠날 지어다. 로마의 강렬한 태양 아래 펼쳐지는 음악의 세례에 흠뻑 멱감고 돌아온 당신은 분명 이전의 모습에서 환골탈태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 있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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