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공.감.대] 감각03. '나'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에도

글 입력 2017.03.13 15:52
댓글 1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슬라이드1.JPG

  예부터 사랑은 마법 같은 것으로 인간 세계에 통용되었다. 사랑이 기적을, 사랑이 용서를, 사랑이 생명을, 사랑이 예술을, 사랑이 성공을, 사랑이 더 큰 사랑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다들 암묵적으로 품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많은 유명 인사들이 강연이나 저서 등을 통해 ‘사랑’이라는 말을 마스터키처럼 사용하고 있다. ‘사랑’이 만들어내는 힘에 대한 예찬을 수도 없이 들으면서 우리는 내 연인을, 내 가정을, 내 동료와 내 공동체를 그리고 내 세계를 지키고 보듬어야 한다고, 숭고한 사명감을 기꺼이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자애로운 빛줄기가 마침내 우리 주변 것들의 그림자에 가려져있던 단독자로서의 ‘나’로 뻗어나가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나 자신을 믿기’라는 매력적인 주문을 탄생시켰다.

  
  그렇다.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생을 의심하는 것만큼 불쾌한 상상은 없다. 일상은 작고 사소한 가치들의 발견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칭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연애, 취업, 공부, 가족문제, 자기돌봄에 있어서 겪은 실패들을 되짚어 보며 무언가 발전된 지점이 있을 거라 의미 부여를 해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모든 ‘그래야 좋다.’는 메시지 뒤에는 ‘그렇지 않으면 허무한 것’이라는 불안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의심만큼 기습적이고 필연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그건 긍정성에 대한 예찬이 범람하는 시대에서 불가침의 영역이라 여겨지는 신뢰와 희망을 건드리며 부정적인 ‘나’의 이미지를 생산시킨다. 불안과 초조. 그렇게 ‘자기 소외’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의 방식이라 생각했는데 어긋나버리고 망가져버리고 파괴되어버린 믿음과 관계와 상황들. 살아 있는 동안은 절대 피할 수 없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힘에 매혹된 인간은 그 실패에서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죽음’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나 자신을 사랑하라'라는 말이 확산되고 그걸 진리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들은 미운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때 '아... 날 아껴야 하는데 날 사랑해야하는데 왜 이렇게 난 미울까'하며 더 깊은 좌절을 경험하고 마는 모습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슬라이드2.JPG
 

  왜 나를 그저 사랑해야하는가? ‘사랑’을 팔아먹는 자들은 어째서 사랑의 ‘자기 파괴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가? 사랑하면 그 뿐인가? 그게 다인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나’도 존재한다. 절대 화해할 수 없는 ‘나’도 존재한다. 미치도록 부끄러워해야 하는 ‘나’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불킥’이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나와 가장 가깝고 밀착되었다고 할 수 있는 '나'를 단지 '나'라는 이유로 어르고 달래고 격려하고 보듬으면서 그저 사랑한다는 게 가능한 문제인가.

  ‘사랑’을 단순히 이해와 인정의 차원이 아니라 희생과 인내, 용서와 고통이 포함된 과정인 것이라고 말하는데 지난날 내가 주목했던 것은 ‘그래서 아득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먼 그림’이었다. 고지 위에서 반짝거리며 빛나는 환상 말이다. 눈앞에 닥친 투쟁이 아니라.


  수시로 연약해지고 불안해지고 추악해지는 인간인 나는 못된, 창피한, 불쾌한, 못미더운 '나'를 향해 사랑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심을 다해 온 힘껏 '나 왜 그러니, 나 뭐 한 거니, 나 정신 차려, 나 못났다'하고 원망도, 증오도, 경멸도, 실망도 할 수 있다. 내가 ‘나’를 붙잡고 무너지고 파멸하고 울 수 있어야 ‘나’의 눈물을 스스로 닦아 낼 수 있다. 함께 가야 한다. 사랑할 수 없는 ‘나’도.


슬라이드3.JPG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느껴지던 고마우면서도 ‘말 한번 참 쉽네’하며 일렁이던 반항심. 그 이중성이 불쾌하고 심란했다. 어쩌면 정말, 내 심보가 제대로 꼬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오늘 이 글은 누군가의 심적 동의를 구하는 글이 아니다. 어쩌면 해명이고, 선언이고, 자위에 가깝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한숨, 입술을 깨무는 정도의 일일 수도 있다. ‘나’는 타자다. 아니, 타자들이다. 그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김해서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1
  •  
  • natsu
    • 사랑이라는 것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려운 것 같네요,,,ㅎㅎ
    • 0 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3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