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설이 역사를 그려내는 방식 [문학]

글 입력 2016.12.26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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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건 조금 골치 아플까봐
- 김경욱·조현의 작품이 歷史를 그려내는 방식에 관하여 -





소설이 역사(歷史)를 다루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역사 그 자체를 다루며 정면 돌파하는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역사의 가장자리에 불빛이 미약한 전등을 켜고 그곳을 밝히는 방식이다. 첫 번째 방식을 따르는 소설은 그것을 읽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한 가운데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그 역사가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했던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첫 번째 방식을 따르는 대표적인 소설이다. 독자는 역사의 민낯을 소설이라는 ‘도구’를 통해 목도하며, 그것을 읽는 행위는 여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하는 독서라기엔 그 무게가 무거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이때의 소설은 역사를 바라보게 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소설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다. 역사적 사건이 배경이라는 점은 같지만, 첫 번째 방식의 인물과 사건은 역사에 종속되는 것들로 설정되어 있다면 두 번째 방식의 인물과 사건은 역사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것이 역사의 ‘가장자리’를 밝히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 방식을 따르는 소설 두 편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김경욱의 <필경사 조풍년>과 조현의 <오늘도 평화로운 CIA의 세계>가 그것이다. 두 소설 모두 역사(<오늘도 평화로운 CIA의 세계>는 현재가 배경이지만, 소설에서 비판하고 있는 현실은 훗날 역사로 기록될 것이므로 ‘역사’라고 칭하도록 하겠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소설의 내용은 역사와는 크게 관련이 없어 보이도록 만들어졌다. ‘징비록’과 같은 주제의식을 끄집어낼 만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웃음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두 소설은 한 편의 ‘블랙 코미디’라고 칭할 수 있다.



Ⅱ. 오늘도 평화로운 조풍년의 세계

<필경사 조풍년>은 계엄령이 내려지고 유신헌법이 공표되었던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시대에 깊숙이 연관되어 역사를 다시 보게 만들어주는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았다. 주인공인 조풍년의 세계는 평화롭다. 1970년대의 세계와 그의 세계는 사뭇 다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 주린 배를 채울 음식이며, 아내가 낳을 아기가 아들인지 딸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이처럼 사소한 것으로 채워져 있는 조풍년의 세계는 유신(維新)의 세계와는 그 부피와 무게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뭔지는 몰라도 끝이 머지않았음을 조가 직감한 것은 순대를 사러 대문을 나선 지 한 달이 다 되어갈 즈음이었다. 집안 공기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교수님’과 ‘영감님’들의 목소리는 모종의 거사라도 앞둔 듯 비장했고, 등산화와 옥스퍼드화는 분만실 앞에 선 사내들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진짜 안절부절못한 사람은 조였다. 날짜를 헤아려보니 분만 예정일이 오늘내일이었다.

교수님과 영감님들의 불안은 거대한 역사 속의 불안이다. 그러나 서술자는 ‘진짜 불안한 사람은 조풍년’이라며 그의 사소한 불안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등산화와 옥스퍼드화의 불안을 조풍년의 심정처럼 ‘분만실 앞에 선 사내들’이라고 비유한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하필 중차대한 시점에!”
등산화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랏일 돕는데 무사하다는 말 한마디 못 전합니까?”

조풍년 또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자신의 ‘사소한 일상’을 견고하게 만들어 나가는 데 필요한 도구로 사용한다. 나랏일 하는 자신에게 중요한 일이니 아내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는 조풍년의 고집스러운 협박은 ‘그 상황에서 아내도 못 보다니 힘들었겠구나’라는 동정심보다는 ‘자기가 무슨 일 하는 줄 알면서도 이러네’라는 허탈한 웃음을 자아낸다.

이러한 점에서 조풍년의 직업이 필경사라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필경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글자를 써야 하는 직업이다. 남들에게 사소한 것일지라도 필경사에게는 벼루와 먹부터 물의 종류까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글자의 기울기와 획의 굵기까지 정해진 대로 글을 써야하는 조풍년의 직업적 특성은 그의 세계의 특성과도 맞닿아 있다. 글자를 적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번거로우니 그는 내용에 집중할 겨를이 없다.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이후에야 비로소 ‘방바닥에 펼쳐진 차트가 눈에 들어’온다. 대를 잇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조풍년의 세계의 전부이다. 따라서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전해준 등산화가 호떡까지 건넨 조풍년의 오늘은 평화롭다.

등산화가 건넨 따끈따끈한 호떡처럼, 온 세상이 손 안에 들어온 기분.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했다.

이 소설은 역사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은 채 마무리된다. 헌법 개정안이 공표되던 와중에도 解散을 解産이라고 말장난을 한 조풍년의 일화를 무심하게 전하듯 말해줄 뿐이다. 심각한 것과 우스운 것, 절망과 유머가 혼재되어 있는 소설을 읽으며 독자들은 역사의 무게감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효과는 글의 형식적인 특성에 의해서도 얻을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비속어가 자주 사용되었으며, 웃음을 유발하는 문장을 곳곳에 지뢰처럼 묻어두었다. 따라서 독자는 소설을 따라가며 꽤나 진지해지려는 찰나에 다시 가벼움을 되찾는다.

뱃멀미로 피똥 지린 것만 빼면 부산까지의 여정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정신줄을 놔버리지 않은 것은 봉지에 밴 냄새 덕분이었다. 호떡을 떠올리게 하는 고소한 기름냄새. 호떡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조였다.
“노 프라블럼! 노오오오 프라블럼!” (중략) 통구이처럼 온몸에서 김이 피어오르는데도 문제없다고, 괜찮다고 외치는 병사가 혹시 미군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한국군인가 싶어서였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속옷까지 벗어던져야 한다. 필요하다면 불알 한 쪽이라도 내던져라. 대를 이어야 하니 두 쪽 다는 말고.”

이처럼 작가는 조풍년의 사소한 일상을 진지하지만은 않게 묘사함으로써 오히려 시대 상황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게 된다. 거대한 역사의 한복판에서 ‘조풍연’으로 불릴 것인지 ‘조풍년’으로 불릴 것인지를 집착하는 주인공의 정체성 자체가 세계에 대한 묘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풍년의 모습이 ‘현실이 이렇게 힘든데 정치에 신경 쓸 겨를이 어딨어’라고 말하는 현 세태와 겹쳐 보이는 것이 필자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Ⅲ. 만담꾼의 이야기

<필경사 조풍년>이 인물의 특성을 통해 역사를 조명했다면, <오늘도 평화로운 CIA의 세계>는 서술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시대적 배경과 사건에 대한 논평을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서술자의 개입은 마치 고전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이는 문체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필경사 조풍년>과 <오늘도 평화로운 CIA의 세계> 모두 작품 외부의 서술자가 사건과 등장인물의 심리를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조현의 작품에서는 서술자가 보다 친근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구어체의 문장과 단어 선택으로 인해 나타나는 효과이다. 조현의 문장에서는 솔직히, 하긴, 하여간, 여하튼, 뭐, 좀 등의 추임새와 같은 역할을 하는 부사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는 한 문장 한 문장을 쓸 때마다 단어의 사용을 고심하고, 덜어내기에 집중하는 여타 소설과는 다른 경향의 문체라고 할 수 있다. 부사어의 적극적인 사용으로 이 소설은 가벼운 구어의 문체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겠다’와 같은 추측성의 말투도 왕왕 발견된다.

하긴 걸을 때마다 질척질척 기름이 배어나는 땅에다가 뻘밭에 장판 깔 듯 잔디만 깔았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다.
이사회를 거쳐 멘델 교수를 이사 겸 이사장으로 초빙한 것은 정해진 수순이 되겠다.
흡사 디도스 공격의 관료제적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신에게 올라오는 보고가 상당히 빈약하다는 것을 알아챌지도 모르겠다.

각각의 문장들은 모두 ‘~겠다’라는 추측형의 어미로 마무리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은 서술자가 실제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용된 것은 아니다. 추측형의 문장은 보통 ‘잘은 모르겠지만’이라는 의미를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조현의 소설 속 추측형의 문장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 너스레를 떨면서 모른 척을 하는 문체이다. 이는 세계에 통달한 만담꾼이 옛날이야기를 해주며 재치 있게 코를 찡긋거리는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충분히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추측형의 문장을 사용하는 것은 서술자가 소설 내부에서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마주앉아 이야기를 편안하게 전달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소괄호가 자주 사용된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대개 소괄호는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이거나 연대, 나이 등을 알릴 때 쓰는 부호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의 소괄호는 정신없이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삼천포로 빠졌을 때의 시시콜콜한 말들을 적어두는 역할을 한다. 소설의 전체적인 흐름에 있어서 꼭 필요한 말도 아니며, 심지어 어떤 소괄호 안의 문장은 지나치게 서술자의 사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어쨌거나 평소 소원 중의 하나가 NSA의 슈퍼컴퓨터로 아이돌 콘서트 티케팅 좀 해보는 거다. 맨날 왜 초고속 PC방에서조차 나만 예매 개시 3초 만에 인터넷이 먹통이 되냐고?)
(정보기관의 심층 심리를 성공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면 프로이트나 융, 그리고 요새 한창 유행한다는 아들러와 지젝 뺨치는 역사적 공현을 할 수 있겠다.)

이 소괄호 안에는 ‘나’라는 서술자가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이 대목에서 독자들은 누군가가 해주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집중하게 되며, ‘믿거나 말거나’식의 문장 사용에도 익숙해진다. 이 소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이라고 하더라도 ‘나’라는 한 사람의 입을 통해서만 나온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소설 존재의 목적은 독자들이 믿을만한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조현의 소설은 오히려 ‘믿기 싫으면 말든가!’식의 태도를 취함으로써 글을 가볍게 읽도록 유도한다. ‘뺨따귀, 빠방하게, 디스’와 같은 비속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것 또한 글의 무게를 덜어주는 특성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주제의식마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소설은 곳곳에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CIA 같은 무소불위의 펀치를 가진 기관은 그 자체로서 배타적인 도덕관과 변태 취향을 가진 생물로 진화하는 법이다. (인용자 중략) 이러한 조직을 방임한 것은 미합중국 시민들의 투표용지였던 것도 잊지는 않도록 하자.
통제받지 않은 권력이 또한 얼마나 시시하고 우스꽝스러워질 수 있는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비슷하다.

작중 서술자는 시종일관 자신이 하는 말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태도를 취한다. 사실 글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사건 또한 현 시국의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병에 걸린 바나나에서 진지하게 시작되는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블랙코미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연기자들은 사뭇 진지하지만, 보는 이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볼 수 있는 코미디처럼 말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비슷한 주제의식을 담은 다른 소설과는 달리 가볍게 글을 읽을 수 있다. 비록 담고 있는 주제는 무겁더라도 그 주제를 감싸고 있는 옷이 깃털처럼 가벼운 덕분이다.





블랙 코미디의 특징은 한바탕 웃고 나면 입 안에 씁쓸함이 감돈다는 점이다. 웃음이 나오기에 웃긴 웃었지만, 그래서 이게 말하려고 하는 게 뭐였지? 웃음을 터뜨렸던 사람들은 미소를 거두고 곱씹으며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소설이 역사를 다루는 두 번째 방식이 거둘 수 있는 효과이다. 

이 방식의 ‘첫 번째의 전제는 엄연한 팩트에 기반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유도되는 결론에는 대체로 농간이 숨어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싶다가도, 결론에 다다른 독자들은 조풍년의 한자 말장난에 웃음을 터뜨리고 멘델 교수의 일처리를 멀찍이 서서 바라보게 된다. 이 소설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잊어버린 채 소설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설들을 ‘매의 눈으로 주시’한다면 문학을 이해하는 폭은 더욱 확장될 수 있다. 가볍고 예쁘다고 생각했던 소설의 겉옷이 벗겨지면서 그 내부의 둔중한 무게를 체감하는 순간이 독자에게 찾아오는 것. 그것이 역사를 다루는 작가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가 아닐까. ■


[이영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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