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파멸로 치달은 위험한 사랑 - 영화 ‘로리타’ [시각예술]

글 입력 2016.11.11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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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버트라는 교수는 첫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중년의 남성이다. 추억 속의 첫사랑은 사랑의 결실을 맺기 전, 병으로 죽고 험버트는 그 기억을 갖고 살아간다. 강의를 준비하는 동안 지낼 곳을 찾던 그는 샬롯이라는 미망인의 집에 거하기로 한다. 그 곳에서 만난 샬롯의 딸 돌로레스. 14살 소녀의 모습에서 첫사랑의 모습이 겹쳐 보이고, 험버트는 사랑에 빠진다. 돌로레스와 함께하기 위해 그녀는 샬롯과 결혼까지 한다. 하지만 편지로 이어가던 둘의 관계가 샬롯에게 들키고, 분노에 몸을 떨던 샬롯은 교통사고로 인해 죽게 된다. 험버트는 돌로레스를 여름 캠핑장에서 찾아오면서 샬롯의 죽음을 전하고, 둘은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종착지는 험버트가 교수생활을 하게 될 학교. 그렇게 둘은 대외적으로는 부녀관계로 포장하고, 자신들끼리는 연인으로 함께한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돌로레스의 감정이 변해가는 것을 눈치챈 험버트는 자신의 로리타가 언제 도망갈까 의심하고, 걱정한다. 다시 한 번 여행을 떠나자는 그녀의 제안을 따라 오른 여행길 중간에서 그녀는 사라지고, 험버트는 끝내 그녀를 찾지 못한다. 3년 후 받은 편지에는 돌로레스의 결혼과 임신소식이 실려 있었다. 돌로레스를 가로 챈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된 험버트는 그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이고 경찰에 체포된다.


로리타 포스터.jpg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동명 소설 ‘롤리타’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미 1962년 스탠리 큐브릭 감독에 의해 한 번 영화화 되었으나 내가 본 것은 애드리안 라인 감독에 의해 1997년 리메이크된 영화 ‘로리타’이다. 2015년 우리나라에서 재개봉되었다. 소설과 영화 모두 개봉 당시 큰 논란을 낳았으며, 소아성애를 ‘로리타 콤플렉스’라고 부르고 있을 정도로 그 파급력이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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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험버트’라는 중년의 남자가 14살(소설에서는 12살) 밖에 안된 소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혹자는 이를 두고 서슴없이 ‘더럽다’는 표현을 던지기도 하는 것 같다. 영화에 대한 리뷰들을 살펴보며 나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저 감정에 ‘더럽다’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것인가?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사랑의 대상이 중년 남성과 소녀였기 때문에? 하지만 둘의 사랑은 어느 누구도 강제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차가울 걸 알기에 둘은 대외적으로는 부녀관계를 유지했어야만 했다. 그것은 둘의 자유의지에 입각한 연애감정, 사랑의 감정이었다. 혹자는 또한 얘기한다. ‘험버트’가 진정으로 로리타를 사랑했다면, 올바르게 클 수 있도록 지켜줬어야 한다고. 험버트는 부모의 입장으로 로리타를 사랑한 게 아니다. 사랑의 면면은 다양하지만, 분명히 험버트는 남자 대 여자의 감정으로 돌로레스를 사랑했다. 비슷한 세대의 남성과 여성의 결합에서는 솔직한 육체적 결합과 긍정적인 정서적 유대를 모두 지지하면서 세대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랑의 방식에 제재를 가하는 것은 폭력적이다.

 무조건 ‘더럽다’고 비난하거나, 그 사랑의 방식을 제재하려는 시도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그 선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도덕, 법, 관습 등 인간에 의해 그어진 선은 과연 어디까지 우리를 지켜줄 수 있을까? 둘의 사랑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랑을 도덕적으로 옳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가? 비슷한 세대의 남성과 여성? 비슷한 세대는 어디까지이고, 동성애자와 같은 성적 소수자들의 사랑 역시 비도덕적인 사랑으로 치부할 수 있는가? 명문화된 법을 제외하고 사람이 그어놓은 도덕이나 관습과 같은 제재들은 추상적으로 존재하면서도 개인에게는 구체적인 기준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것을 도덕적으로 옳다, 옳지 못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쉬운데 근거를 물어보면 얘기할 게 마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나에게도 희미하게만 보이는 선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저들의 사랑을 비난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기준과 근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준과 근거가 어느 범위까지 사랑이라는 감정을 제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 역시 있어야 할 것이다.


로리타 스프링클러.jpg
 

 원작 소설을 읽어보지 않아 소설과의 비교가 불가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좋았던 것은 험버트가 돌로레스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 것에 여러 이유를 갖다 붙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험버트가 반하는 순간은 돌로레스가 스프링클러 밑에서 물을 맞으며 책을 보는 단 한 장면이다. 로리타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구구절절 읊었다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비도덕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변명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사랑의 계기가 아니라 사랑이 진행되는 과정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어린 돌로레스에게는 어떤 깊이였는지 모르겠으나 험버트에게 돌로레스는 자신이 평생 추억하던 첫사랑의 부활이었다. 험버트는 자신의 로리타를 위해 무엇이든 했다. 밖에서는 아버지이자 학교의 교수로, 집에서는 그녀의 연인의 역할을 하며, 엄마의 몫까지 해냈다. 그를 불안하게 한 것은 역할들의 무게가 아니라 커버린 돌로레스가 자신을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두려울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과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그녀를 추궁하지도 못하는 험버트의 모습은 자신의 사랑을 어쩔 줄 모르는 불쌍한 모습이기도 하다. 애초에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만들어낸 부녀관계는 반쪽짜리고, 진정한 사랑이라 믿은 돌로레스는 언제 떠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버지로서도, 연인으로서도 당당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험버트는 좌절한다. 3년간 떠나있다가 편지로 홀연히 연락한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데려간 사람에게 총구를 겨눈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 모른다. 임신으로 다른 사람에게 ‘더럽혀진’ 모습을 보면서도 험버트는 함께 가자며 로리타에게 애원한다. 잔인하게 그를 거절했지만 사랑의 대상이었던 돌로레스에게는 분노가 일지 않는다. 분노의 대상은 오직 하나. 3년의 공백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만든 그 사람일 뿐이다. 결국 험버트는 살인자가 되고, 경찰에 잡힌다. 영화는 법정에 선 험버트가 배심원을 향해 자신의 얘기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험버트의 사랑은 구원이 아니라 자신을 결국 파멸로 이끈다.


로리타총.jpg
 

 영화 ‘로리타’는 예술과 외설의 경계, 사랑에 대한 판단과 같은 생각들을 가능케 하는 작품이다. 조사를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고, 위의 글은 나의 감상일 뿐이다. 다만 자신의 인생을 파멸로까지 이끈 험버트의 사랑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한 사랑에 대한 제 3자의 판단이 어떤 기준에서 어떻게 가능한지 조금 더 생각해 볼 일이다.


[김마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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