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책과영화] 02. 스콧 피츠제럴드와 데이빗 핀처의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글 입력 2016.11.01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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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로 되돌아 갈수만 있다면’, 이라는 상상은 흔한 상상이다. 인생을 후회로 가득 채우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 채우든 어떤 지나간 시간들은 유난히 그립고 아득하게 다가오며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언제든 그 기억을 거슬러 회귀하고 새롭게 상상할 수 있다. 기억하는 것, 떠올리고 곱씹는 것이 인간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습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매번 인생 최고의 순간 혹은 최악의 순간을 살면서도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순간을 그만큼의 기쁨으로, 그만큼의 절망으로 인지하기가 너무나도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는 ‘인생을 거꾸로 살 수 있다면’, 이라는 상상을 함부로 하진 않는다. 거꾸로 사는 것과 과거를 다시 사는 것은 너무나도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예측할 수 없는 모험이고 후자는 미래를 수습할 수 있는 기회다.

  < 톰 소여의 모험 >의 저자 마크 트웨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우리의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 맨 처음에 오고 최악의 순간이 맨 마지막에 온다.’ 가장 행복할 때 그 행복을 모르고 시간이 한참 흘러버리고 늙어버린 후에야 그때를 깨닫게 된다는 뜻을 지닌 것 같은데 이를 듣고 스콧 피츠제럴드는 그래서 인생을 다시 살아보면 어떨까가 아닌 ‘그래, 순서를 뒤집어서 인생을 거꾸로 살면 인생이 행복할까?’라는 독특한 발상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라는 단편 소설이다.
 


 소설과 너무 다른 영화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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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은 주인공 벤자민 버튼이라는 한 사내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일대기를 다루는데, 노인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져서는 갓난애가 되어 죽게 되는 과정을 전혀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천연덕스러운 문체로 풀어나간다. 70세 정도의 늙은 육체로 태어난 것에 그치지 않고 정신까지 노인인 존재가 병원에서 신생아로 태어났다. 전혀 아기의 모습이 아닌 아기(?)가 자신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상대를 향해 ‘댁이 내 아버진가?’하고 입을 열다니. 소설은 내내 이런 식으로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을 연출해 보여주며 해괴함과 당황스러움을 안겨주지만, 독자들은 어느새 그러한 상황 설정에 익숙해져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는 것 외엔, 그 어떤 것도 특별할 게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씁쓸할 정도로 사실적인 부분들이 많다. 

  우리는 벤자민 버튼이 주인공인 소설을 읽지만 그와 갈등을 일으키고 사는 주변 인물들 즉, 노년기엔 아버지, 청년기엔 아내, 사춘기 때엔 아들에게도 공감을 실을 수 있다. 벤자민 버튼이 거꾸로 사는 내내 겪어야 했던 자신의 실제 위치와는 대칭되는 정신 시스템, 사회의 위계질서와 교육 시스템을 보면서 우리는 그것을 도리어 순서에 맞고 사리에 맞는 보통의, 현재의 삶이 어떠한가를 반추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기가 태어났지만 수치스럽게도 이미 늙은이다. 남편은 젊어지지만 아내는 불쾌하게도 늙어간다. 아버지가 아들보다 어리다는 사실이 어렵다. 흐르는 시간이 달라 주변인들(가족과 사회)과 멀어지고 어긋나기만 할 수 밖에 없는 문제적 인간을 보면서 우리는 아이가 아이다운 것이 무엇인지(무엇이 아이를 아이로 만드는지), 사랑에 대해 변심하는 모습은 어떠한지(무엇이 사랑을 야기하고 사랑이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 늙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늙음과 죽음의 모습이 어떠한지)에 관한 고민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는 모두가 갈등에 직면하는 문제적 인간 벤자민인 동시에, 문제를 끌어안은 아버지이고 아내이고 아들이고 사회가 된다. 

  ‘순서를 뒤집어서 인생을 거꾸로 살면 인생이 행복할까?’ 라는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질문에 대해 스콧 피츠제럴드는 낭만적인 그림을 보여주지 않는다. 냉소적이고 비틀린 웃음으로 어떻게 시간이 흘러도 별다를 것 없이 불편하고 무력한 것이 인생이라고 그냥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게 다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떤 인생이든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과 매순간을 진정하고 함께하기가 힘들고, 그 순간순간의 깊이에 다다를 수 없다는 맹점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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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데이빗 핀처의 영화는 어떠한가. 낭만적인 질문에 대해 더없이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그림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겠다. 거의 다른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원작과의 공통점은 주인공의 시간이 역행한다는 것 밖에는 없다. 시대적 상황도 아예 다르다. 영화 속 벤자민은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어긋나기만 하던 소설 속 인물과 달리 어떤 환경에서도 끝끝내 적응해 내며 20세기라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도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근사하고 멋진 인생관을 지닌 이상적인 인물들만을 여럿 만난다. 그는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깨닫고 바른 청년으로 자라난다. 영화 속 벤자민의 역행하는 시간은 소설과 달리 오직 육체에 한해서일 뿐이다. 따라서 그에게서 남들과 다른 육신이란 (물론 두말할 것도 없이 비극이지만) 소설에서만큼 문제적이거나 지나치게 낯설고 큰 장애로 작용하진 않는다. 사랑에서도 마찬가지. 몇 차례의 이별과 위기가 있긴 하지만 벤자민 버튼과 여주인공 데이지의 한결 같은 사랑에는 결코 변함이 없다. 그들은 계속해서 서로를 갈구하고 잊는 법이 없으며, 비현실적일 정도로 간절하다. 

  혹자는 영화를 원작 소설과 견주어봤을 때,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잔잔하지 않은가, 소설의 포인트를 너무 벗어나지 않았나, 피츠제럴드의 느낌이 전혀 살지 않고 지나치게 사랑 이야기에 편중된 판타지적인 내용이라고 비판하지만, 개인적으로 소설이든 영화든 양쪽 다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의견을 달리한다. 원작 소설에 근거했다고 해서 반드시 원작의 포인트, 원작이 내세우는 강점을 따라야할 이유가 있는가? 원작이 좋으면 그 원작이 갖고 있는 아주 단순한 모티프 하나만을 차용해서도 또 다른 이야기를 생성할 수 있지 않나? 소설과 영화. 각각의 두 작품 속 벤자민은 그냥 전혀 다른 인물이다.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데이빗 핀처의 벤자민! 피츠제럴드가 삶과 사랑을 건조하고 냉소적으로 바라봤다면, 데이빗 핀처는 뜨겁고 희망적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는 소설과 영화를 전혀 다른 별개의 작품으로 받아들이는 쪽이 마음이 편할 것이다. 양쪽을 다 감상해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애초에 연장선상에 둘 수가 없다. 소설은 몇 페이지 되지 않는 극히 짧은 단편이며, 영화는 장장 166분이나 된다. 심지어 영화 속 여주인공 이름(데이지)과 소설 속 여주인공 이름(힐더가드)이 아예 다른 것만 봐도, 데이빗 핀처 감독이 애초에 소설을 고스란히 옮긴다거나 적절히 변용하겠다는 생각을 버린 것이지 않을까 싶다.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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