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죽음조차 우스워 보이는 삶의 무게, ‘죽여주는 여자’ [시각예술]

글 입력 2016.10.31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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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영(윤여정 분)은 일명 ‘박카스 할머니’라 불리는 노인 사이의 매춘부다. 양공주로 시작해 평생 벌어먹을 재주라곤 그거 밖에 익히지 못했다며, 매춘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한다. 자신을 찾던 단골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누워있다는 소식을 뜯고 병원을 방문한다. 스스로는 식사나 배변 같은 가장 기본적인 삶의 활동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소영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 애원한다. 소영은 농약을 구입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중풍환자의 입속으로 농약 한 병을 꼬박 다 흘려 넣는다. 할아버지의 중풍 소식을 알려준 다른 할아버지는 그 사실을 듣고 놀라다가 자신의 친구와 자신을 차례로 보내달라는 부탁을 한다. 치매에 걸린 자신의 친구를 산  꼭대기에서 밀고, 자신의 마지막을 함께해달라는. 다소 엽기적인 부탁을. 죽여주는 여자가 죽여 ‘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카스 할머니’ - 음지 속의 음지 : 노인의 성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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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욕에 대한 많은 담론이 있고, 그것은 때로 선악의 기준을 적용할 수 없는 인간 심연의 본능이라 일컬어진다. 욕망의 대부분이 그렇듯 그것은 자의로 조절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법이나 제도 같은 것들은 ‘인간적’인 기준 안에서 그것을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때로는 명문화된 사회적 기준들보다 보이지 않는 관습적 기준이 더 뚜렷한 경우가 있다. 노인의 성은 그런 문제 중 하나다. 고령화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사회에서 노인들에 대한 복지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그들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는 태도는 더더욱 부족하다. 젊음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작품들은 많이 있었지만 ‘죽여주는 여자’는 철저하게 외면 받던 노인들의 성욕을, 그 현장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그저 인간들이 죽을 때까지 느낄 욕망의 일종인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욕망을 넘어 노인들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명이 길어져 100세가 아닌 평균수명 120세에 달하는 시대에 노인 부양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자식들에 대한 투자가 노후대책이라고 마냥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이 시대에, 돈이 사람을 좌지우지하는 사건들이 파다한 이 시대에 노인들은 스스로의 생계를 유지할 수단이 필요한 것이다. 젊어서 양공주를 시작으로 박카스 할머니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PD앞에서 읊조리는 소영의 얼굴은 이 시대 노인들의 쓸쓸한 일면이기도 하다. 자존심에 파지 줍는 일은 도저히 못하겠다는 그녀의 말은 얼마나 비참한가. 파지 줍는 일과 매춘이라는 좁은 선택지 안이지만 어떻게든 이어가야할 목숨이 무겁다.


죽음조차 우스운 삶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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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영에게 처음으로 죽음을 부탁한 남자는 중풍에 걸렸다. 맞춤 정장만을 입고 다니면서 팁도 넉넉히 챙겨주던 멋쟁이 신사가 중풍 환자가 되어 중환자실에 누워있다. 간병인 없이는 배변도, 식사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미국에 사는 아들은 아버지를 걱정하지만, 며느리와 손주들은 그저 의례적인 말 몇 마디를 건넬 뿐 남보다 못한 시선이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할아버지가 소영에게 힘겹게 건넨 말. ‘죽여 줘’ 소영은 벌벌 떨리는 두 손으로 그 부탁들 들어줬다. 죽지 못해 사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을 외면하지 못했다. 자살조차 타인에게 부탁해야하는 그 상황이 비참하다.

 소영이 두 번째로 죽여준 남자는 치매환자였다. 앞의 첫 번째 남자의 중풍 소식을 들려준 할아버지의 또 다른 친구. 골방에 사는 할아버지는 아직은 초기지만 방금 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일쑤고, 찾아온 친구의 얼굴을 언젠가는 잊어버릴까 걱정한다. 그 전에, 소중한 것들을 잊기 전에 자신을 죽여 달라는 부탁. 소영은 산꼭대기에서 그의 등을 민다. 소리도 지르지 않은 채, 할아버지는 그렇게 산 밑으로 곤두박질 쳤다. 소중한 것을 잊기 전에 죽으려는 선택. 그것은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세 번째 남자는 염치없게 자신을 죽여 달라는 부탁을 하지는 않는다. 위의 두 할아버지의 소식을 전한 남자다. 새삼스레 ‘데이트’를 하자는 남자를 따라 소영은 근사한 달리 말하면 비싼 하루를 보낸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모텔이 아닌 호텔로 들어간다. 서울이 한 눈에 보이는 전망과 맥주와 양주로 채워진 냉장고가 한 켠에 있는 호텔 방에서 마침내 남자가 부탁한다. 가족을 모두 보내고 혼자 죽기가 너무 무서우니 자기 옆에 있어 달라는 부탁을. 자신을 수면제 한 움큼을 먹고, 소영에게는 한 알을 먹인다. 자신은 영원한 잠을 잘 테니 소영은 그저 한 숨 자고 일어날 뿐이라고 생각해달라고. 소영이 눈을 떴을 때에는 거품이 말라붙은 허연 입을 한 채 남자는 죽어있었다.

 세 남자의 선택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우리는 저 사람들의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는 것이 너무 괴로워 죽음이 우스워 보이는, 죽음을 바라게 되는 저들의 삶을 판단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기는 한 것인가? 웰빙을 넘어 웰다잉의 담론이 나오는 시대다. 존엄사 혹은 안락사가 법제화의 시도를 거친 것은 이미 오랜 일이고 연명 치료를 포기하는 식의 존엄사가 인정된다면 우리 사회에서도 적극적 안락사에 대한 요구가 그리 멀지 않을 것이라 본다. 죽는 순간까지도 ‘인간적’이고 싶은 것은 이기적인 욕망인가? 죽음조차 우스워 보이는 삶의 무게 앞에 좌절한 슬픈 선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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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여주는 여자’는 수많은 이야기를 가능케 하는 영화다. 소영이 살고 있는 집을 중심으로 이 사회의 소수자들에 대한 얘기도 할 수 있고, 소영이 결국 교도소에 수감되는 과정을 통해 진실에 대한 얘기도 할 수 있다. 영화의 중심 소재가 제목에도 드러나 있듯 (중의적 표현이지만)죽음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얘기를 부족하나마 풀어내고 있을 뿐이다. 주인공인 죽여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사람들의 부탁이 ‘인간적’으로 들렸기 때문이고, 그 ‘인간적’인 선택에 자신 역시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벗어난 우리는 재빨리 살펴봐야 한다. 우리 근처에 삶의 무게에 짓눌려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사람들과 손잡고 계속 걷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김마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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