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공동체, 그 공허함과 한계 - 카프카의 「변신」과 「공동체」 들여다보기 [문학]

글 입력 2016.02.20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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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오피니언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세기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현대문학의 불멸의 신화라 불리는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중
변신과 공동체를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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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신공동체, 이 두 작품에서 제가 찾은 공통점은
두 작품 모두 인간의 삶에 숙명적으로 뒤따르는 공동체의 허울과 모순을 고발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모순은 변신에서 주인공을 철저히 외면하는 가족이라는 집단을 통해 드러나며,
공동체에서는 더욱 직설적이고도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속성 아래 수많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야만 한다고 학습된 인간이
정작 근본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은 만성적인 소외감과 고독감이라는 모순
카프카는 두 작품을 통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죠.



근본적인 인간소외와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한 인간을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공동체의 한계는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한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에 대한
가족의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외판사원인 주인공은 어느 날 아침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한 것을 발견하고,
그의 가족은 충격에 빠지죠.
그들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 이후 가족의 생계를 오롯이 책임져왔던 그를
이제 철저히 외면하고 혐오합니다.
단지 그가 벌레로 변해버렸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을 비롯한 그의 주변인들은
그레고르 잠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누이동생이 끝내 그를 괴물이라고 칭하며,
그 괴물과 오빠가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내보내야 해요누이동생이 소리쳤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에요, 아버지. 이게 오빠라는 생각을 버리셔야 해요. 우리가 이렇게 오래 그렇게 믿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불행이에요. 그런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오빠일 수가 있지요? 만약 이에 오빠였더라면, 사람이 이런 동물과 함께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진작에 알아차리고 자기 발로 떠났을 테지요. 그랬더라면 오빠는 없더라도 계속 살아가며 명예롭게 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이 동물은 우리를 박해하고, 하숙인들을 쫓아내고, 분명 집을 독차지하여 우리로 하여금 골목길에서 밤을 지새게 하려는 거예요. …」



그녀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그 공동체의 구성원인 오빠의 존재를 거부하는 모순을 저지르죠,
심지어 아버지와 어머니 또한 그녀와 같은 태도를 보입니다.
주인공의 진짜 마음과는 달리 가족들은 그가 자신들을 의도적으로 불행하게 만들려 한다고 생각하고,
급기야는 벌레가 진짜 그레고르라면 이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일방적인 합리화를 시도하죠.
이렇게 주인공은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성립한 합리화의 희생양이 됩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를 맞고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죠.




여기서 벌레는 공동체라는 허울 속에서 개인이 지니는 압박과 소외, 불안 의식을
단적으로 형상화한 소재입니다.
인간이 삶에서 이루는 수많은 공동체 중
가장 근본적이고 끈끈하다고 인식되는 공동체는 가족, 혈연이라고 할 수 있어요.
카프카는 이 혈연마저 그에 속한 한 개인을 처절하게 몰아내고 부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작품을 통해 매우 극단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드러냅니다.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내려놓은 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노력해왔던 주인공의 희생에 대한 대가는
공동체로부터의 비참한 소외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의 희생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왔던 가족의 안일한 태도에서부터
그의 절망감과 소외감은 조금씩 싹트고 있었을 지도 모르죠.
결국 주인공을 향한 가족의 혐오감과 적대감은
이미 벌레로의 외면적 변신을 겪은 그를 2차적 변신’,
즉 그가 공동체에서 전적으로 부정되고 파국으로 내몰리는 정신적 파괴까지 초래했습니다.
이렇듯 카프카는 공동체의 폭력성과 불확실성이라는 한계 속에서
끔찍한 벌레로 변신할 수밖에 없는 개인의 허무와 절망
변신의 한 가족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언제든지 자신을 팽할 수 있고 언제든지 파괴될 수 있는 공동체를
끊임없이 만들며 살아갑니다.
왜 인간은 공동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모순적인 존재인 것일까요?
카프카는 이러한 근원적인 물음을 공동체에서 직접적으로 던집니다.
 


그런데 도무지 이 끊임없이 같이 있음이란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 우리 다섯에게도 그것은 아무런 뜻이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미 같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언젠가 한 집에서 차례로 나와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우리
여섯번째라는 존재 자체를 귀찮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들이 품고 있는 여섯번째에 대한 적대감의 원인을 잘 모릅니다.
심지어 나머지 다섯도 전에는 서로 잘 몰랐으며, 굳이 말한다면, 지금도 서로 잘 모릅니다.
그저 우리는 다섯이며 여섯이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공동체라는 이름을 내거는 순간 뒤따라오는 본능적인 적대감
비단 공동체에서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니는 심리일 것입니다.
공동체가 왜 생겼는지 알지 못하고 왜 함께 있어야 하는지 모르지만,
이미 우리는 함께 있으며 함께 있어야만 합니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암묵적인 약속이자 의무입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 원인모를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만
비로소 정상적인 사회적 동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카프카는 이렇게 우리여섯번째라는 단순한 인물 대립 구도를 제시함으로써
공동체의 근본적인 공허함을 독자들에게 각성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질문합니다.
공동체란 정말 무엇인가?




인간은 수없이 많은 공동체를 만들어내고 파괴합니다.
때로는 변신그레고르 잠자가 되기도 하고,
그를 외면하는 가족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공동체우리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여섯번째의 입장에 서기도 합니다.
이른바 공동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는 투쟁의 반복입니다.




인간의 삶 전체에 걸쳐서 벌어지는 이 지독한 투쟁의 이유는 뭘까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카프카 자신 또한 그 답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카프카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공동체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불안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여태껏 생각해보지 못했던 이러한 물음을 본격적으로 끌어올리며
독자들에게 숙명과도 같은 과제를 남겼습니다.
이는 위에서도 이미 제시되었던 한 문장에 의해 다시금 강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이 끊임없이 같이 있음이란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


그 과제를 해결하는 것, 공동체 사회에 남겨진 우리 자신의 몫이 아닐까요?








- 인용문 / 사진 출처 -
프란츠 카프카(전영애 옮김), 『변신·시골의사』, 민음사, 1998
인터넷 교보문고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37460043&orderClick=LEA&K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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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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