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판소리 미니스커트를 입다 : < 판소리 단편선-주요섭: 추물/살인 > [공연예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글 입력 2016.01.08 09:2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판소리는 원래 민중의 힘이고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사회 지배 계층에 대한
비판과 풍자, 해학이 함께 한다.

판소리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짧아지고, 강렬해져 눈길을 사로잡는다.
 
 

    예전에 ‘전통공연예술의 이해’라는 전공을 배우면서 판소리에 대해 본격적으로 배울 기회가 있었다. 이전에도 판소리에 관심이 많아 창극을 자주 관람하곤 했는데, 이론적으로나 전문적으로 배우게 되어 내심 기뻤다. 교수님은 평소에 판소리를 접하기 힘든 학생들을 데리고 국립극장으로 단체관람을 가셨다. 우리가 관람한 판소리는 (지극히) 고전적인 완창 판소리 <춘향전>이었다. 보통 무대는 관객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기 마련인데, 판소리는 마당극 형식으로 원형극장 중심 낮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등장하는 사람들은 판소리 명창 여자 1명, 북을 치며 장단을 맞추는 고수 1명이 전부였다. 나는 이전에도 혼자 판소리를 보러 다니고, 연극도 창극을 좋아해서 명창이 소리를 시작하자마자 귀를 기울였지만, 안타깝게도 내 옆에 앉아 있는 친구들은 꾸벅꾸벅 졸았다. 고전소설에서 배우던 춘향전과 남원고사가 단 한 명의 명창의 입에서 전부 구사되었다. 그녀는 춘향이가 되어 그네도 타고 방자가 되기도 하고 이몽룡이 되어 어사출또를 외쳤다. 어릴 적부터 엄마에게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조르고 할머니께 옛날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마치 동심으로 돌아간 것처럼 판소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관객들의 연령대는 부모님을 따라온 초등학생부터 단체관람 온 중고등학생, 대학생, 아주머니, 할아버지들까지 매우 다양했다. 처음에는 명창한테 눈을 고정시키다가 할아버지들이 ‘얼씨구 좋다! 그렇지! 잘한다! 음!‘ 등의 추임새를 넣는 모습을 보고 어느새 즐기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눈을 감고 목소리의 높낮이며 장단이 달라짐에 따라 바뀌는 인물과 배경들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고수의 장단에 맞춰 소리죽여 발을 구르기도 했다. 판소리의 매력은 바로 이런 것 같다. 관객이 함께 참여하는 극. 아무리 요즘 연극과 뮤지컬들이 관객을 극에 참여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능동적이고 자체적으로 흥에 겨워 즐기는 것은 판소리뿐인 것 같다.

  예전에 친구를 데리고 판소리 공연을 보러 갔던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공연이 끝나고 나서 한 마디도 못 알아들어 답답하고 지루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판소리를 좋아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 이후에는 그냥 나 혼자 판소리를 관람하러 간다. 그러나 이는 친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판소리에 대해 생각하는 바이다. 오히려 나는 그 친구가 좋아하는 힙합과 랩이 더 귀에 들어오지 않고 낯설기만 한데, 판소리와 같은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 장르가 점점 묻히는 것 같아 아쉬웠다. 판소리는 고루하고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가만히 눈을 감고 감정을 이입해보면 조금은 다르리라 생각한다. 결코 우리의 것이 무조건 좋다고 옹호하는 것이 아니며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과 한 번쯤이라도 제대로 느껴본 사람은 분명 차이가 있으리라고 본다.

  다행스럽게도 연극에 판소리와 마당놀이를 삽입한 ‘창극’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국립극장에서 국립창극단과 함께 동서양의 고전을 재해석한 창극을 제작하는데 개인적으로 그 작품들이 내용적으로나 작품 완성도 면에서도 매우 좋다. 이곳에서 <변강쇠 점찍고 옹녀>, <코카서스의 백묵원> 등을 관람했는데, 나는 극도 극이지만 극을 감상하고 난 후 다른 관객들의 반응에 더 관심을 두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처음에는 약간 낯(?)을 가리다가 내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금세 배우들과 하나가 되어 극을 즐겼다. 관람 후 SNS를 살펴보니, ‘판소리는 졸릴 것 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었다.’, ‘또 이런 장르의 극을 관람할 의사가 있다.’와 같은 글들이 보였다. 명창도 고수도 공연 제작자도 아닌데 이런 글들을 보고 괜스레 내가 다 뿌듯했다. 이런 공연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판소리라는 장르에 대해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판소리의 진가에 대해 혼자 떠드는 글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그동안 내가 관람했던 수많은 판소리 공연들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소리꾼이자 판소리 창작자인 이자람이 예술감독으로서 제작한 <판소리 단편선–주요섭: 추물/살인> 이라는 작품이다.
 
 
 
 
  무대는 간소하면서도 이미지적이다. 하얀 마루에 나무로 만든 8폭 병풍이 서 있다. 그리고 병풍의 한 쪽 끝에 '노오란' 저고리가 담 너머 핀 개나리처럼 걸려 있다. 마치 연하장의 그림 같기도 하다. 그리고 무대 오른편에는 세 명의 고수들이 다양한 악기를 가지고 대기 중이다. 아이처럼 짧은 파스텔 톤의 노란 한복 치마에 바지를 입은 소리꾼이 올라온다. 시작이다.

  두 개의 작품 중 먼저 하게 되는 <추물>은 소리꾼 김소진이 맡았다. 한복과 잘 어울리는 얼굴에 미소가 한 가득이다. 그녀는 자신의 예쁜 어린이 대회 출신이라며,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내고 '외모지상주의'의 요즘 세대를 언급하며 자연스럽게 <추물>의 주인공 '언년이'의 인생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한 명의 배우가 5~6명의 모든 역할을 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어떻게 보면 지루하게 여겨질수도 있다. 그렇기에 무대 위에 선 소리꾼의 어깨는 무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김소진은 너무나 밝고 즐거워보인다. 작품의 서두 부분인 주인공 언년이의 인물 묘사는 그야말로 맛깔나게 살려냈다. 언년이의 눈,코,입에 대한 설명은 물론이도 언년이가 말을 하는 부분마다 턱을 삐죽이 내밀고 마치 언년이 빙의라도 된 듯 연기를 한다. 언년이가 자신과 닮은 아기를 죽이고 싶어 흥분과 격양된 상태에서 급히 차분해지면서 가라앉고 자신도 앉아 아이를 누르는 장면은 마치 모든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 느껴지면서 어딘지 애잔하고 슬프고 처연해지는 것이 모든 감정이 몰입되었다. 그리고 마치 실제로 공연에서 공연이라도 하듯 맛깔나게 부르는 대중 가요풍의 창 또한 신선하고 새로웠다. 노래를 부르기 전 잠시 극에서 나온 듯, "노래하기 전에 목 좀 축여볼까요?"하며 너스레 연기도 재미를 준다.

  15분의 쉬는 시간 후 다음으로 오른 것은 소리꾼 이승희의 <살인>이었다. 앞에 오른 <추물>이 청소년관람가라면 <살인>은 청소년관람불가의 느낌으로 달라진다. 병풍을 뒤로 돌려 붉은색에 한 폭은 전면 거울이다. 그리고 위에는 초록색 한복치마와 흰 속치마가 걸린다. 희고 단아해 보이는 드레스 스타일의 개량 한복을 입은 소리꾼은 무대에 올라 어린 나이에 돈에 팔려 매음을 하게 되는 '오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살인>은 내용도 그렇지만 전 공연과는 차별되어 차분하고 무게감 있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소리꾼의 얼굴 표정과 소리의 느낌도 축 가라앉는 느낌이다. 이승희 역시 다양한 인물이 되어 연기를 펼치는데 각기 다른 인물이 될 때마다 목소리 톤과 표정의 변화가 확실하게 이루어진다. 오뽀의 연기를 할 때와 포주인 뚱보 할멈의 연기를 할 때의 차이, 그리고 같은 인물이라도 그가 내면의 변화를 보일 때의 느낌은 확연히 달랐다. 포주 할멈이 일하기를 거부하는 한 창부의 머리를 잡고 끌어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위에 걸려있던 흰 치마를 질질 끌고 와 세게 바닥에 던지며 연기하는 모습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 질 정도로 실감났다. 그리고 포주의 연기가 끝나자 바로 오뽀가 되어 바닥에 떨어진 흰 치마를 자신이 걸쳐 입으며 다시 창부의 삶을 독백하는 장면도 인상에 남았다. 또한 이자람이 자료를 찾던 중 발견한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창부들의 노래는 마음이 쓸쓸해지면서 그네들의 심정과 상황을 잘 드러내는 가사였고, 소리꾼이 잘 살려 연기하며 불러 주었다.
 
 
201412021841200048874ws_01_ws.jpg
▲ 이승희, 김소진 소리꾼
 
 
  일단, 배우들의 연기가 탁월하다. 사실 혼자 단편 소설 한 작품을 외워서 이야기하고 노래로 불러주는 형국인데, 목소리나 표정의 다양한 변화들이 흥미로웠다. 또한 고수들과의 소통도 재미의 한 부분을 주었다. 눈을 마주치며 상대 배역인 듯 연기하기도 하고, 농을 던지기도 하며 끊임없이 눈과 감정을 주고받고 그것은 관객과도 마찬가지였다. 고수들은 추임새를 넣으며 다양한 악기들도 연주하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북 뿐만 아니라 장구, 꽹과리를 비롯하여 아코디언, 실로폰, 캐스터네츠 등등을 사용하였다. 심지어 창부들이 부르는 노래에서는 젓가락을 사용해 마치 술상을 두드리듯 분위기를 맞추었다. 표정도 이야기에 따라 웃고 울고 심각해지며 소리꾼과 함께 이야기를 끌어갔다. 또한 조명도 적절히 사용하여 인물의 내면 변화나 장소, 상황의 반전을 주는데 효과적이었다. 혼자 연기하는 배우의 한계나 지루함을 없애고 관객의 감정선도 함께 건드려주기도 한다. 보면서 앞으로 미래에는 더 새로운 형식과 방법 등을 다양하게 도입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진 주제들도 요즘 세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추물>에 나오는 외모에 대한 차별과 상대적 박탈감은 요즘 오히려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절대 과거가 아니다. <살인>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진 것이 없기에 없이 수탈당하는 서민들의 이야기는 지금 현실이다. 아직도 학연, 지연 등으로 부당함을 겪고 있고, 현재도 상대적으로 박탈당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은 존재하며, 이 사람들이 가진 욕망이 현재 우리와도 공감이 된다. 더 넓게는 사랑 받고 싶고, 존재로서 인정받고 싶은 인간의 이야기인 것이다. 
 
 
201411241920490048083ws_01_ws.jpg
  ▲ 소리꾼이자 판소리 창작자 이자람 예술감독
 

  <판소리 단편선-주요섭: 추물/살인>의 공연방식은 판소리와 연극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작품의 외형은 소리꾼이 아니리와 창으로 이야기를 풀고, 고수가 박자와 추임새를 하는 판소리이다. 하지만 소리꾼은 화자와 등장인물을 확실히 구분하여 연기하기에 1인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청아한 소리로 한을 풀어내는 방식 외에 시대를 반영한 연극적 기법들은 이 작품의 재미를 배가시키고 있었다. 이는 기존 작품이 아닌, 단편소설을 판소리 표현방법들로 풀어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주요섭의 단편소설 두 편은 근대의 하층 여성을 다룬다. <추물>의 언년이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멸시와 비난을 받지만,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노력한다. 강간을 당해 임신을 하게 된 그녀는 아이가 아름답게 태어나 세상에 복수하길 꿈꾼다. 하지만 아기는 본인과 꼭 닮아있다. 언년은 절망감에 아이를 질식시키다가, 자라면 외모가 나아지지 않을까란 희망으로 아기를 보듬는다. <살인>의 우뽀는 가난 때문에 보리 서 말에 팔린다. 그녀는 몇 번의 팔림 끝에 중국 상해의 창녀촌에서 희망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우뽀는 우연히 보게 된 K씨를 사모하지만 그에게 다가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절망한다. 그녀는 새로운 삶을 위해 악독한 포주 할매를 죽이게 된다. 언년이와 우뽀의 삶은 외모지상주의, 강간, 가난, 매춘, 살인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90여년이 지났는데도 먼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환경에 저항하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소리꾼의 호흡에 따라 전달되면, 관객들을 웃고, 한숨 쉬고, 눈물짓는다. 이렇게 ‘판소리’가 우리 시대와 가까운 서사와 공연 방식을 흡수하면서 관객들이 어렵지 않게 즐기게 한 것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14168797980186.jpg
 
14168798158030.jpg
 
 
  <추물>과 <살인>을 표현하는 기법이 다르다는 점이 눈여겨 볼 만하다. <추물>은 소리꾼이 해설과 등장인물을 역동적으로 넘나들며 풍자와 해학을 느끼게 하고, <살인>은 소리꾼이 우뽀의 감정을 통해 비장미를 전한다. 이러한 변화는 휴식시간을 사이에 두고, 소리꾼과 무대를 다르게 하여 호흡과 분위기를 전환한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느끼게 하는 연극적 연출인 셈이다. <추물>의 원작은 가벼운 문체와 대화를 통해 생동감을 드러내었다면, 판소리<추물>은 이러한 특징과 더불어 소리꾼의 명랑한 연기가 덧붙여져서 한스러울 수 있는 언년이의 삶을 균형 있게 묘사한 것이 장점이었다. 하지만 <살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뽀의 고단함이 강조되었고, 소리꾼 역시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으로 극단의 ‘한’을 드러낸다. 이로 인해 판소리 <살인>은 우뽀의 의식은 명확히 드러나지만, 1차적인 감정토로에 치우치는 한계가 노출되었다. 세심한 감성 표현으로 인해 무대화할 상상력이 부족해진 것이다.
 
  <판소리 단편선 : 추물/살인>은 ‘판소리의 현재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하였다. 이를 통해 양식의 미덕과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함이 드러났다. 소리꾼의 소리가 보이기 위해서 판을 다양한 소리로 채우고, 기본적인 분위기를 잡아준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3명의 고수를 두어 북, 장구, 꽹과리 외에 아코디언, 템버린, 타악기로 밴드의 일면을 가져온다거나, 소리꾼이 모던가요를 맛깔나게 불러 설레임과 흥청거림을 표현하였다. 또한 간단하지만 상징적인 무대와 조명은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확실히 드러내었다. <추물>은 하얀 병풍과 노랑 저고리, 밝은 조명으로 <살인>은 빨간 병풍과 청록색 치마 자락과 검붉은 조명으로 각각의 감각을 적절히 표상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무대방식을 통해 분위기를 조성해주면서 관객이 상상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힘 있는 서사의 발견도 중요하다. 다양한 매체로 전환되는 현 시대에 관객과 공감하기 위해서는 다각도의 노력들이 뒷받침되어 하는 것이다.
 
  주요섭은 ‘사회에 억압된 여성의 우울한 이야기’를 통해 사회의 변화와 자각을 꾀했다. <판소리 단편선 : 추물/살인>은 판소리의 양식과 현대적 무대화를 통해 작가의 메시지를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전통의 현재화, 서사의 깊이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이 작품은 분명 성과를 보였다.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는 현재화된 판소리가 앞으로도 많이 개발되었으면 한다.
 
 
14168797666594.jpg
 
 

 

  여담이지만, 나는 <판소리 단편선-주요섭: 추물/살인>을 총 세 번이나 봤는데 모두 장소가 달랐다. 작품은 같고 대관한 장소만 달랐지만, 나는 장소의 영향이 굉장히 컸다고 생각한다. 맨 첫 관람은 2014년 11월 두산아트센터 space111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공연들이 많이 올라오고 학교에서도 가까워 자주 찾는 곳이었다. 연극, 뮤지컬, 콘서트 등 다소 작품성이 뛰어난 공연들이 올라오며, 신진 예술가들을 위한 장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판소리 단편선-주요섭: 추물/살인>도 그 중에 하나였고 내 기억에 대학생 할인을 해서 15000원 정도에 예매했던 것 같다. space111이 소극장이어서 무대와 객석 사이의 간격이 매우 가까워 배우(소리꾼)의 땀방울까지 보일 정도였고, 관객들도 대부분 2-30대로 젊은 층이 많았다. 두 번째는 2015년 4월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관람하게 되었다. 중간고사 하루 전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자람 예술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있다는 공지에 망설이지 않고 예매했었다. 국립국악원은 예술의 전당 바로 근처에 위치해 있는데도 실제로 발걸음했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풍류사랑방의 객석은 우리나라 고유의 문양이 새겨진 푹신한 등받이가 있는 방석이 바닥에 깔려 있는 형식이었다. 나무로 된 마룻바닥이 마치 시골에 있는 할아버지댁에 놀러간 기분이 들었다. 공연장을 들어가기에 앞서 신발을 벗고 방석에 앉아 이전보다 훨씬 가깝고 눈높이도 낮은 무대가 신기해 한창 둘러보며 구경했었다. 관객으로는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그리고 4-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 날이 사실 제일 재미있게 관람했던 날이었다.

 공연 뿐 아니라 관객들을 구경하느라 지루할 틈이 없었다. 잘한다! 얼씨구 좋다! 그렇지! 아하 와 같은 추임새를 넣으며 단순히 배우와 관객이라는 거리를 넘어서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 공연에 한층 더 색을 입히는 느낌이었다. 배우가 웃으면 같이 웃고 고통스러워하면 같이 아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 이것이야말로 진짜 판소리의 묘미구나를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마치 동네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맞장구 쳐주고 자기 일인 마냥 챙겨주는 정이 느껴지는 따뜻한 공연이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 2015년 12월 영등포아트홀에서 마지막 세 번째 공연을 마주하게 되었다. 소외계층 및 지역문화 활성화 기획공연 선정사업으로 영등포문화재단에서 무료로 지원하는 공연이었다. 사실 이 날은 가장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세 번이나 챙겨볼 정도로 애정이 가는 작품이었지만, 공연장과 관객들로 인해 통 집중이 되지 않았었다. 먼저 판소리와 같은 마당극은 소극장이나 무대가 객석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있어야 마련인데 영등포아트홀은 굉장히 넓고 객석 수도 많은 대극장이어 적합하지 않았다. 무대와 객석 간의 거리도 멀어 눈이 나쁜 나는 배우의 표정이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조명도 이전에 space111이나 풍류사랑방처럼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세세한 변화를 주지 못하고 모 아니면 도처럼 확 켜지고 확 꺼져 눈이 금방 피로해졌다. 나의 편견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무료로 상연되는 공연이다 보니 관객들의 관람태도도 확연히 달랐다. 공연이 시작한 이후에 늦게 입장하는데도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기척을 냈고, 차라리 조는 것은 괜찮았지만 같이 온 일행과 끊임없이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여간 보기 좋지 않았다. 가족 단위로 우르르 와서 그런지 꽤 어린 아이들도 많았는데 시도 때도 없이 시끄럽게 떠들고 심지어 객석 사이를 돌아다니기까지 했다. 그래도 배우들의 역량이 뛰어나 무사히 공연을 마치긴 했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았었다.


  쓰다 보니 하소연이 길어진 것 같은데 이번 일로 공연은 완성되어 배우들만이 이끌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같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나 또한 나도 모르게 공연에 영향을 주었을 관객들 중 한 명이었을 텐데, 되도록 좋은 영향을 주는 관객이었으면 좋겠다.
 
 
 
아트인사이트 태그.jpg
 
 
[김정연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0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