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가끔은 잡다해도 좋아요 -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문학]

잡문집 = '잡다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
글 입력 2015.12.27 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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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상실의 시대' (원제: 노르웨이의 숲)였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 적잖이 갸우뚱했던 기억이 납니다.
소설이 별로였다는 건 아니지만
당시의 제가 받아들이기엔 조금 어렵고 난해한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순전히 '아, 일본 대표 작가의 소설 한 권쯤은 읽어봐야겠지'라는 생각에
한적한 주말의 도서관에서 무심코 꺼내들었던 이 책을 끝으로
그렇게 저는 하루키의 책과 잠시 거리를 두게 됩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지난 가을,
우연찮게 주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이런 말을 스치듯 듣게 되었습니다.


"하루키의 소설은 나한텐 어려웠는데, 에세이는 정말 좋았어."


'하루키의 에세이가 어떻길래?'라는 생각에,
'상실의 시대'를 무심코 꺼내들었었던 그 때처럼
작가의 에세이 목록을 무심코 살펴보던 중 유난히 한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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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은 1979년부터 2010년까지 써온 다양한 글 가운데 저자가 직접 엄선한 69편의 미발표 에세이, 미수록 단편소설 등을 엮은 책이다. 저자가 들려주는 진지한 문학론에서부터 번역가로서 저자가 들려주는 감각적인 번역론, 음악애호가로서 들려주는 깊이 있는 재즈론 그리고 인생론과 독서론까지 고스란히 담겨있다. 기존의 하루키 스타일을 오롯이 담아내면서도 새로운 하루키의 세계를 보여주는 이 책은 어느 정도 날것인 형태로 스스로를 표현하거나 픽션이라는 형식으로는 다 주워 담을 수 없는 세상사를 소재로 한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저자의 글과 함께 저자의 오랜 지기지우인 안자이 미즈마루와 와다 마코토의 해설 대담을 통해 우리가 모르는 저자의 면모를 만나볼 수 있다.




'잡문집'이라는 말이 저는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잡다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
이전까지 제가 읽은 하루키의 작품이라고는 '상실의 시대'가 전부였지만
잡문집을 통해 들여다본 하루키는 작가로서나 인간적으로서나 상당한 매력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마음에 많이 와닿았던 구절들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합니다.




소설가란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인간입니다. -19p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나는 굴튀김이 먹고 싶었고, 그리고 이렇게 여덟 개짜리 굴튀김을 음미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짬짬이 맥주까지 마실 수 있다. 그런 것은 한정된 행복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당신은 말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최근에 내가 한정되지 않은 행복을 맛본 게 언제였을까?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한정되지 않은 것이었을까? -34p





우리는 실은 적당히 정리된 차용물인 자신과 차용물은 아니지만 잘 정리되지 않는 자신과의 기묘한 틈바구니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명확하게 어느 한 쪽을 따를 수도 없고, 어느 한 쪽을 따르겠다는 결심도 못한 채 '보통 사람'으로 어정쩡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56p





그러나 무엇이 어떻게 변화하든 이 세계에는 책이라는 형태로밖에 전할 수 없는 생각과 정보가 변함없이 존재합니다. 활자로 된 이야기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영혼의 움직임과 떨림이 변함없이 존재합니다. 나는 그것을 믿고 지난 삼십년 간 꾸준히 소설을 써왔습니다. ... 제아무리 곁가지가 거세게 흔들려도 근본의 확고함에 대한 믿음이 지금껏 나를 지탱해왔다고 생각합니다. -78~79p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 -91p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한 사람 사람에게는 실감할 수 있는 살아 숨쉬는 영혼이 있습니다. 시스템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시스템이 우리를 이용하게 놔둬선 안됩니다. 시스템이 우리를 만든 게 아닙니다. 우리가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94p





어느 시대 어느 세대든 음악을 정면으로 정면으로 진지하게 듣고자 하는 사람이 일정 숫자는 있을 테고, 그것은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휴대전화로 읽는 시대가 되어도 계속 종이책을 사서 읽을 거라 생각합니다. 세간의 대다수 사람들은 그때그때의 가장 편리한 매체로 흘러갈지 모르지만, 어느 시대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 확실하게 존재합니다. 전체의 십 퍼센트쯤 될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108p





1) 우리는 결국 불안정하고 폭력적인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2)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220p





원래 남의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니까. 말하는 데 별로 자신이 없어서 누가 인터뷰하자고 오면 긴장해서 말을 제대로 못할 때가 많은 편이다. (대체로 자기 생각을 유창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은 굳이 고생해가며 소설을 쓰지도 않는다.) 대신에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그 중에서도 보통 사람이 들려주는 보통 이야기가. -251p





그래도 단 한 가지 눈에 보이게 변화된 점이 있다. 전철에 타면 아주 자연스럽게 주위 승객들을 둘러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있는 이 사람들 모두가 각자 심오한 인생을 사는구나' 라고 생각한다. '그래,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고독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고독하지 않다'라고 생각한다. 이 작업을 하기 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그것은 단지 전철이요, 단지 '낯선 타인'일 뿐이었다. -253p





나는 명백한 결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일상에서도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424p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은
제가 하루키의 에세이에 매력을 느끼도록 만들어준 계기이자 입문 책입니다.

잡문집을 읽으며
'아, 나도 언젠가는 나만의 잡다한 글들을 엮은 잡문집을 내보고 싶다'는
꿈도 가지게 되었죠.

이번 글의 다음으로 소개하게 될 하루키의 '라디오 시리즈'는
잡문집보다 훨씬 가볍고 소소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잡문집'은 인사말, 메시지, 음악에 관한 글,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 번역론, 인물론, Q&A 등
다양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
하루키의 작가로서의 면모를 조금 더 자세히 엿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차례차례 만나게 될 하루키의 작품들이
저에게 또 어떤 영감과 감동을 줄지, 벌써부터 많은 기대를 가지게 만드는,
잡다하지만 그만큼 알차고 가치있는 책이었습니다.





참고 자료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비채, 2011
인터넷 교보문고 -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94343501&orderClick=LAG&Kc=
인터넷 교보문고 -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37463105&orderClick=LAH&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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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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