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 내 마음 가장 가까운 예술 [문학]

글 입력 2015.12.1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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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내 마음 가장 가까운 예술


  나는 시(時)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많은 시들을 보아왔지만 오직 교과서와 시험지를 통해서였다. 국어 시간은 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시를 감상할 권리를 박탈 당하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시를 처음 만남과 동시에, 시와 눈을 마주칠 새도 없이, 선생님의 노련한 지도에 따라 그것을 해부해야 했다. 그렇게 만난 시는 그야말로 시신을 마주하는 것, 죽은 것이었다. 펜이라는 이름의 칼을 들어 ‘어둠=죽음, 절망’와 같은 편협한 잣대로 배를 가르고 그 속을 들여다 보며 문제를 풀기 위한 단서만을 찾아 헤맸다. 그곳엔 어떤 교감도 소통도 없었다. 하지만 20살이 되던 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우연히 시 한편이 눈에 들어왔다.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안도현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
 
 
강은 물소리를 들려주었고

물소리는 흰새떼를 날려보냈고
 
흰새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
 
눈발은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은 강을 만들었다
 
너에게 가려고





  지금 생각하면 그저 부끄럽지만, 그때는 나름대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난생 처음 겪은 이별은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만 같았고, 심한 자책감에 시달렸다. 그런데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는 이 모순적인 문장들로부터 농도 짙은 위로를 찾았다. 누군가에게 닿고 싶지만 강을 만들 수밖에 없는, 강을 두어야 멀리서나마 너를 볼 수 있는, 애타는 마음으로 강 건너편을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짧은 영상처럼 스쳐지나 갔다. 이 단어는 이런 의미고 시인이 살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아주 자연스럽고 본능적으로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이 맞고 틀린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반응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 혼자가 아니라는 것. 시를 통해 난생 처음 느껴본 경험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마주 친 살아있는 시의 눈이었다.


  이후로 시는 내 마음을 읽어내고 동시에 더 잘 보여주는, 내 마음 가장 가까운 예술이 되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시를 찾아 읽고 심지어 직접 시를 쓰기까지 했다. 수려한 문장도 심오한 철학적 의미도 없었지만 시는 내 마음 그 자체였기에, 적어도 내게는 완전한 것이었다. 아래의 시는 직접 쓴 것인데, 아버지를 향한 마음을 시로 읽어내고 풀어 써본 것이다. 투박하고 진부하지만 내겐 어느 좋은 시 못지 않게 의미 있는 한 편이다.





늦은 밤 TV 앞엔
사극 한 편 보며
호로록 후루룩
후루룩 호로로록
우리 아빠 입속으로 
면발 들어가는 소리가 
TV 소리 보다 유난히 더 크게 들리는
호로록 후루룩
후루룩 호로로록
나는 한 가닥의 면발 되어
호로록 그 속으로 들어가
들여다보고
귀 기울이고 싶어라
오늘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고된 일이라도 있었던 건 아닌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못난 딸의 속 진심
끝내 닿지 못할 웅얼거림
혹시 닿을까 하고

-20150910 늦은 10시 15분, 아버지





오늘 하루 스스로에게 위로가 필요하다면, 
당신 마음 가장 가까이서 그 마음 읽어주는 시 한편, 어떨까?


[윤정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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