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절망을 넘어선 예술가, 프리다 칼로 展

글 입력 2015.06.23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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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_절망에서 피어난 천재 화가 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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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체육진흥공단과 조선일보사 공동주최로 소마미술관에서 오는 6월 6일부터 9월 4일까지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외 멕시코 작가 10인의 작품 총 100여점을 소개하는 “프리다 칼로_절망에서 피어난 천재 화가”展을 개최합니다. 

본 전시는 20세기 초현실주의 작가 프리다 칼로의 절망적인 삶과 사랑에서 예술혼으로 피어난 멕시코 국보급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의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와의 사랑과 예술적 동맹, 멕시코의 혁명사와 시대상 등을 총체적으로 살펴 볼 수 있는 당대 멕시코 작가들의 작품을 포함, 회화, 드로잉, 사진 및 영상 등 총 100여점 작품을 선보입니다.

특히 프리다 칼로의 인생을 모티프로 한 영화 <프리다>와 다양한 다큐멘터리 영상, 프리다 칼로가 사용하던 장신구와 재현된 의상 등을 포함하고 있어 흥미로운 감상이 가능한 전시입니다.





다들 잘 아시는 멕시코 작가 프리다 칼로는 짙은 눈썹과 관람자를 꿰뚫어보는 듯한 정면응시가 유명한 작가죠.

그녀의 화풍은 누구나 알지만 그녀의 기구한 인생은 자세히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건데요, 이번 전시는 그녀의 삶을 따라 진행되는 전시이기 때문에 이해가 잘 되실거에요 :)

전시 흐름을 살펴볼까요!



▶1 전시실 : 비둘기와 코끼리 (연표, 사진, 영상)

“내 인생에 두 번의 대형사고가 있었다. 하나는 전차 사고이며 다른 하나는 디에고이다.”-프리다 칼로-


칼로와 리베라, 비둘기와 코끼리의 결혼 전후 연표, 사진, 영상을 통해 본격적인 관람 전 작품의 이해를 돕는 코너입니다.

비둘기와 코끼리. 그만큼 프리다는 디에고에 비해 작고 마른 아가씨였고 디에고는 커다란 키에 뚱뚱한 몸집의 아저씨였습니다. (리베로는 칼로와 결혼하기 전 두번이나 결혼을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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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전시실 : 절망에서 피어난 천재 화가

“나는 아픈 것이 아니라 부서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 살아있음이 행복하다.”-프리다 칼로-


6살 때 앓았던 소아마비의 증상으로 오른쪽 다리가 불편했지만 칼로는 영리한 소녀였습니다. 멕시코 명문학교에서 의사의 꿈을 키워오던 프리다칼로는 18세 때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바로 칼로가 탄 버스와 전차가 충돌하며 그녀의 몸이 크게 다친 것인데요,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했을 만큼 큰 사고였다고 합니다.

그 사고로 인해 병상에 누워만 있어야 했던 칼로는 화가라는 새로운 꿈을 꿈꾸게 됩니다. 

“프리다 칼로의 예술은 폭탄을 둘러싼 리본이다.”-앙드레 브르통-

 칼로의 작가로서의 공식 경력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12년만인 1938년에 멕시코시티 대학 갤러리 그룹전에 처음으로 출품했다가 프랑스 초현실주의 미술가인 앙드레 브르통의 찬사를 받으면서부터 입니다. 1939년 파리에서의 전시를 통해 만난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칼로의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피카소도 감동하여 우정의 징표로 작은 손 모양의 귀고리 한 쌍을 칼로에게 선물했고, 루브르 미술관이 칼로의 자화상1점을 구입함으로써 루브르에 입성한 최초의 남미 여성작가로 기록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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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전시실 : 예술과 사랑

“매 순간 그는 나의 어린아이이자 갓난아기이며, 순간순간, 매일이 내 존재 그 자체이다.”-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를 절망에서 피어난 천재 화가로 만든 또 하나의 에너지원은 디에고 리베라였습니다. 하지만 디에고는 바람기가 다분한 남자였기 때문에 칼로는 육체적 고통에 더하여 정신적 피폐가 작업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게 하였죠. 

1929년, 당대의 인기 벽화작가 디에고 리베라와의 결혼으로 그로부터 수년간 그의 그늘에서 화려한 멕시코 전통 복장을 한 눈에 띄는 외모의 멕시코 여인으로만 각인되었었습니다. 리베라가 미국에서 의뢰받은 벽화작업으로 샌프란시스코, 디트로이트, 뉴욕에서의 외지 생활이 길어지면서 향수병과 외로움에 지쳐 멕시코로 돌아왔을 때 리베라와 동생 크리스티나의 불륜에 절망한 칼로는 이후 혁명가 트로츠키, 조각가 노구치와의 사랑, 동성애 등을 거치며 폭풍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1937-38년에 8년간의 결혼 생활 중 그린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작품을 남긴다. 1938년 뉴욕 전시를 통해 사진가 니콜라스 머레이와 사랑에 빠졌고, 1939년에 파리로 건너갔으나, 열악한 환경으로 장염에 걸렸다가 우여곡절 끝에 화상 피에르 콜르의 갤러리 그룹전에 참여, 관심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나는 디에고를 내 남편이라고 말해 본 적이 없다. 그 단어를 그에게 붙이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는 한 번도 어느 누구의 남편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프리다 칼로-

하지만, 머레이와 결별하고 멕시코로 돌아온 칼로의 작가로서의 성공이 리베라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갈등을 반복하다 1939년 11월에 리베라와 이혼했고 1년 만인 1940년 12월에 재결합합니다. 

 칼로는 종종 자신의 이마에 디에고의 얼굴을 그렸는데, 이는 파괴의 신 시바의 제3의 눈을 상징하는 것으로 자신과 리베라의 관계를 은유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작품이나 일기를 통해 자신과 리베라를 달과 해에 비유했고, 그것은 서로에게 끌리며 존재하나 결코 만날 수 없는 운명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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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전시실


4-1. 예술과 혁명

“고통, 기쁨, 죽음은 존재를 위한 과정일 뿐. 이 과정의 혁명적 투쟁이야말로 지성을 향해 열린 문이다.”-프리다 칼로-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정치적 성향은 한결같이 혁명적이었다. 1910년 멕시코 혁명 이후 멕시코의 정치․사회․경제적 혼란은 가중되었고 노동자, 농민 중심의 소요가 끊이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의 부인이 된 이후 그와 정치적 노선을 같이 하며 많은 거리 시위에 참가하여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심지어는 세상을 뜨기 열흘 전에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리베라와 함께 과테말라의 좌파 대통령 지지 집회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칼로는 고통과 절망의 무게를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는 것으로 떨쳐내려는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작품에서 정치성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다만 스페인 식민시대의 잔재에서 벗어나려는 의식처럼 멕시코 전통의상을 입었던 것 같이, 칼로는 자신의 뿌리를 상징하는 여러 가지 도상들(인디오 여인, 테우아나 의상과 장신구, 멕시코 신화 등)이나 그림에 글씨를 넣는 멕시코 전통 봉헌화의 전형적 구조와 세밀한 표현방식을 통해 민족주의적 성향을 은유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예술은 진실일 때 자연과 하나가 된다. 이것이 원시 미술의, 나아가 대가들-미켈란젤로, 세잔느, 쇠라, 르느와르-의 비밀이다. 내 최고작의 비밀은 그것이 멕시코산이라는 것이다.”-디에고 리베라-

반면, 리베라는 멕시코 벽화 운동의 선봉에서 작품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적극적으로 표현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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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비바 프리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프리다 칼로-


결혼 전에는 심플한 블라우스와 단정한 치마를 즐겨 입었던 칼로는 결혼 후 리베라 취향에 따른 점도 없지 않으나 전략적으로 멕시코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자 전통의상을 입게 됩니다. 

“1954년 7월 13일은 내 생에 있어 가장 비극적인 날이다. 나의 사랑하는 프리다를 영원히 잃었다.   이제서야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일이 프리다를 향한 나의 사랑이었음을 깨달았다.”-디에고 리베라-

 전통 의상을 입은 칼로는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리베라가 말했듯 티티새의 검은 날개같이 짙은 눈썹에 매력적인 눈과 고집스런 입매, 덩치 큰 리베라 옆에서 더 가녀리게 보이던 작은 체구의 칼로는 여러 사진작가의 모델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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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전시실 : 멕시코 근대 미술

멕시코 근대미술을 얘기함에 있어 벽화 운동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멕시코 민중의 예술은 민중의 것이며 위대하다. 또한 민중의 것이기 때문에 집단적이다.” 

 -기술노동자, 화가와 조각가 조합’ <사회, 정치, 미학 선언> 중- 

1930년대 들어서 벽화 작가들의 미국 진출이 두드러졌고, 멕시코 정부는 국내에서는 중앙집권적인 정치적 회유책으로 벽화 운동을 이용하면서 대외적으로는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는 국제적 선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1920-30년대 초 벽화의 주제는 농민혁명을 배경으로 한 혼란한 정치 상황이었고 3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의 산업화 및 기계화의 흐름을 체험한 작가들이 자연스럽게 주제를 산업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옮겨 갔습니다. 1940년대부터 점차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작가들이 부상하였고, 1960년대에 들어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실패 및 경제적, 외교적 환경 변화와 더불어 소수의 벽화 작가들과 몇몇 화가들의 멕시코 미술시장 독점이 젊은 작가들의 반감을 사게 되면서 벽화 운동은 점차 쇠퇴하게 됩니다. 





일자 : 2015. 6. 6.(토) ~ 2015. 9. 4.(금)

시간 : 10:00 - 20:00(도슨트 운영시간 :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4시)
   ※ 마감시간 1시간 전까지 입장 가능

장소 : 소마미술관 1~5전시실

티켓가격 : 
ㅇ 성인(19-64세) : 개인 13,000원 
   ㅇ 청소년(13-18세) : 개인 10,000원 
ㅇ 어린이(5-12세) : 개인 6,000원 
   ㅇ 특별요금(65세 이상, 국가유공자, 단체인솔교사) : 6,000원
   ※ 장애인 : 1~3급 동반 1인까지 무료, 4~6급 특별요금 6,000원
    ※ 단체 : 20인 이상(2,000원 할인), 어린이 단체(1,000원 할인)  
  ※ 만 4세 이하 어린이는 부모 동반 시 무료입장 (단체 5,000원)

주최 : 조선일보, 국민체육진흥공단

주관 : 소마미술관, PIALUX INC, 한솔BBK




문의 : 02-801-7955 (프리다 칼로 전시사무국)


관련 사이트




그녀의 인생을 알고 가면 그림 속 내막을 알고 좀 더 재미있게 관람하실 수 있을거에요.

관람하기 전엔 이런 배경지식을 공부하고 전시장에서는 칼로의 그림체와 분위기만 집중해서 보시는 것을 추천해드립니다 :)

이제 다들 방학을 맞으셨을 텐데요, 좋은  전시와 함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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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유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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