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홉 – 여자를 읽다] 속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바로 여자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여자가 아닌 남편이 있지만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세기 러시아는 가부장적 사회였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귀속되었고 현모양처가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여겨졌습니다. 남편이 일에서 돌아오면 밥을 차려주고 아이를 돌보고는게 일상이었고 남편의 말을 경청하는 수동적인 여성이 되어야지, 독립적이거나 말이 많고 똑똑한 여성은 결혼 기피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이러한 여성상을 원하고 강요한다고 해서 모든 여자가 남편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는 아니었습니다. 겉으로 그렇게 행동할지라도 그 내면에는 꿈틀거리는 욕망을 안고 있습니다. 다만 드러낼 수 없어서 숨기고 있을 뿐 여자들은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탐했고, 끊임없이 자유와 일탈을 꿈꿨습니다. 본 공연은 ‘불륜’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그 안에서 액자소설처럼 서로 다른 4개의 에피소드를 연이어 선보입니다.

처음 무대에 조명이 켜지면 늦은 밤 교회를 배경으로 한 여성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점점 한 두 명의 여자가 모입니다. 잠옷 위에 숄만 걸친 미인도 있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귀족 부인도 있습니다. 보따리를 바리바리 들고온 여자고 있고요. 그들은 불안한듯 서로의 행색을 살피며 몸을 최대한 등지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합니다. 뭔가 비밀스럽습니다. 결국 좁은 의자에 옹기종기 앉아 기차를 기다리던 도중 한 여자가 외칩니다. ‘어휴, 술 냄새!’ 과연 그들은 왜 이 한밤중에 술을 마시고 어디를 가려고 기차역에 나와있는 걸까요? 의심스러운 이 세 여자의 뒷이야기가 4개의 에피소드에서 설명됩니다.



두번째 에피소드 [나의 아내들]은 라울 시냐 보로다라는 자신의 7명의 아내를 살해한 사나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기괴한 살인마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오페라로 만들어졌고 그는 이를 인정못한다며 편지를 씁니다. 극은 편지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놨습니다. 설명 어조로 쓰인 대사는 첫번째 에피소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서간체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라울은 아내를 죽인 것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고 따라서 자신은 악극무도한 살인자는 아니라고 설득합니다. 아내가 파리처럼 자신에게서 붙어서 떨어지지 못했다, 말이 너무 많았다, 너무 똑똑했다, 바람을 피웠다, 사치가 심했다, 노래를 너무 많이 불렀다 등등. 그의 아내들은 모두 사소하지만 귀찮거나 짜증날법한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은 문제점들은 ‘고작 이런게 살인 동기였어? 저게 무슨 희대의 살인범이야?’ 라는 생각을 갖게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문제로 아내를 총 7명이나 살인했다는 점이 소름끼칩니다. 결혼이란 본래 사랑을 전제로 하고 서로 사랑한다면 충분히 이해가능한 문제들입니다. 하지만 그는 왜 살인이라는 치명적인 방법으로 이를 해결해야했을까. 바로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내들]은 사랑이라는 감정 없이 오로지 서류 계약으로만 얽힌 19세기 러시아의 결혼과 여자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하나라도 이에 맞지 않으면 비난의 대상이 되버리는 남성중심적 사고방식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번 씬에서 암전이 흥미로웠습니다. 라울이 편지를 다 쓰고 책상 위 촛불을 끄는 순간 암전이 됩니다. 외부에서 연출자가 아닌 주인공이 직접 암전을 하는 설정이 극의 흐름상 자연스러웠고 인상깊었습니다.

세번째 에피소드는 유부녀 아가피아와 사프카의 불륜을 알게된 ‘나’라는 세 인물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아가피아는 사프카에게 빠져서 먹을거리를 듬뿍 싸들고 그가 낚시를 하는 곳까지 찾아오지만, 기차소리가 들리면 남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합니다. 사프카의 작은 행동에도 설레고, 그의 관심과 사랑을 구걸하는 아가피아의 모습은 처절합니다. 하지만 사프카는 시종일관 무관심합니다. 결국 아가피아는 그의 관심을 얻기 위해 하룻밤을 지새우기로 결심합니다. 다음날 아침 그녀를 찾는 가족들의 목소리에 허둥지둥 도망치는데 사프카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부엉이 소리가 나는 오카리나를 불어봐도 그는 미동하나 없습니다. 여자가 사랑을 위해 위험을 무릅썼지만 남자는 잠깐의 잠자리에만 관심을 가질 뿐, 낚시와 사냥 생각뿐입니다. 여자는 물고기나 꾀꼬리보다 못한 존재일까요? 아가피아가 불었던 오카리나는 부엉이가 짝을 찾을 때 내는 소리와 비슷합니다. 날 좀 바라봐줘요. 나 여기있어요! 날 사랑해줘요! 그녀는 차마 입으로 꺼낼 수 없는 그 말을 오카리나로 대신 전하려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숲속에서 메아리로 사라져버리고 그녀는 결국 기차역으로 도망칩니다.



이렇게 세 명의 여자가 모이게 된 것 입니다. 에필로그에서 그들은 서로 감자를 나누어먹으며 잠깐 말을 눈빛을 주고받습니다. 서로의 사정을 모르는 데도 마치 서로에 대해 이해를 하는 듯한 그들의 모습은 애틋합니다. 마지막으로 [나의 아내들]의 주인공 라울이 기차역에 나타나면서 극은 막을 내립니다. 혹시 그의 8번째 아내가 그 자리에 있지는 않을까 상상력을 도발합니다.
네 가지 다른 에피소드는 마치 같은 날 밤 일어난 사건처럼 재구성되었습니다.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여자들 세 명은 모두 가정을 가진 여자이고, 남편 외 다른 남성을 사랑하거나 혹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결혼생활에서 상처를 받았고 이를 도피라는 떳떳하지 못한 행위로 해결합니다. 19세기 러시아에서는 여자로서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은 욕망으로 여겨졌고, 이는 감히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것입니다. ‘파우치’ 속에 꼭꼭 숨겨서 나만 보다가 결국 밖으로 표출되어버리지만 이마저도 적극적인 관계의 개선이 아니라 소극적인 태도로 끝나버립니다. 결국 여자들은 러시아의 가부장적 사회에 반항하려고 시도했지만 굴복하고만 것 입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공연이었습니다. 많이 개선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가부장적 결혼 관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고, 시대에 관계없이 사랑과 관심에 대한 열망은 존재한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두 배역씩을 소화하는 배우들의 명연기 또한 인상깊었습니다. (사실 일리인 역을 맡았던 고훈목 배우의 발음이 약간 신경쓰였지만요 ㅠㅠ) 특히 이재영 배우와 윤성원 배우가 기억에 남습니다. 이재영 배우는 [약사의 아내]에서 눈치 제로의 군인 역할의 재미있게 소화하면서 극의 분위기를 띄어주었고, [아가피아]에서는 무관심한 한량의 역할을 완벽하게 보여줬습니다. 윤성원 배우는 [나의 아내들]에서 7명의 아내들을 상대하는 라울 역을 하면서 때로는 거들먹거리고, 무시당하고, 노래하고, 윽박지르는 다양한 매력을 발산했습니다. 연출적으로는 조명과 암전 음악이 매우 좋았습니다. 특히 암전이 알맞은 시점에 있어서 각 에피소드가 깔끔하게 마무리되었고, 음악은 19세기 러시아 특유의 분위기를 잘 표현해주었습니다. 또 프롤로그와 에피소드를 통해 서로 다른 네 가지 에피소드를 하나로 묶는 시도도 흥미로웠습니다. 마치 액자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도 들었고 비슷한 아픔을 지닌 주인공들이 한 곳에 모인 상황이 웃기면서도 안타까웠습니다. 이제 그녀들이 어디로 향할지, 새로운 사랑과 자유를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추가 : 세실극장 공연의 장점은 바로 근처에 볼거리가 많다는 점입니다. 조금만 걸으면 덕수궁과 서울 시청, 명동, 청계천이 있어서 공연이 끝나고 잠시 산책을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