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4」에 이어 바로 「멋진 신세계」를 읽었다. 두 책 모두 디스토피아소설이고, 전하려는 궁극적인 메세지는 같지만 그 방식과 느낌이 많이 달랐다. 재밌게 읽었고, 감상을 남기고 싶었다.
"나는 불행하고, 병들고, 아파할 자유가 있다" 책 후반부에 나오는 주인공 존의 대사다. 저 문장만 놓고 봤을 땐 모두 의아해 할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행하고 싶지도 병들고 싶지도 또 아프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장을 모두 덮고 나면 그 불행의 권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올더스 헉슬리가 그린 멋진 신세계의 세상은 이렇다. 전쟁과 질병이 없으며 사람들은 각자 정해진 알파,베타,델타,감마,엡실론의 위치에서 만족해하며 살아간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 놨다. 어머니의 배가 아닌 '병'에서 태어났기에 가족의 개념이 없다. 어머니라는 단어는 사랑과 더불어 외설과 혐오의 상징이다. 즐거움을 빼고는 그들은 풍부한 감정을 느끼지 않지만 일체의 부자연스러움은 소마라는 마약 물질로 통제한다. 일정 계급의 얼굴과 신체조건은 모두 같다.
주어진 최대의 행복과 행불행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 이 책에선 이를 논하고 있다. 책을 읽는 초반에는 전자가 더 매력적이기 마련이다. 미개인 지역에서 자라난 존도 전자의 세상을 멋진 신세계라고 표현했다. 모두 행복하고 깨끗한 세상, 그야말로 정말 멋지고 새로운 세계가 아닌가.
이토록 멋진 세계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발전된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정을 통제하는 기술, 늙지 않는 기술, 얼굴과 신체조건을 동일하게 하는 기술 말이다. 그들이 계획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체계적으로 공장을 운영한다. 행동조절관리 부서, 약물주입관리 부서와 같은 길고 난잡한 이름들이 세상을 이끄는 요직이 된다.
하지만 이 세계를 만든 포드 총장은 기술로 세계를 세웠음에도 한켠으로는 이를 경계한다.
책이 끝을 달려갈수록 어느새 우리는 존이라는 인물에 감정을 이입한다. 사람의 죽음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아이들의 모습과 소마를 배급 받기 위해 줄 서있는 수 십명의 같은 얼굴들에 소름이 끼친다. 우리 또한 미개인 존처럼 어머니가 있으며, 늙고, 사랑을 하는 미개한 존재이기 때문에.
여느 디스토피아 소설이 그렇듯 주인공의 말로는 비극적이다. 개인이 세계를 이길 수 없으니 말이다. 존이 그들에게 자유를 주려 했던 행위는 어쩌면 평생을 사육된 말에게서 갑자기 사료를 빼았고 들판으로 내보낸 것과 다름없었다. 말은 다시 돌아오고, 사료를 되찾기 위해 빼앗은 사람을 공격한다. 사육된 말의 세상은 우리 안이 전부고, 사료가 유일한 식량이다. 그럼 그것을 정말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가축이다. 멋진 신세계의 인물들 또한 그렇다. 스스로 문명인이라 자부하는 레니나, 버나드, 헬름홀츠 등 그저 녹슬지 않는 깨끗한 기계에 불과하다.
행복의 요건은 사람 모두 다르다. 기술로 모든 행복을 충족시킬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차가운 밤공기를 쐬며 혼자 걷는 것이 큰 행복이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햇살 좋은 날 잔디 위에 누워 낮잠을 자는 것이 행복이라고 한다.
멋진 신세계의 문명인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애초에 그것을 행복이라고 느끼도록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행복이라는 마음이 없다. 그들이 행복이라고 착각했던 건 정확히 쾌락이었다.
모두 다른 인간의 행복을 기술로 채울 수 없음을 알기에 인간다움을 없애고 행복의 기준을 정한 것,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이 더는 인간이 아닌 세상이 된 것. 머지 않아 정말 이렇게 될 수 있는 우리의 진짜 세계를 올더스 헉슬리는 이를 멋진 신세계라는 역설적인 제목으로 비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