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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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도서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에 대한

내용 일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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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지하철에서 펼쳤다. 무릎 위에는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이 놓여 있었다. 열차가 한 번 흔들릴 때마다 책을 보던 고개도 조금씩 아래로 떨어졌다. 책장은 더 넘어가지 않았다.


내용이 졸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열차를 놓칠 새라 금세 뛰어온 탓이었다. 커피도 마시지 못했나 보다. 대단한 독서 의지를 가지고 앉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일단 자리에 앉았고, 책을 펼쳤고, 그러다 잠이 온 사람에 가까웠다.


누가 볼까 조금 부끄러웠을지도 모르지만 쏟아지는 잠을 누가 말리겠나. 결국 고개는 하얀 벽에 기대어졌고, 책은 무릎 위에 펼쳐진 채 그대로 있었다. 다음 장을 넘길 때에도 나는 여전히 지하철 안에 있었다. 마지막 장을 읽을 때쯤에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책을 다 읽은 것은 한낮이었다. 그런데 내가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새벽이 다 되어서였다.


아, 나는 뭔가를 잃어버렸구나.


‘잃어버렸다’는 “가졌던 물건이 자신도 모르게 없어져 그것을 아주 갖지 아니하게 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다. 분명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없어지는 상태. 없어졌다는 사실도 바로 알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야 빈손을 내려다보게 되는 상태. 멋지게 말하면 상실이고, 그냥 말하면 관리 부실에 가깝다. 아무튼 나는 이 책을 읽고 그런 쪽의 말을 떠올렸다.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은 음성해설에 관한 책이다. 저자인 서수연 작가는 20년 넘게 음성해설 작업을 이어 온 직업인으로 드라마와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7,800여 작품의 음성해설을 써 왔다.


음성해설은 시각장애인도 드라마나 영화, 공연, 전시 같은 작품을 함께 감상할 수 있도록 장면과 상황을 말로 옮긴 뒤 소리로 제공하는 방식이다. 화면에는 표정이 지나간다. 말없이 놓인 물건도 있다. 장면은 바뀌고 움직임은 스친다. 설명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 버리는 것들이 있다. 음성해설은 그것들을 필요한 만큼 고르고 말로 옮긴다. 그리고 소리로 건넨다.


책은 그 과정을 어렵게 풀지 않는다. 작가가 지나온 현장과 선택을 따라가게 한다. 어떤 장면을 말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무엇은 남겨 두어야 하는지.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음성해설이라는 낯선 분야가 조금씩 구체적인 얼굴을 갖는다. 한 직업인의 기록처럼 읽히다가도 어느 순간 한 사람이 오래 붙들어 온 시간의 기록처럼 보인다.


색에 관한 이야기도 선명하게 남았다. 시각장애인이 색을 시각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색에 얽힌 개념과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향유할 수 있다는 대목이었다. 누군가에게 핑크색과 보라색은 단순한 빛깔이 아니라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가 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색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었다. 색은 감정이고 상징이며 사람들과 부대끼며 배워 가는 개념에 가까웠다. 빨강을 뜨겁게, 파랑을 차갑게 느끼는 일도 처음부터 주어진 감각이라기보다 오래 쌓인 문화적 약속에 가까웠다. 내가 당연하게 본다고 생각했던 것들 역시 많은 말과 관계 속에서 배운 것인지도 몰랐다.


책의 표지를 넘기면 한쪽에 QR코드가 있다. 음성해설로 향하는 코드다. 책 표지에도 음성해설이 있다고? 신기한 마음에 핸드폰 카메라를 가져다 댔다. 화면이 바뀌고 이어폰을 꽂자 목소리가 나왔다.


나는 책 표지를 다시 바라보았다. 표지는 이미 눈앞에 있었다. 분명 보고 있었다. 그런데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색과 모양이 들어왔다. 글자의 자리도 보였다. 방금까지 지나쳤던 요소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렇게 생겼었지.


보고 있던 것을 다시 듣는 일.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을 목소리로 다시 확인하는 데에는 얼마나 많은 품이 들까. 음성해설은 볼 수 없는 사람을 위한 설명이면서, 보고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도 다시 보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던가.


책에는 음성해설이 실제로 마주하는 난점도 등장한다. 화면 속 인물이 “저거”, “이쪽”, “저 사람” 같은 말을 할 때, 시각장애가 없는 사람은 손짓이나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며 정보를 완성한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에게는 그런 단서가 그대로 닿지 않는다. 그 빈틈을 채우기 위해 음성해설이 필요하다.


문제는 대사가 계속 이어질 때다. 해설을 넣을 틈조차 없을 때, 작가는 짧은 사이에 필요한 정보를 넣어야 한다. 장면을 말로 옮긴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촘촘하고 난감한 일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오래전의 내가 자주 떠올랐다. 코로나가 오기 전이었다. 대학교 4학년을 마치고 졸업 유예를 하던 시절이었다. 반쯤은 충동적으로, 어느 정도는 내 분에 내가 못 이겨 드라마 작법 수업을 듣던 때였다. 초급반은 온라인으로 들었고, 중급반 수업을 들으러는 마포를 오갔다. 온라인 화상 강의 마지막 피드백 시간에는 난잡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의 나는 꽤 정성을 들였다. 완성도 있는 대본을 만들었다는 생각 안에 있었다. 내가 듣게 될 말도 어느 정도 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혼자 질문도 하고 답도 정해 놓은 사람처럼 앉아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전혀 다른 말을 마주했을 때 강의가 끝난 뒤 꾹꾹 서러워했다. 지금 돌아보면 뭐가 그렇게 섭섭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좋아했기 때문에, 조금 우스울 만큼 정성을 들였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밤새 사건을 고민하던 시간이 있었다. 주인공의 성격을 다시 썼다. 빈 문서 앞에서 메모를 들여다봤다. 머릿속에만 있는 행동을 장면으로 옮기려고 했다. 문장을 지웠다가 다시 썼다. 한 사람의 움직임을 어떻게 보여 줄지 오래 생각했다. 고통스러웠고 동시에 정성스러웠다. 문제는 정성이 있었다고 해서 계속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또한 별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현재의 나는 그때 하던 것을 멈추었다. 나는 그 자리에 남았고, 저자는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며 계속 나아갔다. 책 속의 저자는 현장에 간다. 대본을 쓴다. 낭독한다. 고친다. 다시 확인한다. 음성해설이라는 영역 안에서 헤매고 배우고 버틴다. 그러면서 자기 자리를 조금씩 넓혀 간다.


책을 읽으며 무언가를 오래 붙들고 가는 사람을 바라볼 수 있어 즐거웠다. 밀고 나가는 힘. 사랑할 대상을 만난 사람. 좋아하는 것으로 자기만의 소속을 만든 사람. 그런 장면들을 읽을수록 책은 음성해설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내가 멈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읽는 사람의 손, 접어 둔 페이지 같은 것들이 눈에 밟혔다.


아, 나는 지금 떠다니고 있구나. 뭔가를 잃어버렸다. 그걸 이 책을 보고 알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책 속의 다른 문장들도 조금씩 내 쪽으로 기울었다.


책을 많이 읽으라는 말에서는 조금 웃었다. 결국 또 책이었다. 책을 봐야 하는데. 책을 봐야 하는데. 지하철에서 졸던 사람에게 돌아온 말이 책을 많이 읽으라는 말이라니. 얄미운데 맞는 말이었다. 읽지 않고는 쓰기 어렵고, 듣지 않고는 적기 어렵다. 너무 당연해서 피하고 싶은 말들이 있다. 당연한 말은 대체로 맞고, 맞는 말은 대체로 얄밉다.


읽고 적는 일의 기본으로 돌아오자, 음성해설의 방식도 다시 문장의 문제로 다가왔다.


음성해설은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는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비워 둘지 고른다. 장면을 너무 빨리 해석하지 않는다. 내가 본 것을 전부라고 믿지 않는다. 필요한 만큼 말하고 남겨 두어야 할 것은 남겨 둔다. 그 조심스러움은 문장을 고르는 방식과도 닮아 있었다.


객관성에 관한 이야기도 생각할 거리를 남겼다. 화면 속 인물이 기뻐하는 얼굴을 하고 있을 때, 그 얼굴을 어디까지 말해야 객관적인 묘사일까.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하나하나 말해야 할까. 아니면 “활짝 웃는다”, “기쁜 얼굴을 한다”고 적어도 될까.


시각장애가 없는 사람은 그 표정을 한순간에 알아차리지만, 음성해설 작가는 그 순간을 말로 골라야 한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줄일지. 어디까지가 묘사이고 어디서부터 해석인지. 그 질문은 문장을 쓰는 일과도 닮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도 계속 소리를 따라가며 적고 있지 않은가. 지나간 소리에 뒤늦게 문장을 붙이고, 제대로 봤거나 잘 들었다고 쉽게 말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써 놓고도 정작 나는 자주 잊고 있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것은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돌아보지 않는 동안 접혀 있었을 뿐이구나.


초고를 한 호흡에 써 내려간 뒤 일부러 거리를 둔다는 대목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든 이틀이든 다른 일을 하며 머리를 환기한 뒤 다시 화면과 대본을 맞춰 본다는 말이었다. 그래야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감정선도 보이고, 오류와 오타도 더 잘 잡을 수 있다고 했다.


나도 조금은 아는 감각이었다. 한 번에 쏟아 내고,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 어제의 문장을 오늘 조금 낯선 눈으로 보는 일. 쓰는 동안에는 몰랐던 것이 시간이 지난 뒤에야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그 대목이 유난히 반가웠다.


책을 다 읽어 갈 무렵, 작년 여름에 쓴 글 하나가 떠올랐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듣고 썼던 글이었다. 다시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 페이지를 뒤적거렸다.


 

모양은 물빛과 닮았다.


이 숨의 흐름은 물에서 빛으로, 빛에서 소리로 이어진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여러 연주로 들었을 때 각각의 첫음은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떤 인사는 노련했다. 어떤 인사는 경쾌했다. 어떤 인사는 감미로웠다. 우아한 인사도 있었다. 쫀쫀하고 깊은 인사도 있었다. 그중 내가 좋아하는 인사는 조금 달랐다. 그냥 지나가지 않으려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세 발치쯤 떨어진 자리에서 서서히 다가온다. 갑자기 품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멀리서부터 조금씩 가까워진다. 다정하지만 다정하다고 먼저 말하지 않는 소리였다. 사랑을 논하는데 시선은 내 쪽에 없다. 대각선 어딘가를 보고 있다. 그래서 더 좋다. 나를 향해 달려오지 않아서 오히려 내가 그쪽을 오래 바라보게 된다.

 

 

다시 읽어 보니, 그때의 나는 이미 무언가를 해설하고 있었다. 눈앞에 없는 소리의 모양을 붙잡으려 했고, 들은 것을 다 안다고 말하지 않으려 했다. 좋아한다고 곧장 달려들기보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 소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바라보려 했다. 그것이 정확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적어도 그때의 나는 들은 것 앞에 오래 앉아 있었다.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던 사람은 거실에 앉아 있다. 한낮에 다 읽은 책이 새벽까지 따라와 있다.


처음에는 음성해설이라는 낯선 분야에 관한 책을 읽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장을 덮고 나니 내가 보고 듣고 쓴다고 믿었던 장면들이 조금씩 다시 놓여 있었다.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은 음성해설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한 직업인의 기록으로도 흥미롭고, 말을 고르는 방식에 관한 책으로도 읽힌다. 문장을 자주 만지는 사람에게도, 누군가의 장면을 조금 더 조심히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권하고 싶다.


한낮에 다 읽고도 새벽이 되어서야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내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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