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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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은 ‘의미에의 의지’를 명확히 구분된 단어로 정의했다. 핵심은 의미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의미를 경험했기 때문에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된 사람이라는 점이다. 여러 현상을 끌어안은 사회를 곰곰이 곱씹으며 둘러보면, 신체적 고통은 과거에 비해 비교적 덜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결과의 ’비례’를 입증하듯이 사람들의 정신적 괴로움은 점차 증가하였고, 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병원에 입원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프랭클은 이를 인간의 오래되고 영원한 형이상학적 욕구가 배후에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과거라면 성직자를 찾아갔을 법한, 어쩌면 지금도 성직자의 영역에 속해야 할 고민을 안고 신경정신과 의사를 찾아간다. 사회가 풍족해졌기 때문일까, 틀림없이 넉넉한 살림은 원천적인 토대가 될 것이다.


 

외로운 일요일 ‘Einsamer Sonntag', 이것은 애달프기로 악명 높은 유행가의 제목입니다.

이 노래가 악명 높은 것은 바로 이 노래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요일은 대부분 사람에게 표면적으로, 그리고 내적으로도 명명할 수 있는 공식적인 휴일이다. 직장인, 학생을 포함한 많은 이들은 휴식을 취하고 몸과 마음을 재정비하며 월요일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일요일 신경증’과 ‘권태’, 나는 이를 잘 알고 있다. 황량하고 공허한 감정,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해지는 삶의 의미를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 자그맣게 모락거리기 시작하여 끝내 마음을 전부 삼키고 지배하는 듯하다. 그렇게 사람의 몸과 마음이 공허라는 경이한 존재가 지배하는 꼭두각시로 몰락한다.


정말 기묘하게도 최근 나는 이에 부합하는 경험을 겪었다. 1학기를 마치고 종강을 기념하여, 계절학기 시작 직전까지 꿀 같은 휴식을 고대했다. 근 며칠 간은 정말 행복했다. 기말고사로 채워지지 않았던 호기심과 행복 그리고 평온함이 고요한 일상에서 조금씩 차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끝내 걱정과 불안이 평온함을 앞서고 말았다. 직면하고 싶지 않았던 그 분이 찾아온 것이다, “권태”라는 두 글자.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나날을 보내는 일상을 학기 내내 기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료한 일상 속 권태라는 감정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권태는, 두려움과 피로의 시작인 계절학기의 개강을 나도 모르게 염원하게 했다.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은 이 무료한 일상을 단숨에 끝내고 싶었다. 처음으로 강렬히 느꼈던 이 감정은 나를 의문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극심한 권태,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인간의 갈망과 노력이 채워지지 못했다는 사실’, 권태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프랭클은 카를 베드나리크의 말을 빌려 “대중의 문제는 물질적 곤궁에서 풍요와 여가의 문제로 바뀌었다."라고 썼던 말은 옳았다고 덧붙여 말했다.


 

파울 폴락 - 사회문제들이 해결된 뒤에 비로소,

실존적 문제들이 인간의 의식 속에서 더욱더 강렬하게 터져 나오게 된다.

 

 

단순하게, 놀라웠다. 나도 대다수 사람과 다를 바 없이 현대인들의 극심한 고통의 근원은 사회문제라고 결론지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어렸을 적과는 다르게 조금씩 시간이 흘러, 권태라는 감정을 몸소 체험해 보니 세상이 아주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어쩌면 사람이 외출하고, 사람들과 부대껴서 스트레스 증진이 일상인 사회생활을 하는 것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 가볍든 가볍지 않든 관계를 형성하고, 사랑과 증오 그리고 비애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타인과 사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닐까. 결국 많은 사회인이 노래를 부르는 “돈 많은 백수”는 허황된 꿈이었다.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예전보다 어려워진 것 같다’라는 사회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현 사회가 주를 이루는 복지국가는 인간의 모든 욕구를 최소한으로, 혹은 풍족하게 충족시켜 준다고 답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가장 기본적이고 근원적인 욕구인 의미에 대한 욕구를 제외하고.


앞서 첫 문장에서 언급하였던 프랭클이 강조한 ‘의미에의 의지’는 철저히 제외되어, 채워지지 못한 채 평생을 남아 있게 된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경험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혹은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이승을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몬트리올의 한스 셀리에조차도 최근 발표한 논문에서 스트레스는 삶의 소금이며, 인간에게는 긴장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조금 더 신중하게, 인간에게는 건강한 정도의 긴장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프랭클의 언급에 더해 나는 이를 권태와 연결 짓고 싶다. 권태는 사람을 한없이 무력하게 만들어 죽음에 가깝게 만든다. 결국 권태의 끝에서 사람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정처 없이 떠도는 유령처럼 끝없이 초라해지고 작아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스트레스가 삶의 소금이라니, 이 얼마나 근사한 말인가. 단순히 이상적인 표현이 아님을 느낀다. 굉장한 기쁨이라는 극단의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와 반대로 고통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다는 점,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이에게 필요한 구문일지도 모른다. 중간 정도의 아주 건강한 긴장.


이는 쇼펜하우어의 ‘중용’과도 굉장히 유사하다고 느낀다. 쇼펜하우어는 삶이라는 긴 러닝 타임을 짊어지며 아픔을 앓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중용의 자세라고 말했다. 극단의 감정을 추구하려 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중용의 마음을 유지하는, 요동치지 않는 내면을 일 순위로 할 것을.

 

"한 인간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경험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중요한, 일생일대의 의미는 어떻게 찾는가?


프랭클은 ‘사랑을 통해서’라고 대답했다. 사실 ‘의미’라는 것은 삶의 본질적인 지향점으로서 책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언급되어, 독자에게는 극심한 부담감으로 다가올 위험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을 것이다. 의미라는 건 과도할 정도로 상대적이어서, 누군가를 추종하고 롤 모델로 삼아야만 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만큼, 다른 누군가의 삶을 대신하여 살아갈 수 없는 만큼, ‘의미’라는 것은 내 안에서 직접 발현되고 깨어난다. 그 중점에 ‘사랑’이 존재한다. 빅터는 경험을 통해 얻는 깨달음을 무척이나 중요시한다는 것을 책을 읽으며 확인할 수 있는데, 그 경험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소용돌이가 바로 사랑이다.


빅터는 한 인간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경험하는 것을 사랑이라 일컬었다. 상대의 유일무이함을 알아가는 것이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며 이는 결국 자신의 내면세계를 풍요롭게 한다.


조금은 현실적인 이야기로 넘어가고 싶다. 사실 나 역시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물론 의미를 실현하고 성취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현실의 고통을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의미’라는 두 글자가 지나치게 아름답고 이성적으로 다가와, 너무도 멀게만 느껴진다.


빅터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어 역설한다.

 

하버드 대학교의 롤프 폰 에카르츠베르크는 전에 하버드 졸업생 100명을 대상으로 한 박사학위 논문을 썼습니다. 졸업한 지 20년이 지나 이들 졸업생들은 변호사, 외과 의사, 신경정신과 의사, 정신분석가 등으로 일하며 사회적으로 명망 있고 경제적으로도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결혼생활 등 사생활에서도 전혀 문제가 없었지요. 요컨대 그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상당 비율이 자기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껴 괴로워하고 있었고,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절망의 기저에는 본질적, 궁극적으로 우상화가 놓여 있다.

 

 

이는 현재 나의 복잡한 심리를 타격한다. 이유는 진정으로, 내가 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사회화를 통한 체득인지,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향이 그러한지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나는 지독할 정도로 매 순간 사회의 노선을 그리려 온 힘을 쓴다. 여기서는 커리어와 결혼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관계의 그물이 포함된다.


물론 이렇게 계획적으로 노선을 그리고, 가치를 좇아가는 것이 실질적인 미래에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여기서 끊임없이 우상을 숭배한다는 점이 나를 함정에 빠뜨린다. 나 자신의 이상적인 미래를 아름답게 그린다기보다,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자신의 이성과 목적을 재단하고 또 재단하여 틀에 가둔다.


목표의 평가 기준을 끊임없이 외부에서 찾는다. 외부에 둔 기준점을 통해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자아실현이 불가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멈추기 힘들다.


“현실과 타협하라, 타협해야만 네가 산다.”, 많은 이들이 고민하는 문제이자 타인으로부터 꾸준히 듣게 되는 사회적 기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가치가 분명함에도 현실과 타협하라는 노이즈는 끝내 씁쓸한 뒷맛만을 남긴다.

 

 

“14일이 지나면 저는 87세가 됩니다.

하지만 제게는 모든 날이 선물이니 이런 선물에 감사해야 하겠지요.

그래요. 박사님, 저는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고, 아름다운 공원을 내려다볼 수 있어요.

나무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오후에는 친구들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 그 모든 것에 '예'라고 말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왜 그리 이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박사님, 저는 귀가 들리지 않아요. 대신에 저는 내면으로 이야기하지요.

저는 거의 걸음을 걷지 못해요.

대신에 저는 생각하지요. 이 모든 것에 대해 정말 무한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 한 여성이 빅터 프랭클에게 보낸 편지

 

 

우리는 우상화 과정을 되돌려야만 한다. 의미의 가능성들에 스스로를 열어두고,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의미 있는 일은 매 순간 달라질 수 있고 나의 삶이 제공해 주는 것, 내 삶이 제안해 주는 의미도 매 순간 달라질 수 있다.


우상화를 내려놓고 집착을 버리고, 유연함과 탄력성을 지녀야만 한다. 삶이 무엇을 건네주든 감사하는 자세를 지녀야만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히게 했던 빅터 프랭클과 죽음을 앞둔 환자의 테이프 녹음 대화를 마지막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

 

프랭클: 아름다운 경험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데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중단될 거예요, 그렇지요?


환자: (생각에 잠겨) 네, 네, 모든 것이 끝나겠지요.


프랭클: 이제 어떻게 될까요. 당신이 경험한 많은 아름다운 일이 그로써 세상에서 사라지거나, 무효가 되어버린다고 생각하시나요?


환자: (점점 더 심각한 표정으로) 제가 경험한 아름다운 일들이요...


프랭클: 네, 말씀해보세요. 누군가가 당신이 경험한 행복, 그 행복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을까요? 누군가 그것을 없앨 수 있을까요?


환자: 맞습니다. 교수님. 아무도 없던 일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프랭클: 또는 누군가가 당신이 삶에서 만났던 호의들을 지워버릴 수 있을까요?


환자: (더 진심 어린 목소리로) 아니요, 아무도 그럴 수 없어요!


프랭클: 또한 당신이 이룬 것, 노력해서 얻은 것들도 그 누가 없애버릴 수 없습니다.


환자: 맞습니다. 아무도 없애버릴 수 없어요.


프랭클: 또는 당신이 용감하고 담대하게 견뎌낸 것들을 누군가가 세상에서 없애버릴 수 있을까요? 당신이 건져 올려 과거 속에 저장하고 보관해둔 것들을 누군가가 과거로부터 없애버릴 수 있을까요?


이제 이 환자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말했습니다.


환자: 아뇨, 아무도 그럴 수 없어요. 아무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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