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친족 성폭력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유의 바랍니다.
* 이 글에서는 텍스트적인 희곡만을 두고 쓰였습니다. 따라서 실제 상연되었던 연극의 스펙타클 요소에 대해서는 포함되어있지 않습니다.

꿈, 잠, 몸. 한 단어씩 천천히 소리내 말해본다. 세 단어는 전부 입안이 굳게 닫히면서 발음된다. 우리는 때때로 진실 앞에서 쉽게 입을 열지 못한다. 꿈과 잠과 몸의 경계를 넘나들며 진실 앞에 선 여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지금부터 듣게 된다. 이름에 ‘나’가 두 번 들어가지만 ‘나’가 누구인지 묻는 나나의 이야기를.
해서우 작가의 희곡 「꿈 잠 몸」은 주인공 나나의 친족 성폭력 이야기를 다룬다. 등장인물은 주인공인 나나, 그리고 그의 엄마인 문주(실재), 뼈박사와 다이버, 이끼씨(꿈속 존재들)다. 주요 배경은 화장실과 거실이며 이야기의 시작은 사막 육교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막 육교는 다소 특이점을 가지는 배경이다. 육교는 난간이 없고 계단 3~4칸짜리이며 낮고 짧다. 그리고 사막에 있다. 난간이 없는 육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움과 불안감을 조성하지만,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육교와는 달리 높이가 낮다. 다시 말해 떨어져도 생명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다. 이야기의 출발이 이곳에서부터인 이유는 바로 이것에 있다. 나를 지켜줄 안전장치(난간)가 없으며 죽고 싶어도 떨어져 죽을 수 없는 나나의 현재 상태를 상징하는 이곳에서 나나는 ‘오리발’을 신고 있다. 물기 하나 없는 사막에서 오리발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발이 묶기게 만든다. 이후에 꿈에서 깨어난 나나를 통해 이 공간은 꿈속 공간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꿈은 단순한 환상이 아닌 인간 무의식의 내면을 드러낸다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이곳에서 나나의 모습과 상황은 자신의 내면 상태가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꿈속에서 나나가 만난 첫 번째 인물은 ‘뼈박사’이다. 그는 조각뼈를 나나에게 건네며 뼈의 주인이 나나라고 말하고 나나는 이를 부정한다. 나나는 계속 부정하고 뼈박사는 뼈의 주인이 나나라고 거듭 대치되는 장면에서 우리는 나나의 ‘부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 왜 나야, 왜!’ 외치는 나나, ‘뼈는 고요하잖아. 고요한데도 다 기억해.’ 말하는 뼈박사. 그러한 둘이 서로의 살이 닿았을 때 뼈 박사는 ‘불결’하다고 말한다. 어째서 하필 자신이어야 했는지 소리치는 목소리와 ‘기억’ 그리고 ‘불결함.’ 우리는 이 대화를 지켜보며 이것이 결국 하나의 사건을 암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고통스러운 사건을 앞에 두고 우리는 그 기억을 잃거나, 그 기억을 외면하고 부정하거나, 지나치게 깊숙이 묻어두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몸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그것이 살아남아 어떻게든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우리는 구체적으로 나나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에 주목하는 것이 아닌 사건 이후 어떤 상태, 즉 나나의 트라우마를 중점으로 들여다본다.
살은 외부적인 감각이지만 뼈는 내부에 있으며 감각을 느낄 수 없다. 그러한 ‘뼈’만을 남기는 것은 결국 고통을 느꼈던 외피를 벗겨내고 뼈만을 남기고자 하는 나나의 무의식을 보여준다. 현실로 돌아온 나나는 이유를 자각하지 못하지만, 꿈을 꾼 직후 눈물을 흘린다.
꿈이 깨어난 나나의 공간은 화장실이다. 이곳은 사막과 반대되는, 물이 많은 공간이다. 계속해서 손을 씻고 거울을 보면 거울 속의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어진다. 이 불결함과 혼란스러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친족 성폭력이 일반적인 성폭력과 달리 더 집요하게 고통을 주는 것은 고통의 대상을 단절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성에 대한 인식과 사건의 문제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힘과 생각이 약한 어린 시절에 발생하였을 때 그 기억은 현재에서 바로보기 어려워진다. 초점이 희미해지는 것이다. 쉽게 발설할 수 없다는 특성 앞에서 이 불안과 혼란은 오롯이 피해자 혼자만이 가져가게 된다.
“그러면(사이) 이건 누구 기억이야?” (p.283), “갈수록 헷갈려. 이게 내 기억인지 꿈에서 본 건지 다른 사람이 한 말인지 내 마음대로 상상한 일인지.” (p.286) “내 기억이 잘못된 거면 어떡해?” (p.322)
기억의 불확실성은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끊임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고통이 가중된다. 특히 가해 대상이 친족이라고 하였을 때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명히 구분 짓는 일에 큰 혼란을 겪는다.
“어제 오빠가 아이스크림 사 줬어. 반 나눠서 먹는 건데, 똑같이 반반 잘라야 하는 건데, 더 많은 쪽 나 줬다? 친구 집에서 놀다가 잠들면 업어다가 집 데려가고, 나 놀리는 애들 혼도 내주고.” (p.322)
친족과는 삶을 분리해 생활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매일 갱신되는 일상 기억들이 특정 사건을 뒤덮게 된다. 기억의 불확실성, 그리고 가해 인물이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기억들은 가해자를 가해자로 규정짓고, 대상을 미워하는 것조차 자기 의심으로 인한 몇 배의 고통이 뒤따른다.
그리고 이 고통은 현재로 가져와 문주와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나나는 문주를 껴안고 등에 얼굴을 파묻는다. 그리고 문주는 나나에게 가해자에게 사실을 말하고 사과받는 것을 제안한다. ‘그래도 가족’이라는 말과 함께.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인물이 사건을 종결시키고자 하는 것은 그 물음만으로 이차적인 상처를 입힌다. 나나가 껴안고 있는 대상임과 동시에 가해자를 옹호하는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문주는 피해자의 엄마이자 가해자의 엄마이다. 따라서 정서적 지지와 위로를 받고 싶은 존재이면서 곁에서 (수동적으로) 상처를 반복시키는 역설을 가능케 한다. 용서는 종결의 힘을 갖는다. 순전히 피해자의 존중으로 선택되어야 하는 용서가 타인에 의해서 시작될 수는 없다. 그렇게 시작된 분노는 나나와 문주가 폭발적으로 내면의 목소리를 발화하는 기폭제가 된다.
나나 : 엄마, 나는 내 가슴을 도려내고 싶어.
높은 곳에 오를 때마다 뛰어내리고 싶어. (중략)
문주 : (누운 채로) 나도 싫지, 엄마니까.
꼴도 보기 싫지.
싫은데도 어떡해.
계속 봐야 하잖아.
말할 수가 없으니까,
이유 없이 내칠 수 없잖아.
다 아는데 모르는 척,
내 속 다 문드러져. (p.326)
이후에 문주는 나나에게 사과한다. 나나는 부정하고, ‘미안하다’라는 말로 종이 한 면을 채우도록 거듭 말한다. 두 사람은 사실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과해야하기보다 받아야 하는 쪽에 가까운 사람과, 받아야만 하는 사람 서로가 행선지를 잃은 사과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이후 ‘미안해’라는 말은 ‘괜찮아’라는 말로 변화한다. 그 내실은 같다. 미안해 안에는 미안함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괜찮아 안에는 괜찮음이 없다.
나나 : 왜… 우리만 이렇게 힘들어?
왜 나는 엄마를 더 원망하고 있을까.
엄마도 나를… (p.338)
나나는 ‘오빠’가 어디에도 없는지 묻는다. 고통과 발설, 그리고 사과의 현장에 그는 없다. 이것은 사건 이후의 이야기이며 그 피해의 흔적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 안에 가해 인물(오빠)의 존재는 철저히 빠져있다. 이것은 가해자가 가지는 무책임과 더불어 현재의 서술에 그의 존재는 불필요함을 느낄 수 있다.
문주가 입을 연 순간 다이버는 나나의 얼굴을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떠난다. 이 꿈속 존재는 문주의 내면을 형상화할 수 있는 역할로 뼈박사, 이끼씨와 같이 나나에게만 보인다. 다이버는 물속에 잠수해 있으면서 나나가 호흡할 수 있게 도와준 호의적 존재다.

화장실은 사막과는 대조적으로 물이 많은 공간이다. 또한 거울이 있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나나는 손을 여러 번 닦고 몸을 오래 씻지만 사로잡힌 ‘그’ 기분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욕조 안에서 다이버는 잠수 중이다. 물과 잠수, 두 단어만으로 우리는 호흡을 연상시킬 수 있듯이 다이버는 나나가 편하게 호흡하기 어려운 상태임을 보여준다. 다이버가 나나에게 스노클을 물려주자 나나는 비로소 호흡할 수 있다. 아무 도움 없이는 호흡하기 어려운 물속은 역설적으로 땅 위에서보다 호흡을 가능케 한다. 물속은 호흡할 수 있는 분명한 도구가 주어지는 반면, 땅 위에서는 숨을 쉰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호흡의 어려움을 겪어도 방도를 찾기 어렵다.
이끼는 습한 곳에서만 자란다. 벽이나 땅에 붙어 자라기 때문에 그 본래의 모습을 덮는 방식으로 존재를 넓힌다. 이끼씨는 분무기로 물을 뿌리며 문주와 나나의 대화 사이에 끼어든다. 두 사람 다 사건을 직설적으로 꺼내지 못하고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말하거나 돌려서 말한다. 이끼가 몸을 덮듯, 그 모습을 숨기는 것과 닮은 형태로 말이다.
따라서 나나와 문주가 서로의 속마음을 터뜨리는 클라이맥스에서 다이버는 (얼굴을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춘 뒤) 공간을 떠나고, 나나는 대형 뜨개 이끼를 벗는다. 가라앉아있던, 덮여있던 속내를 비로소 표출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후반에 이르러 나나는 뼈가 된다. 손이 뼈로 변해있던 때를 지나 완전한 뼈가 된다. 뼈는 단단하고 가시적이며 거짓을 하지 않는다. 기억이라는 불확실함과 감각이 느껴지는 살, 그리고 가끔 자신의 몸이 분리되는 느낌을 느끼던 나나에게 뼈가 된다는 것은 생존의 최소 단위이다. 모든 것이 버려지고 남은 마지막의 것. “뼈는 진짜라서 괜찮아. 항상 같은 자리에 있고 – 갑자기 나타나지도 않고 -(p.322)” 뼈박사의 말처럼 뼈는 나나의 상태에서 바라보았을 때 가장 진실하고 또 필요한 하나의 ‘상태’다.
다이버 : 백화된 산호를 아름답다 하는 사람들 있다.
두고두고 보겠다고 한 다발씩 데려가거든.
관리할 필요도 없고, 죽어 있으니까.
밥을 주지 않아도 되고, 죽어 있으니까.
물을 더럽히지도 않지, 죽어 있으니까. (p.315)

뼈는 희다. 그리고 죽음을 연상시키게 하는 이미지다. 나나는 이 장면에서 ‘편안한 기분’을 느낀다. 숨을 쉬는 것조차 편하지 않은 나나에게 편안함이라는 감각은 특별하다. 어쩌면 죽었다는 감각,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무의 상태가 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얀색은 무결하고 깨끗함의 상징이다. 그것은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진실, 즉 검은 빛을 완전히 감추고 숨긴 채 흰색을 띠고 있다면 진실로 아름다울 수 없다. 사건 이후의 삶,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매 순간 매 호흡마다 통증을 감각하며 생을 ‘감내’의 차원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다시 말해 이곳의 나나에게 죽음이란 관리하거나 밥을 먹거나 주위를 더럽히지 않을 수 있는 ‘편안함’에 이르게 만든다.
기억은 개인적이며 따라서 확언할 수 없다. 또한 가해 대상이 친족이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가해 사실을 고백할 때보다 더 큰 후폭풍이 따른다. 한 가족, 너머 한 대를 잇고 있는 가족의 형태가 붕괴하기에 그렇다. 그 불확실성과 평화를 깨는 고발자가 될지 모르는 공포는 피해 인물이 행동하는 것에 방해물이 된다. 마찬가지로 이야기 속 나나 역시 그 의심과 공포를 떨쳐내기 어렵다. 그 기억이 온당한지, 그저 꿈꾼 것은 아닌지 끝없이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고 묻는다. 그 대답을 정확하게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질문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지금 왜 이렇게 절망의 문턱 앞에 서 있게 되었는가. 단순히 꿈일지도 모르는, 실수이거나 장난일지 모르는 사건 앞에서 왜 한 사람의 인생은 이토록 처절하게 슬픔을 토해내고 있는가. 어째서 나나는 가슴을 도려내고 싶고 높은 곳에 오를 때마다 뛰어내리고 싶고 덤프트럭이 달려오면 도로에 몸을 내버리고 싶고 사람 많은 곳에 가면 불안해서 눈물부터 흐르고 한여름에도 긴바지밖에 입을 수 없고 남자가 언성을 높이면 몸이 떨리고 오빠가 기분 안 좋은 날에는 숨이 막혀오는 것일까.
기억은 불확실하고 덮어두고 덮어두다 보면 희미해진다.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그러다 보면 우리는 그 일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수 있다. 견디기 힘든 기억을 뇌가 멋대로 삭제해 버렸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건 이후에 피해자가 겪게 되는 상태다. 확실하지 않은 기억 이후에 그 기억의 흔적들은 몸 안에 잔존해 있다가 어떤 방식으로든 발현된다. 자꾸만 아프고 눈물이 나고 설명할 수 없는 분노에 몸이 떨리고, 그것이 증거다. 한 사건이 존재했고, 한 사람을 이렇게 무너뜨릴 만큼 큰 상처를 입혔다는 것. 그 자체로 모든 의심은 버려져도 된다.
이야기의 막은 당신 앞에 종이 하나가 높이면서 끝이 난다. ‘이 종이를 가져가도 가져가지 않아도 당신은 언제까지 당신이다.’ 그러므로 그 분명한 사건은 존재했고 사실이지만, 그리하여 한 사람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주었지만, 여전히 살아가고 집으로 돌아간다. 계속해서 몸을 닦고 거울을 볼 때마다 낯선 감각을 느끼지만, 여전히 나의 존재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나나의 아픔에 깊게 공명하며 지켜봐 왔다. 그리고 현재에 이른 나나를 통해 이야기는 말하고 싶은지 모른다. 이 아픔은 당신만의 것이 아니며, 이 일이 지나갔다고 해서 당신이 당신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며, 당신의 고통은 의심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화장실 안에서 희미해진 나의 존재에 물음표를 길게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