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예순 살의 조지 엘리엇은 마흔 살의 존 크로스와 결혼하고 베네치아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얼마 뒤 크로스는 호텔 발코니에서 카날그란데로 몸을 던진다. 그는 곧 구조되지만, 신사 클럽남자들은 크로스가 “못생긴 늙은 여자와 육체적 사랑을 나눠야 한다는 사실에 압도되어, 성교보다는 차라리 죽음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라 떠들어댄다. 『미들마치』를 쓴 한 시대의 위대한 소설가는 순식간에 “못생긴 늙은 여자”가 된다.
   
『피날레』는 여성 예술가들의 말년을 다룬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노년에도 꺼지지 않은 창작열을 찬양하는 감동적인 위인전이 아니다. 구바가 바라보는 여성 예술가들의 노년은 훨씬 불편하고, 기이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럽다. 이 책의 여성들은 아름답게 늙지 않는다. 늘 지혜롭지도 않고, 고요하지도 않으며, 자기 삶을 완전히 받아들인 사람들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사랑하고, 집착하고, 질투하고, 자기 몸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명성을 관리하고, 때로는 기괴한 방식으로 젊음을 붙잡으려 한다.

이것이 『피날레』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수전 구바는 나이 든 여성 예술가를 존경할 만한 노년의 표본으로 만들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나이 든 여성 예술가는 왜 작품보다 먼저 얼굴, 몸, 성적 매력, 괴팍함, 추함으로 설명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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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추한, 기이한, 괴팍한, 고집 센, 욕망 많은, 외로운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말처럼, “권력을 지닌 자는 누구나 명사를―그리고 규범을―차지하지만, 힘이 약한 사람들은 형용사를 얻는다.” 이 문장은 『피날레』를 읽는 내내 여러 번 되돌아온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아홉 여성은 모두 자기 예술의 언어를 바꿨다. 조지 엘리엇은 소설이 인간의 내면과 사회 전체를 동시에 사유할 수 있음을 보여준 작가이고, 콜레트는 여성의 몸과 욕망과 나이 듦을 관능적인 문장으로 보여준 작가다. 조지아 오키프는 꽃과 뼈와 사막의 풍경으로 미국 모더니즘의 시선을 새로 만든 화가고, 이자크 디네센은 삶의 상실과 식민지의 기억을 우화적 서사로 바꾼 이야기꾼이다. 메리앤 무어는 미국 모더니즘 시의 지성을 대표한 시인이고, 루이즈 부르주아는 몸과 기억과 불안을 거대한 조각의 언어로 만든 작가다. 메리 루 윌리엄스는 스윙과 비밥을 가로지르며 작곡·편곡·연주를 모두 해낸 재즈 음악가고, 궨덜린 브룩스는 흑인 공동체의 존엄을 시의 중심에 끌어놓은 시인이다. 캐서린 더넘은 인류학과 흑인 디아스포라의 춤을 결합해 무대 위의 몸이 품을 수 있는 역사를 넓힌 안무가다.

남성 예술가의 말년은 종종 “후기 양식”으로 불린다. 그의 침묵은 깊이로, 고집은 신념으로, 젊은 연인과의 관계는 생명력으로, 주름진 얼굴은 연륜으로 읽힌다. 그러나 여성 예술가의 말년은 곧잘 사생활과 외모와 성적 매력의 소멸로 번역된다. 이들이 나이 들었을 때, 세상은 그 이름 앞에 다른 말을 붙인다. 늙은, 추한, 기이한, 괴팍한, 고집 센, 욕망 많은, 외로운, 모성적인, 비정상적인, 품위 없는.

구바는 여성들이 실은 괴팍하지 않았다거나 욕망하지 않았다거나 기이하지 않았다고 변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형용사들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특히 콜레트가 그렇다.

콜레트의 말년에는 “왜곡된 모성애”라 부를 만한 사랑, 젊음을 붙잡으려는 시도, 때로는 기이하게 보이는 행동들이 있다. 10대 소녀의 피를 수혈받아 회춘을 시도했다가 오히려 부작용에 시달렸다는 일화는 우스꽝스럽고도 섬뜩하다.

이때 중요한 것은 콜레트를 비웃는 일이 아니다. 콜레트는 우리가 여성의 노년에 얼마나 좁은 미덕만을 허락해 왔는지 드러낸다. 나이 든 여성은 평온해야 한다. 지혜로워야 한다. 욕망에서 물러나야 한다. 자기 몸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고상하게 사랑해야 하고, 젊음을 그리워하더라도 품위 있게 그리워해야 한다. 콜레트는 그렇게 늙지 않는다. 그는 때로 우스꽝스럽고, 집요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불편하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살아 있다.

어쩌면 『피날레』가 가장 멀리 가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여성 예술가들을 흠 없는 대가로 세우지 않는다. 흠 있는 채로 보이게 한다. 여성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성녀의 자리가 아니라 인간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유별난 알맹이, 이단아가 되다

 
『피날레』를 통과하며 오래 남는 또 하나의 문장은 시인 메리 올리버의 말이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남의 말을 잘 안 듣고 제 주장을 꺾지 않으며 세상의 척도를, 심지어 역사마저 무시하고 자기 내면의 끌림 혹은 어떤 상상의 도약을 따르는 고집스럽고 사랑스러운 이단아도 존재한다. 나는 혹 이 이단아가 영혼의 본질이 아닐까 싶고,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영혼이 요동하며 질문을 멈추지 않는 이 힘을 벗 삼아 그 가까이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어 구바는 묻는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어떤 사람들은 노년에 자신의 유별난 알맹이에 더 가까워지지 않는가? 그렇기에 『피날레』의 노년은 아름다운 완성이 아니다. 오히려 벗겨짐에 가깝다. 체면이 벗겨지고, 배역이 벗겨지고, 타인의 기대가 벗겨진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때로 추하고 때로 우스꽝스럽지만 어쩌면 가장 자기 자신에 가까운 알맹이다.

이 대목에서 수전 손택의 「노화의 이중 기준」이 떠오른다. 손택은 여성의 나이 듦이 남성의 나이 듦보다 훨씬 가혹하게 처벌된다고 봤다. 남성에겐 소년의 매력과 성인 남자의 매력이라는 두 가지 기준이 허용되지만, 여성에게 허락된 아름다움의 기준은 소녀의 아름다움,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에게 주름과 흰머리는 삶의 흔적이 아니라 패배로 읽힌다.

『피날레』의 여성들은 이 이중 기준 위에 서 있다. 남성 예술가의 늙은 얼굴은 연륜이 되지만, 여성 예술가의 늙은 얼굴은 상실이 된다. 남성의 젊은 연인은 생명력의 증거지만, 여성의 젊은 연인은 우스꽝스러운 추문이 된다. 남성의 고집은 예술적 신념이 되지만, 여성의 고집은 괴팍함이 된다.

손택은 여성이 자신의 얼굴에 살아온 삶이 드러나도록 해야 하며,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썼다. 이 말은 『피날레』의 여성들에게도 적용된다. 구바가 바라보는 것은 젊음의 기준에 맞서 끝내 남은 얼굴들이다.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지워진 얼굴이 아니라, 살아온 시간이 새겨진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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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날레는 끝이 아니다

 
'피날레'라는 말은 끝을 떠올리게 한다. 공연의 마지막 장면, 음악의 마지막 악장, 박수 직전의 순간. 그러나 『피날레』가 보여주는 여성 예술가들의 말년은 조용한 퇴장이 아니다. 이들의 피날레는 오히려 가장 시끄러운 장면에 가깝다. 그곳에는 추문이 있고, 병이 있고, 욕망이 있고, 고집이 있고, 실패가 있고, 뒤늦은 명성이 있으며, 끝내 포기하지 못한 형식이 있다.

그러므로 『피날레』는 여성 예술가의 노년을 미화하지 않는 책이다. 동시에 그것을 비하하지도 않는다. 구바는 늙은 여성에게 들러붙은 형용사들을 하나씩 바라본다. 늙은, 추한, 기이한, 괴팍한, 욕망 많은, 품위 없는. 그리고 그 형용사들 아래에 남아 있는 명사를 찾아낸다. 소설가, 화가, 시인, 조각가, 작곡가, 안무가.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이름을.

노년은 한 사람이 가장 유별난 자기 자신에 가까워지는 시간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더 이상 설명 가능한 사람으로 남지 않는 시간이다. 『피날레』의 여성들은 조용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끝까지 형용사에 갇히지 않고, 자기 삶의 명사를 되찾으려 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창작의 마지막 국면일지도 모른다. 끝까지 아름답게 남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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