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 속에 누가 보여야 눈이 번쩍 뜨이던가? 사람이다. 협주곡에서는 한 사람의 표정과 호흡을 따라가면 되었는데, 교향곡 앞에서는 어디를 보아야 할지 자꾸 망설이게 된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한 세계 전체가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 있어서다.
드보르자크, 바이올린 협주곡
Dvořák, Violin Concerto in A minor, Op. 53
드보르자크에게 바이올린 협주곡이 있었구나. 그 사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있을 법한 곡인데도, 나는 왜 이제야 이 곡을 들여다보게 되었을까. 바이올린 협주곡을 좋아한다고 말해왔지만, 내가 경험한 레퍼토리의 폭은 생각보다 좁았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궁금증의 방향도 보통 연주자와 소리에 있었지, 작곡가를 향해 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찾아보니 이 곡은 당대의 거장 요제프 요아힘을 염두에 두고 쓰였지만, 정작 초연은 그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작부터 어딘가 엇갈린 사연을 가진 곡이라니, 더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내 취향도 늘 사람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클래식을 공연장에서 직접 눈으로 만나다 보면 지금 말하고 있는 화자가 그야말로 풍경인지, 사람인지 나도 모르게 구분이 될 때가 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4DX로 숲 한복판을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걸어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나무 기둥 사이를 통과하는 감각. 분명 바람 세기를 높인 에어컨 바람이 맞는데, 음악 안에 있다 보면 어디선가 불어오는 은은한 바람이 되어버리는 순간. 소리의 힘이 이렇게 대단하다. 불시에 상황이 되고, 쉽게 지나치던 것들이 다른 이름을 얻는다.
그렇다면 이 드보르자크 바이올린 협주곡 안에서는 무엇을 만나게 될까? 아마 두 가지를 동시에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다. 서울시향도, 이지윤 바이올리니스트도 모두 꽤 한 소리 할 줄 아는 이들이 아니던가. 내가 생각하는 이 연노랑과 녹색이 어우러진 드보르자크의 풍경 안에서, 그들은 어떤 선율을 꺼내놓을 것인가? 바이올린은 사람의 목소리처럼 먼저 다가올까, 아니면 어느새 풍경의 한가운데로 나를 데려다 놓을까?
참, 첫 번째 악장과 두 번째 악장이 거의 구분 없이 바로 이어진다지? 그 넘어가는 길은 얼마나 자연스러울까? 혹시 감정선을 바로 이어 붙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분위기를 살며시 덧붙여주지는 않을까 기대도 되었다. 경직되어 있던 마음이 작은 행동 하나에 사르르 녹아버리는 것처럼.
금세 사라져버릴 음표들 중 하나가 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까. 어쩌면 음악을 듣다 연필을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묘사하고 싶은 풍경이 언제든 나타날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 때문이다.
2악장이 정말 그런 자리라면, 그곳에서는 조금 더 마음대로 들어보고 싶다. 선율에 생각을 얹고, 사랑과 기쁨도 조금 담아보자. 그러면 자연히 붙는 가사가 있을 것이고, 그 선율이 노래하는 이유를 내 안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신은 소리로 오르막을 올라본 적 있는가? 나는 여유가 있다면 꼭 안내선을 따라 정상 부근까지 오르곤 하는데, 꽤 괜찮다. 능선이 한눈에 다 보이는 그곳에 서면 상념도 다 뒤편으로 멀어진다. 이 곡의 2악장이 그런 곳이라면 어떨까? 앞에서 숨차게 올라온 마음이 잠시 멈추어 서서, 자기 안의 풍경을 내려다보는 자리라면.
3악장의 오케스트라와 협연자의 호흡이 얼마나 경쾌할지도 궁금하다. 시원할까. 개운할까. 청량할까. 오케스트라와 협연자는 거의 맞붙어 움직일까, 아니면 사이를 벌려 간격을 지킬까. 아무래도 뭐든지 지휘자의 선택에 따라 갈리겠다.
마지막엔 어떤 춤을 추려나. 그 춤은 기쁨에 가까울까, 해방감에 가까울까, 아니면 앞선 악장들이 품고 있던 복잡한 감정을 몸으로 풀어내는 움직임에 가까울까. 수집할 수 있는 장면의 개수를 가늠해보자. 아마 순식간에 지나가버려 붙잡지 못할 뿐, 수십 가지는 되지 않을까? 은은한 설렘이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1번
Sibelius, Symphony No. 1 in E minor, Op. 39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교향곡은 잘 모르겠다. 이 시벨리우스도 듣자마자 첫눈에 반했다? 이런 말은 못하겠다. 다만 서울시향이 필시 대단한 장관을 펼쳐 놓을 텐데, 나는 그 안에서 어떻게 서 있어야 하나? 그 스탠스를 정하는 데 시간을 다 쓰게 되는 것 같다.
아직도 나는 교향곡 앞에서는 아주 작아진다. 듣자마자 “아, 바로 이런 거구나! 이 매력이네” 하면 좋을 텐데, 아직까지도 어떤 작곡가의 몇 번을 좋아해요, 이런 게 없으니. 내 주위에 클래식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말러의 몇 번을 좋아해요” 정도는 말하던데, 나는 아직도 좋아하는 교향곡이 있냐는 물음 앞에서는 걸음이 멈칫멈칫하고, 결국 소나타나 실내악 작품을 말하게 되는 것 같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게 다 사람 하나를 붙잡고 집중적으로 따라가던 습관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앞에서는 더 쉽게 작아진다. 한 사람을 따라가면 되는 음악이 아니라, 커다란 세계 안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부터 찾아야 하는 음악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벨리우스의 품 안에서는 무슨 장면을 떠올려볼 수 있을까?
건조하진 않은, 눈이 이미 많이 내린 설원. 하얀 꽃이 녹지 않을 정도로만 햇볕이 자리하고, 부드럽게 찬 공기가 가득했으면. 그 풍경 한가운데에는 폭포수가 자리하려나. 잎사귀 하나 없는 나무가 보이려나. 그 안에 사람의 기척은 보이려나?
이 음악이 정말 하나의 풍경이라면, 나는 그 안에서 방문자일까, 길 잃은 사람일까, 아니면 이제 막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사람일까. 그 풍경 한가운데에서 나는 어디부터 바라보게 될까.
그렇다면 내가 가장 기대하는 악장은 어디에 있을까? 아무래도 딱 조용한 밤 산책만 같은 가로등 불빛처럼 다가오는 2악장이 아닐까? 우리는 안개 속에 희미한 인영으로 남아 있을까. 오히려 사방을 파헤쳐 새로운 세상과 조우하게 될까?
소리 덩어리가 잠시 몸집을 줄였을 때, 붙잡을 새 없이 커다랗게 변하기 전에 자유롭게 상상해보자. 시벨리우스의 핀란드를! 그곳은 정말 차갑기만 할까, 아니면 차가움 안에 이상하게 다정한 온도가 숨어 있을까.
특히 3악장의 도입부는 진짜, 음원으로만 듣기엔 아까운 대목이다. 소리가 서사를 부여하고, 광경을 묘사한다. 무슨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지는 우리 쪽에서 생각해보면 된다. 나는 이 곡을 미리 들어보다 이상하게, 정직하게 한 번 깨져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모른다! 꽝꽝 얼어버린 호수를 깨뜨리나 봐! 당신도 아시다시피, 이곳은 ‘정답’이랄 게 없지 않은가?
그렇게 마음대로 상상하다 보면, 4악장에서 수직선으로 눈보라가 내리꽂혀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것이다. 여전히 솔직히 말하면, 교향곡은 잘 모르겠다. 지금 들어서는 어떤 선율이 어디서 어떻게 돌아오는지 다 알아차릴 자신도 없다. 그래도 처음에 클라리넷으로 들렸던 선율이 마지막 악장에 다시 나온다니, 그 정도는 한 번 기억해두고 싶다.
이번에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그냥 나중에 이 곡을 다시 듣게 되었을 때, 낯선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한 번쯤 본 얼굴처럼 느껴지면 좋겠다. 그때 “아, 이 소리였지” 하고 가볍게 인사할 수 있을 정도로만.
서울시립교향악단은 오는 7월 1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2026년 시즌 정기공연 〈2026 서울시향 이지윤의 드보르자크 바이올린 협주곡〉을 선보인다. 이번 공연은 아지즈 쇼하키모프가 지휘하고,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이 협연자로 나선다. 프로그램은 드보르자크 바이올린 협주곡과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1번으로 구성된다.
[프로그램]
드보르자크, 바이올린 협주곡
Dvořák, Violin Concerto in A minor, Op. 53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1번
Sibelius, Symphony No. 1 in E minor, Op.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