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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분단이라는 디스토피아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 말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 말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학창 시절, 사회 시간이면 북한과 통일 주제가 꼭 한 번쯤은 나왔다. 교과서에 따르면 처음엔 그들이 먼저 발전했지만 경제 개발에 실패하는 바람에 지금은 불우하게 살고 있고(통계를 보여주며) 이제는 그들이 우리를 선제공격할 수는 없으며 우리가 먼저 나서서 통일해야 한다고 한다. 핵은? 미사일은? 고등학교에서는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눴던 거 같다. 통일 이후 창출되는 경제적 가치가 통일하는 데 드는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지 하는(결론은 나지 않았다). 군대 훈련소에서는 오래된 영상의 낡은 음성으로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는 정신전력 교육을 받았다. 병사는 그들이 더 많을지라도 군사력은 우리가 압도적으로 강하다고 내레이션은 말했다. 심각하고 진지한 이야기지만 마치 게임 속의 스토리 진행 과정을 보고 듣는 것 같았다. 삶을 초과하는 일들을 수많은 영화나 미디어로-추상적으로-접하는 시대란 사실에 걸맞게 말이다.
SNS엔 외국인이 북한에 가서 찍은 영상들이 가득하다. 식당이나 지하철이나 광장을 거니는 사람들. 우리와 같은 언어를 쓰지만 말투나 행색, 행동거지가 전혀 다른 그들을 보면 마치 평행우주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이런 낡은 말을 차치하고 생각해 보자. 바로 인접한 땅에, 우리랑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이 사는데, 우리는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없고 그들도 마찬가지라고(그들은 생명이 위태로워진다). 이 자체로도 현실을 디스토피아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 기분을 오랜만에 떠올린 건 <하나코리아> 속 주인공 ‘혜선(김민하 배우)’이 자신의 어렸을 적 사진을 들여다보는 장면에서였다. 혜선처럼 말간 얼굴을 한 아이가 자기 또래 아이들과 무대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학예회에서 흔히 볼 법한, 어설프고 순박한 표정은 찾아볼 수 없고, 마치 누군가 점토로 만든 얼굴을 그렇게 당겨 빚어놓은 것 같은 상기된 표정들만 보인다. 그 표정을 푸는 순간 무대 뒤편으로 불려 가(혹은 떠밀려가) 사라질 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는 건 그 사진을 보는 사람들뿐일까?
평행우주를 건너온 사람
<하나 코리아>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게 된 20대 탈북민 여성 혜선이 한국에 적응하는 이야기다. 탈북민들의 한국 적응을 도와주는 국가기관인 ‘하나원’에서 보내는 나날이 1부라면, 하나원에서 나와 서울에서 살아가는 나날이 2부다.
나에게 혜선은 평행우주를 건너온 사람 같았다. 기내에 침착하게 앉아 있다가 국정원 사람들이 들어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고개를 들어 무구함과 두려움과 결연함이 뒤섞인, 그리고 누군가를 부르기보다 누군가로부터 호출되는 게 익숙한 얼굴을 드러내며 혜선은 이곳으로 건너왔다.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극영화이지만 흔히 상상하는 서사의 스펙터클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어떤 고통을 유난히 두드러지게 보여주지도 않고, 어떤 갈등을 극적으로 보여주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삶이 거친 파도보다 일렁이는 바닷물에 가깝듯이, 이야기는 잔잔하게 흘러간다. 그렇게 흘러가며 일상에서 포착되는 이질감과 소외감을 직시한다. 한번 엉겨붙으면 자꾸만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감정들을.
혜선이 이곳으로 온 이유는 명확하다. 고향에 있는 엄마의 약값을 대야 한다. 처음엔 중국으로 도망쳤지만 거기서 만난 남자가 아이를 낳아달라고 말했기 때문에 여기로 도망치게 된 혜선은 더 이상 주저할 게 없다. 중국에서 혜선을 알고 지냈던 듯한 탈북민 여성이 여기서 혜선을 보고 격분해 마구잡이로 때리는 일이 있었지만 혜선은 결연하게 하나원 생활을 한다.
다들 하나원에서 한국인으로서 새출발을 꿈꿀 때, 그리고 하나원 사람들이 그런 방면에서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제과제빵, 미용, 네일아트 등등의 직종을 이야기할 때 혜선은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어려운 길이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간호사가 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고 말한다.
“힘든 건 상관없습니다. 해내면 됩니다.”
수없이 힘들어 본 사람처럼, 힘든 게 무뎌져서 힘든 게 가장 쉬운 사람처럼. 혜선은 살기 위해 이곳에 온 사람이자, (엄마를) 살리기 위해 이곳에 온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혜선의 개인적인 마음을 보여주는 대목은 하나원에서 다 함께 서울 현장학습을 갔을 때다. 짝꿍인 ‘보미’(안서현 배우)와 쇼핑몰을 돌던 혜선은 올리브영에 들렀다가 직원의 추천으로 틴트를 비롯한 화장품들을 사게 된다. 생필품을 사는 데에 써야 하는 10만 원이 든 체크카드지만, 한국에서 살려면 사도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렇게 화장실에서 간 보미와 혜선은 화장을 하고 버스로 돌아오지만 금세 하나원 직원에게 들켜 화장을 지우게 된다.
나는 왜 혜선이 그 후 서울에서 겪은 수많은 좌절보다도 그 순간에 더 심장이 저릿했는지 모르겠다. 뭔가를 몰래 했다가 들켜서? 탈북민들 앞에서 창피를 당해서? 혜선이 강당에서 허락 없이 드럼을 치다가 하나원 원장에게 걸리는 장면처럼(원장은 혜선을 독려해준다), 혜선이 혜선 그 자체로 보이는 순간, 모든 책무를 잊고 가장 순수해진 순간이어서일지도 모르겠다. 혜선은 깊숙이 숨겨진 그 순수한 마음을-혜선한테는-평행우주인 이곳에서 지켜나갈 수 있을까?
좌절의 연장, 도망치지 않는 삶의 시작
하나원에서 나온 후 보미와 아파트에 자리 잡은 혜선은 본격적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거침없이 스페인 레스토랑에 가서 면접을 보고, 식당 주인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투가 이상하다고 하자 아랑곳하지 않고 조선족이라고 밝히며 자기가 열심히 할 수 있는 것들을 읊는다. 지하철을 타고 학원에 가서 입시 수업 진도를 따라간다. 핸드폰으로 이런저런 광고들을 보고 옷을 사고, 새로 알게 된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실수도 하고 화나는 순간도 있고 어색해지는 순간도 있다. 잠잘 시간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살아간다. 조금만 더 버티자고 스스로 다독인다. 엄마가 살아야 하기 때문에.

엄마에게 돈을 부치긴 했지만 수수료가 십 퍼센트 더 올라 괜찮을까 싶어 하던 그때, 엄마가 이미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렇게 무너지려는 순간 혜선이 찾아가는 사람은 탈북민 ‘숙희(김주령 배우)’다. 숙희는 하나원에서 마구잡이로 맞고 있는 혜선을 도와주었고, 혜선에게 자기 사정을 먼저 이야기해 친해졌었다. 연상의 여성으로서, 중국에 있다가 남편의 폭행을 참지 못하고 아이를 두고 이곳에 온 숙희 또한 혜선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다른 곳의 누군가를 살려야 하는 사람이다. 그토록 의연했던 혜선은, 보미 앞에서 똑 부러진 언니로 보였던 혜선은 숙희 앞에서 무너진다. 그 순간 알게 된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혜선에게도 기댈 구석이 필요했단 걸.

이제 혜선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엄마를 등진 죄책감, 중국에 있을 때 살기 위해 친구를 모함했던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까? 그럴 것이다. 혜선은 간호사가 될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될 것이고 관계를 넓혀갈 것이고 이전의 삶에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차근차근 해나갈 것이다. 그러면서도 잊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거쳤던 순간들을. 미결의 순간들이 송곳 같은 질문이 되어 찌르는 날이 오면 혜선은 답하기 위해 고민할 것이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혜선은 그런 사람이니까. 가장 결연할 수도 가장 순수할 수도 있는 사람이니까.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니까.
<하나 코리아>는 탈북민의 삶을 추상화하지도, 성급하게 판단하지도 않는 새로운 눈으로 갖가지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온전한 삶을 남겨 보여준다. 도망치지 않으려는 한 사람의 삶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