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상블블랭크 10>은 단독 연주 팀 앙상블블랭크의 활동 1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이다. 여유 없는 일상을 지나 공연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공연 레파토리에 대한 예습이 전혀 안 된 상태였다. 바쁘게 안내데스크로 걸어가 공연 티켓과 팜플렛을 받았다. 팜플렛 표지에는 ‘앙상블블랭크’의 이름이 위아래가 뒤집어진 채로 인쇄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 말 그대로 빈칸([ ])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 빈칸은 팀 이름일 뿐만 아니라 공연의 의도이기도 했다. 팜플렛 다음 페이지를 보아도 공연 레파토리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어떤 작곡가의 무슨 곡을 연주하는지 적혀 있지 않았다. 관객들이 어떤 곡인지 모른 채 들어오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예습 없이 온 나로서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공연의 의도와 지금 내 상태가 딱 맞아떨어졌으니까. 다소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공연장에 들어갔다.
팜플렛에서 예고된 것처럼 이 공연은 의례적인 면을 탈피하려는 시도가 보였다. 공연 시작 전 무대는 여느 클래식 음악회에서는 잘 쓰이지 않을 법한 붉은 조명으로 물들어 있었다. 단원들의 의상도 기존에 감상했던 클래식 음악회에서 보던 것보다 자유로웠다. 검은 정장으로 맞춰 입는 대신 각자 다른 옷을 입었다. 주로 깔끔한 평상복을 입은 단원이 많았는데, 때때로 눈에 확 들어오는 쨍한 하늘색이나 주홍색 옷을 입은 단원도 있었다. 무대 위 시각적 요소들로 공연의 성격을 가늠해 보는 시도는 지휘자가 지휘를 시작하기 위해 청중들로부터 등을 돌렸을 때 잠정적으로 멎었다. 지휘자의 재킷 뒤에 트임된 천의 길이가 양쪽이 달랐다. 언발란스하고 자유로운. 이 음악회의 선장 옷부터 그렇다면야. 좋은 의미로 하고 싶은 것 하는 무대구나. 판단이 서니 이제 군말없이 들을 준비도 되었다.

작곡가 이름과 곡의 이름에 대한 언급은 공연 중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연주의 텀이 생겼을 때 그것이 악장과 악장 사이인지, 아예 한 부가 끝난 것인지 잘 알 수 없었다. 한 부의 연주가 끝나면 단원들이 인사를 하고 악기 구성도 조정하니 아주 곤혹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나는 음악이 끝나는 지점, 음악의 전체적인 형태를 알기 위해 지금 내가 이 음악을 더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악장이 이런 분위기이다가 여기서 끝난다면 이것은 곡의 어느 부분까지를 형성하고 있는 걸까? 조각 케이크 겉면에 둘러진 투명한 케이크 포장지의 끝부분이 잘 보이지 않을 때 손톱 끝에 톡 걸리는 감각으로 그 부분을 찾을 때가 있다. 이 일은 순간적인 집중력을 요구하고 의외로 긴장감을 수반한다.
1부 음악을 들을 때 나는 동물 캐릭터들이 나오는 숲의 여러 가지 모습들이 떠올랐다. 동물들의 그림체와 움직이는 느낌은 디즈니 초기 애니메이션 속 동물들의 것과 비슷했다. 첫 악장에서는 숲길을 열심히 걷는 작은 동물의 뒤꽁무니를 보는 기분이었다. 다음 악장들에서는 그 작은 동물이 숲속에 흐르는 물 위를 떠다니며 어딘가 깊은 곳으로 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수면에는 묘한 우울감이 스며들었다. 나중에는 주인공 동물이 다른 동물들이 행하는 장례식을 목격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곡은 뒤로 갈수록 복잡하고 오묘해졌는데 위험하고 ‘알 수 없는’ 느낌이 강해졌다. 작은 동물이 열심히 걷던 초반과 같은 곡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의도된 불협화음이 갈수록 자주 강해졌다.
공연이 끝나고 얻은 레파토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첫 곡은 스트라빈스키의 <병사의 이야기>였다. 러시아 태생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무극을 위한 작곡을 자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병사의 이야기>는 세계 1차 대전의 영향 아래 '몇 대의 악기로 순회 공연이 가능할 규모'로 만들어진 곡이다. 연주, 나레이션, 무용이 결합된 <병사의 이야기>는 고향으로 돌아가던 병사가 악마를 만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자신의 영혼으로 상징되는 바이올린을 악마의 마법책과 바꾼 병사가 뒤늦게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알아차리게 된다. 악마 저택에서 보낸 사흘은 인세에서의 3년이었고, 이 시간 동안 그는 고향의 인간관계를 잃는다. 이후 악마를 속여 바이올린을 되찾고 살며 영화를 누리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그의 영혼은 악마의 손에 끌려간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병사 이야기>에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섞여 있다. 대표적으로 코랄과 래그타임이 있다. 19세기 말 등장한 래그타임은 재즈의 전신인 ‘피아노 연주 스타일’ 혹은 악곡으로 당김음이 특징적이다. 코랄은 종교개혁 이후 독일복음주의 교회의 예배곡에서 출발한 교회 음악이다. 느리고 규칙적인 운율감이 두드러진다. 불협화음을 자주 활용하고 다른 시대,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배태한 음악 장르를 혼합 사용한 데에서 <병사의 이야기>는 현대 클래식의 특성을 보여준다.
2부에서 선보인 라헨만의 <프레션>은 현대 클래식의 실험성을 잘 보여준다. 1940년대 프랑스 음향 기술자 피에르 셰페르로부터 시작된 구체 음악은 일상의 소리나 기계 소음 등을 녹음한 후 그것을 다시 전자음악으로 만드는 장르이다. 독일 현대 음악가 라헨만은 그러한 구체 음악을 전통적인 악기로 가져와 ‘기악적 구체 음악’으로 확장시켰다. 전통적 악기는 ‘기악적 구체 음악’에서 소리를 내는 사물이 된다. 라헨만의 초기 대표작 <프레션>에서 첼리스트는 첼로를 고전적으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첼로의 몸체와 현, 그리고 첼로의 활을 두드리거나 긁는다. 끼익거리는 거친 마찰음과 둔탁한 타격음이 모두 음악의 구성 요소가 된다. 라헨만의 <프레션>은 존 케이지의 <4분 33초>와 황병기의 <미궁>이 떠오르는 곡이었다.

1부에서는 음악의 형체와 길이를 더듬는 기분이었는데 공연의 마지막 연주곡에 가서는 새로운 ‘체험’을 한 느낌이 들었다. 객석에서 꿋꿋하게 스마트폰을 끄지 않은 어떤 관람객 때문에 스마트폰이 낼 수 있는 각종 소음을 들으며 마음이 다소 지쳐 있던 상태였다. 나중에 가서는 소음이 들릴 때보다도 또 소리가 나면 어떡하지, 하는 긴장감으로 신경이 곤두세워져 더 힘들었다. 그런 긴장과 피로를 단번에 날려준 것이 내게는 마지막 곡이었다. 곡의 초입부터 ‘와, 이게 뭐야?’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르던 내 취향이 여기 있는 느낌. 마치 몇 년 전에 영화관에 갔을 때 뒷자리에 앉은 다른 관람객에게서 맡은 향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평소에 나라면 결코 택하지 않았을 계열의 향인데 나를 확 잡아끄는 구석이 있었다. 그 향수의 이름은 여전히 알 길이 없지만 이번 곡은 이름을 알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2부 <프레션> 연주가 끝난 후로 지휘자가 선입견 없는 감상을 위해 의도적으로 곡명을 밝히지 않았지만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공연이 종료되면 곡명이 있는 버전의 팜플렛을 준비해두었다고 안내한 바 있었다. 마지막 곡은 J. 애덤스의 <실내 교향곡 (Chamber Symphony)>였다. 15인조 구성의 곡이어서 <앙상블블랭크 10> 공연 연주곡 중에서는 가장 인원이 많이 올라가는 곡이었다. 덕분에 다채로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직 이 곡의 어떤 점에 끌렸는지는 글로 잘 설명할 수 없다. 이 곡을 비롯하여 애덤스의 다른 곡들을 들어보며 특징을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애덤스의 실내 교향곡 감상이 안겨 준 경험은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내 취향에 맞지만 평소라면 잘 마셔보지 않았을 와인을 찾은 경험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가끔 우리는 키워드만으로 미리 어떤 음식이나 콘텐츠를 거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시도하지 않았을 맛의 영역에서 의외의 발견을 할 기회를 준다. 이번 공연은 현대 클래식의 미의식을 알아가는 공연이었다. 현대 클래식의 특징들이 자아내는 미감 중에서 어떤 것이 나의 구미를 당겼는지는 앞으로 더 많이 들어보며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앙상블블랭크가 추구하는대로, 낯선 아름다움을 통해 (전에 몰랐던 음악을 한 곡씩 들어보는) 미래로 한 걸음 움직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