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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머티리얼리스트
(셀린 송, 2025)
『머티리얼리스트』의 주인공은 잘나가는 커플매니저 루시(다코타 존슨). 자신이 성사시킨 고객의 결혼식에서 소위 ‘유니콘’이라 불리는 뉴욕 최고의 싱글남 해리(페드로 파스칼)에게 대시를 받는다. 같은 날, 같은 장소, 결혼식장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던 전남친 존(크리스 에반스)과 마주치면서 루시는 예상하지 못한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책, 모순
(양귀자, 1998)
『모순』의 주인공은 25세의 미혼여성 안진진. 시장에서 내복을 팔고 있는 억척스런 어머니와 행방불명의 상태로 떠돌다 가끔씩 귀가하는 아버지, 그리고 조폭의 보스가 인생의 꿈인 남동생이 가족이다. 안진진의 이모와 어머니와는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인생행로는 사뭇 다르다. 부유한 이모는 지루한 삶에 진력을 내고 있고 가난한 어머니는 처리해야 할 불행들이 많아 지루할 틈이 없다.
주인공 안진진은 극단으로 나뉜 어머니와 이모의 삶을 바라보며 모순투성이인 이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사랑과 결혼은 아름답다. 그래서 어려운 서사다. 의심하면 냉소적인 사람이 되고, 부정하면 불행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유독 의심의 눈을 흐리는 쪽은, 부정의 의견에 귀를 닫는 쪽은 왜 항상 여성이어야 할까? 아름다운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눈과 귀를 멀게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이제는 입을 열고 싶다.
영화 <머티리얼리스트>와 책 <모순>이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방식에 대해서.
1. 맞는 말, 문제는 그다음
결혼정보회사의 매칭 매니저 루시는 사람을 조건으로 분류한다. 나이, 연봉, 키, 학력, 외모. 측정 가능한 변수들을 수치화하고, 그 수치에 따라 등급을 매긴다. 나이 35세, 연봉 1억, 키 180, 대졸자인 남자 A와 나이 35세, 연봉 1억, 키 180, 대졸자 남자 B는 같은 조건을 갖고 있으므로 같은 등급의 상품으로 취급되고, 같은 등급의 여자 상품과 매칭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리는 한 가지 전제 위에서만 타당하다.
사람이 동질적 상품이라는 전제. 같은 스펙이면 같은 가치라는 전제.
경제학의 언어를 빌리자면, 결혼정보회사는 결혼 시장을 완전경쟁시장으로 취급하고 있다. 완전경쟁시장에서는 일물일가의 법칙이 지배한다. 동일한 상품에 동일한 가격이 매겨지고, 개별 참여자는 시장 가격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 수용자가 된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노산으로 분류되는 36세 여성에게는 하위 등급이 매겨진다. 그 여성이 어떤 성정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비전을 가꿔나가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말이다. 운이 좋아서 얼굴이 조금 봐줄 만하거나, 집안에 재력이 뒷받침된다면 몇 등급 위를 올려다볼 수는 있겠으나 결국은 측정 가능한 변수만을 수치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물건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90점인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30점이 된다. 같은 조건이 같은 가치를 보장하지 않는다. 가치는 관계의 맥락 안에서 계속 변동되고, 서류상 프로필은 실제 사람을 담고 있지 못하며, 사람과 관계는 직접 만나고 친밀한 사이가 되기 전까지는 실제 가치를 알 수 없는 경험재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시장을 불완전경쟁시장이라 부른다. 결혼 시장은 명백히 불완전경쟁시장이다.
그러나 결혼 시장에서는 사람이 쉽게 지워진다. 맥락은 무시된다. 서로를 계량화할 수 있는 수치로 바꾸고 합산해서 절대값을 매긴다. 절대값과 절대값이 일치하므로 이 거래는 공정하다거나, 절대값이 불일치하므로 불공정하다고 계산한다. 그래야 신속하게 선택할 수 있고, 정확하게 거래할 수 있고, 효율적으로 매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셀린 송 감독의 <머티리얼리스트>는 이런 결혼 시장의 논리가 틀렸다고 지적한다. 결혼이란 결코 조건과 조건을 교환하는 거래가 아님을, 인간을 상품으로 사고파는 시장의 근본적인 한계를 폭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혼 시장에서 결혼 적령기의 남녀는 기꺼이 자신을 숫자와 등급으로 여기고, 타인을 도형으로 취급하면서 외모, 집안, 학벌, 직업, 자산 등이 균형있는 육각형으로 자리하고 있는지, 육각형이 얼마나 찌그러져 있는지 가늠한다. 이토록 촘촘한 조건 위에서는 그 누구도 온전한 자신일 수 없다. 셀린 송이 말한 대로, "모두가 자신의 가치를 수치로 산정하면 자존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맞는 말이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쉽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2. 집단적 환각을 개인적 환상으로
문제가 뭐냐면 루시가 선택한 사람이 결국 존이라는 사실이다. 37살, 룸메이트와 살면서 뷔페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배우 지망생. 잔고 2,000달러. 시장 가치로 따지면 하위권.
존은 루시에게 말한다. "널 어떻게 사랑하냐고 했지? 그냥 사랑하는 거야. 그게 나한텐 제일 쉬운 일이야." 그리고 프러포즈한다. "죽을 때까지 널 사랑할 거야. 종신 보증이야. 흥정은 안 돼. 이것 말곤 내놓을 게 없거든."
루시가 대답한다. "좋아(Deal)."
내내 계산기를 두드리던 여자가 마침내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주체적인 태도로 결혼을 선택하는 장면은 분명히 관객들이 바랐던 장면이었을 것이다. 영화가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가진 생각은 루시의 입을 빌려서 힘 있게 전달된다. 감동을 위해 짜인 플롯들.
그러나 나는 감동적이기보다는 불편했다. 존이 집도 절도 없어서, 잔고까지 적어서가 아니다. 영화가 자본주의 세상의 '집단적 환각'을 벗겨내고 그 자리에 또 다른 '개인의 환상'을 입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집단적 환각은 이런 것이다. '키, 연봉, 학력 같은 조건을 기준으로 배우자를 고르면 행복한 결혼생활이 가능하다.' 루시는 이 환각을 그럴듯하게 그려내어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전문가였으나, 이 환각이 거짓이라는 걸 목격하는 동시에 체험한 다음 사랑만이 진실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즉, 영화가 해체하려 했던 것은 결혼 시장의 물질주의다. 사람을 상품화하는 시스템, 조건으로 가치를 매기는 논리, 그 안에서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자기 파괴. 여기까지는 날카롭다.
그런데 그 해체의 끝에서 영화가 제시하는 대안은, "그래도 진실한 사랑"이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낭만이다. 물질주의의 허구 반대편에 진실한 사랑을 놓는 것. 이것은 해체가 아니라 치환이다. 집단적인 환각을 벗기는 대신에 개인에게 환상을 주입하는 것이다. 조건이 아닌 영원한 사랑. 시장 가치가 아닌 마음의 가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야말로 진짜라는 믿음. 아름답다는 명제 역시 환상은 아닐까?
집단적으로 취해서 맹목적으로 동조하는 환각에서 빠져나와 도달한 곳이 개인에게 검증되지 않은 미래를 강요하고 감내하게 하는 환상이라니.
더 솔직하게 말하겠다. 영화에서 제일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 루시다. 제일 이해가 안 되는 결정이 루시가 존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이다. 루시는 영화 내내 결혼 시장의 논리를 가장 정밀하게 이해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수천 건의 매칭을 성사시킨 전문가. 조건의 교환이 결혼의 본질이라는 것을 뼈에 새긴 사람. 루시와 존은 기념일에 주차비 때문에 길거리에서 싸웠고, 루시는 "돈 없는 걸로 미워하기 싫은데 지금은 네가 너무 미워서 나 자신이 너무 싫어"라고 말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야. 빈털터리라 그런 거지"라고 말한 것도 루시다. 자포자기한 듯이 존은 "너 행복하게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라고 한다.
한번 더 루시는 인정한다. "너랑 결혼하기로 하면 평생 싸구려 식당에서 마주 앉아 서로를 보겠지. 거지같은 차 타고 거지같은 집에서 살고. 25달러 갖고 싸울 거야."
그런 사람이 영화 끝에서 "재정적으로 형편없는 결정"에 "Deal"이라고 답한다면, 그 변화의 과정이 관객에게 체감되어야 한다. 그런데 나에게는 체감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매칭한 남녀 사이에서 발생한 성범죄, 성범죄 피해자가 쏘아붙이는 말들, 유니콘으로 보였던 해리의 정체 등 일련의 사건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루시의 인생 전체에서 굳게 믿어지고 있는 가치관을 실질적으로 위협했고, 관점과 태도, 행동까지 한꺼번에 바꿔낼 수 있었던 이유와 루시의 내적인 고뇌, 생각의 변화를 더욱 치열하게 그려냈어야 했다.
사유하지 않는 주인공은 당연히 영화가 의도한 것이다. 이것이 문제이다. 영화가 이 논리적인 비약을 결함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설명 없는 도약 자체를 사랑의 순수성의 증거로 연출한다. 계산을 내려놓는 순간이 곧 진심이라는 듯이. 그러나 이것은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는 오래된 클리셰에 기대는 것이고, 이 영화가 그토록 정밀하게 해체하려 했던 바로 그 단순화를 영화 스스로 반복하는 것이다.
결혼 시장은 사람을 숫자로 납작하게 만들었고, 영화는 사랑을 도약으로 납작하게 만든다. 결국 루시라는 인물은 물질과 사랑이라는 양 극단 사이를 오갈 뿐, 그 사이에 머무는 법이 없다.
영화 전반부에서는 철저한 계산기이고 후반부에서는 철저한 낭만주의자다. 계산과 감정이 동시에 작동하는 순간, 조건을 알면서도 흔들리고 흔들리면서도 계산하는, 실제로 사람이 결혼을 결심할 때 겪는 복잡한 중간지대가 루시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물질주의를 비판하는 영화가, 물질 아니면 사랑이라는 이분법 안에서만 움직이는 여성 주인공을 만든 것이다.
3. 똥차 가고 벤츠 온다.
그렇게 루시는 존을 선택한다. 정확히는, 영화가 루시로 하여금 존을 선택하게 만든다.
영화의 구도에서 해리는 공허한 물질의 세계를, 존은 순수한 사랑의 세계를 대표한다. 따라서 루시가 해리를 떠나 존에게 가는 것은 물질에서 사랑으로의 이행일 것이다. 똥차 가고 벤츠 온다는 말도 있듯이, 본래 지난 연애가 실패하면서 아프게 얻은 깨달음은 다음 연애에서 지혜로 발휘되어 결국 더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정되는 진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리는 똥차였을까? 존이 과연 벤츠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돈이 많은 남자의 프러포즈는 꿍꿍이가 있는 것으로, 돈이 없는 남자의 프러포즈는 진심인 것으로. 이토록 쉬운 이분법은 이 영화의 근본적인 한계이면서, 가난한 남자의 순정이라는 환상에 빠진 여자들이 단단히 조심해야 하는 함정이다.
해리는 자기 다리의 흉터가 드러난 순간에 방어하지 않았다. 공격하지도 않았다. 유니콘의 껍데기가 벗겨진 순간에 168센티미터라는 원래의 키로 살던 본인이 얼마나 자신감이 없었는지를 고백할 뿐이다. 그리고 뼈를 부러뜨리고 철심을 박아서 얻은 180이 넘는 키가 자신에게 환대와 기회를 주었음을 인정한다. 이별을 고하는 루시의 결정을 비난하지 않고 존중하며, 자신의 상처를 발견한 루시 역시 상처 입히기 위해 루시를 깎아내리지 않는다.
루시에게 등 돌려 슬프게 되뇌인다. "사랑 앞에서는 바보가 되는 기분이에요. 철부지 어린애처럼 그걸 생각하거나 원하기만 해도 한심하게 느껴져요. 난 그게 너무 어려워요." 이것은 고백이다. 자기가 무엇에 취약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아는 사람의 말이다.
이 장면에서 해리에게는 오히려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의 가능성이 보였다. 자기 결핍을 정면으로 응시할 줄 아는 사람. 루시가 "누굴 사랑하게 되면 쉬워질 거예요, 계산 없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상대는 해리였다.
그렇다. 존은 루시를 사랑한다. 아주 쉬운 일이라고 말한다.
"널 어떻게 사랑하냐고 했지? 그냥 사랑하는 거야. 그게 나한텐 제일 쉬운 일이야."
그리고 존은 루시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냐고 묻는다.
"너 행복하게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기념일에 그깟 주차비 때문에 고급 식당에 가네 마네 하면서 차도 한복판에서 싸울 때, 루시가 상처와 욕망이 뒤섞인 말을 내뱉으며 지독한 자기혐오에 괴로워할 때에 존은 "돈이 없어서 그래, 깜빡했어."라고 응수한다.
뷔페에서 서빙하다 루시와 재회했을 때, 루시가 배우 생활이 괜찮냐고 묻자 "괜찮아 보여?" 질문에 질문으로 받아치고는 곧바로 방어적이었다며 사과한다.
루시와 키스하다가 불쑥 밖으로 뛰쳐나간 다음, 그를 붙잡기 위해 쫓아온 루시에게 소리친다. "내가 가치 없는 놈이야? 쓰고 버리는 물건이야? 내가 불쌍해? 앞가림도 못하는 딱한 놈이라서?"
계속 소리친다.
"친구로선 37살 먹고도 룸메랑 살면서 뷔페 뛰는 사람 만나는 건 말리고 싶어. 이렇게 말해야겠지. 잔고가 달랑 2,000달러뿐이고, 감당도 못하는 도시에 살고, 옛날에 누가 잘한다고 했다고 연극배우 판에서 버티는 놈은 만나지 마라. 지금 우리 꼴이 뭐야? 여기 남의 결혼식에나 오고. 결혼식도, 결혼생활도, 나랑 하면 맘에 안 들 거야. 난 네가 원하는 연애도 해줄 수 없고, 시간이 흘렀는데도 너와 함께할 여력이 없어."
존의 대화에는 일관된 구조가 있다. 자기비하를 선제적으로 꺼냄으로써 상대가 반박의 자리에 서게 만드는 것. "37살 먹고도 룸메랑 살면서 뷔페 뛰는 사람 만나는 건 말리고 싶어"라고 말하면, 루시에게 남는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동의하거나("맞아, 우린 안 돼") 부정하거나("아니야, 그래도 널 사랑해"). 존의 자기비하는 루시에게 사랑을 증명할 것을 요구하는 구조다. 현실을 알려주는 척하면서 상대의 사기를 꺾고, 자기 무가치함을 선언하면서 상대가 그 무가치함을 부정해 주기를 기다린다.
즉, 존이 보호하는 것은 존 자신이다. 상대가 자신을 거부하기 전에, 먼저 거부의 논거를 제공하는 것.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라는 선언은 겸손이 아니라 보험이다. 그렇게 말해놓으면, 상대가 떠나도 "그러니까 말했잖아"가 되고, 상대가 남으면 "이런 나를 사랑해 주다니"가 된다. 어느 쪽이든 존은 상처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존의 마지막 프러포즈, "종신 보증이야, 흥정은 안 돼, 이것 말곤 내놓을 게 없거든" 도 같은 패턴의 연장선에서 읽힌다. 이것은 프러포즈인 동시에 면책 조항이다. "내놓을 게 없다"고 먼저 선언해 두면, 앞으로 무엇을 제공하지 못하더라도 "처음부터 없다고 했잖아"가 된다. 루시는 이 면책 조항에 "Deal"이라고 서명한 것이다.
해리는 "사랑이 어렵다"고 말했고, 존은 "사랑은 나한텐 제일 쉬운 일"이라고 말했다. 사랑이 쉽다고 말하는 사람과 사랑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 중, 누가 사랑에 대해 더 정직한 것일까. 적어도 나에게는 사랑이 어렵다고 말하는 쪽이 더 믿음직하다.
4. 계속되는 증명
누군가는 내가 너무 냉소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조건이 결혼생활의 행복을 담보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만큼 진실하고, 가난이 진실한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는 말에도 동의하지 않을 만큼 분별 있을 뿐이다.
다음 주, 이어지는 글은 계속해서 '사랑과 결혼'의 전제와 논리에 대한 전면적 반박이다.
양귀자의 <모순>에서 스물다섯 안진진이 빠지는 문제적 모순 또는 모순적인 문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문제에 대한 놀라운 증명을 알고 있으나, 여백이 부족해서 여기 적지 않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