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극, 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고도를 기다리며>, <대머리 여가수> 같은 유명한 작품의 이름 정도는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막상 어떤 작품인지, 부조리극이 무엇인지 설명하려 하면 말문이 막힌다. 반복되는 대사들, 명확한 플롯 없는 전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결말 등에 어쩌면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라는 생각도 들 수 있다. 필자가 그랬으니 말이다.
그러나 조금 더 들여다보면 부조리극은 ‘어렵기 위해 어려운’ 예술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부조리극은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언어, 시간, 인과관계, 일상적 대화-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묻는다. 이게 정말 의미 있는 것이냐고 말이다.
이 오피니언에서는 부조리극이 탄생한 배경과 그 핵심 개념을 살펴보고, 이오네스크의 <대머리 여가수>를 위주로 부조리극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들여다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50년에 쓰인 이 희곡이 어떻게 지금 이 순간의 우리와 닿아 있는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부조리극은 어디서 왔는가
부조리극은 1961년, 비평가 마틴 에슬린이 당대 유럽 극작가들-사뮈엘 베케트, 외젠 이오네스코, 아르튀르 아다모프 등-의 작품들을 사후적으로 묶으며 '부조리극(Theatre of the Absurd)'이라 명명했다. 그는 이들의 공통된 특성을 "통일된 원리, 의미, 목적을 상실한 와해된 세계, 즉 부조리한 우주의 그림을 극화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 사조의 배경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있다. 베케트, 이오네스코, 아다모프는 전쟁 중 파리에서 직접 독일 점령을 경험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아우슈비츠의 학살 등의 거대한 폭력 앞에서 인간의 이성, 언어, 도덕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문명과 이성에 대한 믿음이 근본적으로 흔들린 것이다. 하이데거는 삶이란 전율과 공포가 뒤섞인 '고뇌'라 했고, 카뮈는 인간은 세상에 '내팽개쳐진 존재'라고 했다. 부조리극은 이 철학을 논문 대신 무대 위 상황으로 구현한 예술이었다.
'부조리'라는 개념 자체는 카뮈, 올비, 이오네스코 세 갈래로 나뉘어 읽힌다. 카뮈는 부조리를 "인간 자신과 그의 삶 사이의 괴리감"으로 보았다. 상실한 고향에 대한 기억도, 약속의 땅에 대한 희망도 없이 유배된 상태. 에드워드 올비는 부조리를 인간이 세운 도덕적·종교적·사회적 구조가 붕괴된 세계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으려는 절박한 시도로 보았다. 이오네스코는 더 직접적이었다. "부조리란 목적이 없는 것이다. 종교적, 형이상학적 뿌리로부터 단절될 때 인간의 모든 행동은 무의미해진다."
에슬린이 이렇게 다른 작가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언어에 대한 태도였다. 내용과 기법이 제각각이어도, 부조리극 작가들은 모두 언어 자체의 비논리성과 공허함을 무대 위에서 부각시켰다.
부조리극이 언어를 해체하는 방식은 크게 네 가지다. 의사소통의 단절과 언어-행위의 모순, 반복되는 진부한 말, 의미보다 리듬과 소리가 앞서는 순간, 그리고 사실주의적 언어가 아닌 우화적 언어의 사용.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나누는 욕설 교환은 언어가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공허한 소음임을 드러낸다. 그들은 돌아서고, 멀어지고, 다시 돌아와 마주본다. 이 반복적 행위 자체가 언어의 무의미성을 극적으로 재현한다. 〈수업〉에서 교수와 학생이 나누는 산수 대화는 논리와 언어가 완전히 해체되면서 두 사람 사이의 소통 불가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대머리 여가수〉가 있다. 스미스 부부와 마아틴 부부는 "시골은 도시보다 더 조용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서로에게 굳이 확인시키는 무의미한 대화를 나눈다. 인물들이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나란히 앉아 반복하는 이 장면이야말로 삶의 부조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순간이다.
부조리극은 구조 면에서도 기존의 연극 문법을 정면으로 해체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제시하는 전통극은 시작-중간-끝의 플롯과 폐쇄적 구조를 가진다. 갈등이 쌓이고, 절정을 맞고, 해소된다. 부조리극에는 이 모든 것이 없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플롯도, 실질적인 갈등을 이끄는 인물도 없다. 대신, 이미지의 패턴을 통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우주에 포위된 혼란과 근심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고도를 기다리며〉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도를 기다리며 끝나는 순환 구조를 가진다. 〈수업〉은 40번째 학생을 죽이고 41번째 학생을 맞이하는 직선 반복의 구조를 가진다. 두 구조 모두 발전과 진보를 거부한다. 문명의 진보에 대한 불신이 구조 그 자체에 각인된 것이다.
또한 부조리극은 비극적 내용을 희극적 형식으로 표현하는 소극(farce)의 특성을 가진다. 우스꽝스럽고 익살스러운 장면이 오히려 부조리의 감각을 더 날카롭게 전달하는 역설적 전략이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부조리극은 허무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조리극은 단순한 허무주의가 아니라, 무의미한 세계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절박한 몸부림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대머리 여가수〉: 부조리의 해부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1950)는 부조리극의 교과서라 불리는 작품이다. 그런데 제목부터가 이미 부조리다. 이 제목은 마지막 총연습 도중 소방관 역 배우가 대사를 실수로 잘못 말하면서 우연히 튀어나온 단어였고, 이오네스코는 그 자리에서 제목으로 결정했다. 게다가 극 안에서 '대머리 여가수'는 소방대장이 퇴장 직전 한 번 툭 던지듯 묻는 것이 전부다. 작품과 사실상 아무 관련 없는 이 제목 자체가, 제목은 작품의 핵심을 담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부조리 장치인 것이다.
작품 안에서 인과관계는 철저히 붕괴된다. 괘종시계가 17번 타종하는데 스미스 부인은 "9시"라고 말한다. 괘종시계의 타종은 실제 시간과 전혀 맞지 않는다. 스미스는 "저 시계는 늘 시간과 반대를 가리킨다"고 하고도 아무도 고치려 하지 않는다. 남자, 부인, 백부, 백모, 어머니 등 전혀 다른 사람들이 '보비 와트슨'이라는 같은 이름을 공유한다. 벨이 울려도 아무도 없는 일이 반복되는데, 소방대장은 "양쪽 다 반반 옳다"고 결론 내린다. 원인과 결과의 논리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순간들이다.
4장 마아틴 부부의 장면은 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힘없이 단조로운 음성"으로 같은 기차를 탔다, 같은 칸에 탔다, 같은 도시에 산다, 같은 집에 산다……를 하나씩 확인해가며 결국 서로 부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부부끼리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서로를 확인해가는 이 장면은 두 겹의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현대인의 소외와 단절이다.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부 사이에서도 진정한 소통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언어의 허약함이다. 논리적으로 "우리는 부부다"라는 결론에 도달했지만, 5장에서 하녀 메어리가 그것이 틀렸다고 폭로한다. 언어로 구성한 논리가 진실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메어리는 이 작품에서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유일한 인물이다. 하녀라는, 사회적으로 가장 주변부의 존재가 역설적으로 진실을 말하는 자로 설정된 것이다. 중류층 부부들의 공허한 세계에 완전히 속하지 않기 때문에, 그 세계의 허구를 가장 잘 볼 수 있다.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다는 것은 극의 환상을 의도적으로 깨는 행위이기도 하다. 관객이 무대에 몰입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이오네스코의 전략이다.
결말은 이 모든 것을 수렴한다. 후반부에 언어는 완전히 해체되어 자음과 모음의 나열만 남는다. 그리고 지문에 따라, 스미스 부부 자리에 마아틴 부부가 앉아 처음의 대사를 똑같이 되풀이하며 극이 다시 시작된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는 공허한 삶의 굴레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 없다는 탈출 불가능성이며, 진보와 발전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고, 부조리 세계의 영속성이다.
그러나 이오네스코의 의도는 단순한 허무주의가 아니다. 극 안의 인물들은 그 굴레에 갇혀 있지만, 관객은 바깥에서 그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언어와 일상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기회를 얻는다. 인식의 가능성이 탈출의 시작인 것이다.
1950년의 부조리, 우리의 일상
〈대머리 여가수〉는 1950년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작품이 묘사하는 세계는 지금 이 순간의 우리와 너무나 닮아 있다.
SNS의 '좋아요'와 댓글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매일 수십 개의 버튼을 누르고 수십 개의 반응을 단다. 그것이 진심 어린 감정 표현인 경우는 얼마나 될까. 많은 경우 그것은 자동화된 반응이고, 관계를 유지한다는 형식적 신호에 가깝다. 마아틴 부부가 "힘없이 단조로운 음성"으로 확인을 주고받는 것처럼, 우리는 하트를 누르고 이모지를 달면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는다.
"잘 지내?"라는 인사는 또 어떤가. 상대의 상태가 실제로 궁금한 경우는 드물다. 그것은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주문이고,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의례다. 스미스 부부가 서로에게 나누는 공허한 대화처럼, 우리의 형식적 안부는 언어이되 소통이 아니다. 정치인의 연설도, 뉴스 헤드라인도 다르지 않다. 매번 같은 수사, 같은 약속, 같은 구도. 수많은 말이 쏟아지지만 실질적 소통보다는 소음에 가깝다. 〈대머리 여가수〉의 결말처럼, 말들이 반복되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이오네스코는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비논리적인 시계와 우연히 생긴 제목과 해체된 언어를 사용했다. 우리에게는 그런 장치가 필요 없다. 우리의 일상 자체가 이미 부조리극의 무대다. 부조리극이 낯설고 추상적으로 느껴진다면,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그 안에 너무 깊이 들어와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마아틴 부부처럼, 그 굴레 안에서는 굴레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부조리극을 본다는 것은, 무대 위의 인물들이 갇힌 그 반복을 바깥에서 바라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다. 그것이 이오네스코가 원했던 것이고,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부조리극이 유효한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