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괴물'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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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영화를 봐왔다. 그중에도 분명 인생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이 있다. <괴물>이 그렇다.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스크린이 꺼진 뒤에도 머릿속에서는 무언가가 계속 남아 있었다. 그 무언가는 장면이 아니라 감정이었다. 더 정확히는 부끄러움이었다.
<괴물>은 세 번 시작된다. 같은 사건이, 같은 시간이, 세 개의 시선으로 반복된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눈으로, 그다음에는 교사의 눈으로, 마지막에는 두 소년의 눈으로. 그리고 매번 우리는 전혀 다른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단정 짓는가

첫 번째 파트가 끝날 무렵,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가해자를 정해두고 있었다. 교사 호리는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고, 학교는 조직적으로 침묵하고 있었으며, 아이는 다치고 있었다. 모든 정황이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두 번째 파트가 시작되자 그 확신은 조용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내가 본 것은 사실이 아니라 사실의 일부였고, 그 일부를 전부라고 믿는 순간 누군가는 이미 괴물이 되어 있었다.
고레에다는 관객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을 근거로 판단했는가. 생각해 보면 우리는 늘 타인의 삶을 단편적으로만 본다. 몇 마디 말, 짧은 장면, 한 번의 행동으로 사람을 규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은 좀처럼 의심하지 않는다.
영화가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파트에 이르면 영화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미나토와 요리의 이야기는 조용하고, 섬세하고,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버려진 기차 안, 풀밭 위, 좁은 터널 속에서 두 소년이 나누는 언어는 말보다 침묵에 가깝다. 설명할 수 없는 마음들이 눈빛과 몸짓 사이를 오간다. 고레에다는 두 소년의 마음을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이 함께 웃고, 뛰고, 숨는 순간들을 오래 비춘다.
그래서 세 번째 시선에 도착했을 때 관객은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눈앞에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을 뒤늦게 마주하게 된다. 어른들이 사건의 원인과 책임을 찾아 헤매는 동안, 정작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언제나 아이들의 마음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아이들은 누구보다 순수했고 누구보다 외로웠다. 폐열차 안의 세계는 낡고 비좁았지만, 그곳만큼은 누구의 판단도, 시선도 닿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만 두 소년은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됐다.
괴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영화 속에는 전형적인 악인이 없다. 학교는 체면을 지키려 했고, 어머니는 아들을 보호하려 했으며, 교사는 자신의 방식으로 아이를 이해하려 했다. 모두가 나름의 이유와 선의를 가지고 움직인다.
그런데도 상처는 남는다. 아마 영화가 말하는 괴물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닐 것이다.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은 채 결론을 내리는 마음, 이해보다 판단을 먼저 선택하는 태도,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오해의 연쇄. 괴물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사이에서 조금씩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범인을 찾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해에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엔딩에서 두 소년은 환한 빛 속으로 달려 나간다. 그것이 해방인지, 희망인지, 혹은 우리가 끝내 알 수 없는 어떤 세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순간만큼은 누구의 시선에도 규정되지 않은 채 가장 자유로워 보였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했다고 믿었던 순간들은, 사실은 이해가 아니라 추측에 가까운 판단이었는지도 모른다.
괴물은 누구인가. 그리고 가장 오래 외면해 온 답은, 어쩌면 누군가를 전부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우리의 확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