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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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소리가 들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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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하이카라는 <운수/로테>를 통해 <운수 좋은 날>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재조명한다. 이 작품은 김첨지와 베르테르를 중심으로 전개된 서사를 로테와 운수의 시선으로 다시 이야기한다. 우리는 로테와 운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대개 베르테르와 김첨지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 작품이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아름답다 말해지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란 이름 아래 자행된 폭력을 내면화한 여성들의 목소리다.


제자 베르테르의 장미꽃 한 송이를 받은 이후로 삶이 지축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로테. 가정폭력 끝에 남편을 살해한 뒤 법정에 선 운수. 전혀 다른 시공간과 문화권에서 창작된 작품이지만,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이들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아름다워서, ‘사랑해서’ 따위의 말들로 무시되는 그들의 괴로운 삶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아니 상상하지 않은 것들이다.

 

 


가시화되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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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와 운수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타자의 목소리는 텍스트를 통해 재현되거나 녹음된 파일을 통해 나타난다. 이 무대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로테와 운수의 몸이다. 폭력 아래 억압되고 억눌린 그들의 몸.


들어줄 이가 없을 때, 심지어 나조차도 내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을 때, 말이라는 것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구조적인 폭력을 답습하고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운수와 로테의 몸은 자신들의 목소리마저 스스로를 외면한다. 그들은 소리치고, 울면서 발버둥치지만 ‘말을 해, 말을.’이라는 억압만이 그들에게 선연하게 내려앉아 있다. 그들은 그리하여 폭력을 몸으로 쓰고, 먹을 벽에 칠함으로써 가시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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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운수>를 보면서 감탄했던 것은 연출이었다. 로테가 삶의 폭력을 진술할수록, 그녀의 몸에 겹겹이 쌓였던 공포와 괴로움처럼 무대 바닥은 먹으로 검게 칠해진다. 로테는 점점 밟을 수 있는 공간을 잃어간다. 오로지 캄캄한 먹, 어둠만이 그녀의 발밑을 끝없이 살라먹는다.


운수가 법정에서 진술할 때마다, 마치 운수의 내면 자아를 연기하는 듯한 또 다른 여성은 먹을 손에 바르고 벽에 글씨를 쓰기 시작한다. 그것은, 운수가 가해자에게 들어왔던 목소리다. 검은 먹은 마치 그녀의 목소리를 묵살하듯 그 위로 가해자의 음성을 덧바르기 시작한다. ‘먹어도 병, 못 먹어도 병. 어쩌란 말이냐.’, ‘오라질 년’, ‘말을 해. 말을.’ 따위의 것들이다.

 

 

 

사랑과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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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묻는다.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그 폭력이 정말로 사랑이었냐고. 아쉬웠던 점은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가해자들의 폭력보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주목하고, 피해자들이 어떤 구조적인 방관에 처했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이 속에서 가해자의 사랑이 진실되었느냐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폭력이 사랑과 진실성이라는 감정의 영역으로 치환되는 순간 작품은 폭력이라는 죄에 치중될 중심을 잃게 된다. 진실한 감정의 문제는 이 문제를 개인화할 수밖에 없고 가해자 중심으로 만든다. 그것이 사랑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로테와 운수의 아픔, 삶이다. 사랑의 진실성으로 중심이 흐려지면 이 이야기는 결국 다시 김첨지와 베르테르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한편으로 이 작품에는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과거와 과거, 혹은 현재뿐이다. 로테가 겪었던 과거와 운수가 겪는 현재. 운수와 로테가 함께하는 다음 단계가 없다. 고전의 재해석에 주목할 뿐, 그리하여 지금 왜 이 두 이야기가 무대에 올라야 하는지는 다소 모호하게 남는다. 운수와 로테는 유사한 폭력의 구조 안에 놓여있지만, 작품은 두 인물이 왜 함께 병치되어야 하는지 제시하지 않는다. 그 결과 관객은 두 여성의 고통을 목격할 수는 있지만 그 고통이 현재와 그 이후의 삶을 향해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지는 발견하기 어렵다. 작품 속에서 두 여성의 경험이 현재적 연대로 이어졌다면, 이 이야기는 과거의 폭로를 넘어 앞으로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고전을 여성주의 입장에서 재해석하는 데에 목적이 분명한 것으로 충분할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아쉽다. 공연예술의 특징은 지금 하나의 시공간 속에서 관객과 무대 두 이야기가 공존한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함께하는 미래 역시도 상상되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운수와 로테가 반드시 여기에 호명되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그리고 그들이 왜 함께 이야기되는지를 말한다면 극이 더 분명해질 수 있지 않을까. 재해석이 미래에 대한 상상까지 품어야 하는 이유는 작품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의 삶이 부재할 때, 여성의 목소리는 증언의 차원에 머무르게 된다. 이 작품은 침묵의 역사를 드러내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그 침묵을 넘어선 삶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다소 소극적이다.


<운수/로테>는 침묵 당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무대 위로 불러낸다. 그러나 이들이 왜 지금 함께 소환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목소리가 앞으로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질문을 남긴다. 어쩌면 여성주의적 고전 재해석이 대답해야 할 것은 과거의 폭력에 그치지 않고 그 이후의 삶까지 다뤄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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