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화가들의 공통점은 그림을 위해 파리로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순간까지도 붓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자신들의 생의 궤적을 작품 속에 녹여냈다.
그들이 품었던 가장 깊고 오래된 고민은 '자신이 지금 느낀 감각, 감정을 어떻게 온전하게 표현해낼 것인가'에 대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투쟁했고, 전통의 질서를 지키려 노력하기도, 그 질서에 정면으로 맞서기도 했다. 갑작스레 사랑을 만나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사랑을 잃은 후 칠흑 같은 어둠을 화폭에 옮기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 모든 이야기가 현재의 나에게까지 전달되었다는 건, 결국 그들이 그런 순간들마저도 그려내는 것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어둠은 어두운 대로, 밝음은 밝은 대로. 그들은 그려야 살 수 있었다고 말하지만, 살아냈기 때문에 그림이 그려질 수 있었다.
저자는 그들의 숨결과 일생을 머금은 채로 파리의 골목골목을 걷는다. 이 책이 보여주는 미술관은 어딘가 SNS와 닮아 있다. 다만 SNS가 삶의 찰나를 포착한 사진 한 장의 멋이라면, 그림은 완성되기까지 긴 시간 동안 붓을 쥐고 자신이 세상에 보이고자 하는 바를 끈기 있게 그려내야만 한다. 그 시간 속에는 처음의 의도와 달리 손에 힘이 들어가는 날도, 유독 밝은 색채를 쓰고 싶은 날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중첩된 시간 끝에 완성된 작품이 어떤 모습을 띨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림을 그린 화가조차도, 완성된 작품을 마주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진짜 감정을 알아차리기도 하니까.
순간의 감정을 즉시 업로드하고, 순식간에 세상에 퍼지며 직관적으로 의도가 닿는 SNS와 달리, 그림은 감정들을 한 번의 붓질과 연필의 스침으로 느리게 쌓아 올린다. 관객은 완성된 작품 속 시간의 손길을 따라가며 화가의 마음을 추측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마음에 천천히 머금는다. 바로 여기에 그림만이 가지는 매력이 있다.
그래서 예술작품은 자연스럽게 창작자의 내밀한 면을 품어 낸다. 은밀하게 숨기고 싶었던 감정까지도 뜻밖의 선과 색으로 새어 나오고, 담아내고 싶었던 세계 역시 의도대로 표현되지 않고 뒤틀리기도 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술은 흥미로워진다. 오늘날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도, 과거에는 누구도 봐주지 않고 전시조차 어려워 집 한구석을 차지하는 짐에 불과했던 시절이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미술관에 걸리지 못한 채 당대의 비판만 가득 받았던 그림이, 세월이 흘러 재평가되어 세계적인 미술관 중심에 걸리고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까지 불러들이는 작품이 되기도 한다.
*
어떤 시대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생각과 감각이, 시간이 흐른 뒤에는 무수한 사람의 지지를 받는 선구적인 안목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이는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에게 기묘한 위로와 용기로 다가온다.
수잔 발라동은 열다섯 살에 생계를 위해 몽마르트르에서 모델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며 생활의 여유가 생긴 뒤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1909년에 그녀가 그린 작품 <아담과 이브 Adam et Eve> 속 아담은 여성이 그린 최초의 남성 누드로 알려져 있다.
여성이 대상화되는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흔했다. 여성 누드 작품은 누구나 떠올리기 쉬울 정도로 많았고, 그 속에서 여성들은 수많은 변신을 감내해야 했다. 때로는 요정이나 여신으로, 혹은 도시나 시골의 여인처럼 누군가 상상한 존재로 끊임없이 왜곡되고 그려졌다. 그렇게 여성은 오랫동안 타인의 시선과 표현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니 1909년에 이르러서야 남성의 누드가 여성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은 2026년을 살아가는 나에게 여러 의미로 다가온다. 수잔 발라동은 이미 그 시대의 그림을 통해, 지금 현재의 여성들이 소리 내어 외치는 이야기들을 먼저 건네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모델은 화가를 위해 다른 누군가가 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자기 자신으로 당당히 존재를 드러내고 있으면 되었다. 일부러 아름답게 꾸밀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의 옷을 입을 필요도 없었다. 나신으로 서 있어도, 그들은 자기 몸의 주인으로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존재 자체로 중요하며 그 자체가 아름다운 빛을 낸다고 수잔은 그림으로 말한다. (221p)
<파리의 작은 미술관>에는 저자의 시선과 감상이 세심하게 문장 속에 녹아있다. 이 책은 한 화가가 살았던 시간, 그 당시에 품었던 생각과 감정, 겪어야 했던 시련과 그 속에서 이뤄낸 성장까지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만든다. 저자는 화가들이 남긴 이야기와 편지 속 한 문장까지 최대한 가득 품에 안은 채 미술관을 거닐고 작품을 바라본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정한 스토리텔링은 기어이 미술관도, 화가도 잘 몰랐던 나 같은 독자에게까지 그들의 숨결을 전해준다.
과거를 살다 간 예술가에게 애정을 품고, 이해하려는 그 마음이 결국 예술이 지니는 힘이 된다. 과거의 인물이 사라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기억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 어떤 힘으로 피어나게 하는 것. 끝내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 배움은 현재를 잘 살아낼 수 있는 이정표가 되기도, 어떤 걸음도 멈추지 않게 하는 용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미술관을 찾는 이유는 위대한 작품을 직접 감상하는 것에만 있지는 않다. 위대한 작품 뒤편에 숨은 화가의 평범한 생활, 그 안에서 느껴지는 나와 비슷한 고민들,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나는 그들의 일상과 거장의 화실에서 느껴지는 과거의 숨결. 그것들이 주는 묘한 매력이 우리를 계속해서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 사소한 겹침은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힌트를 건네는 것 같다. 평범한 길도 피카소가 걸었고 들라크루아가 오갔던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 길은 갑자기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누군가 그 길 위에서 치열하게 꿈을 꾸었고, 때로는 무너지기도 했으며, 열렬한 사랑 끝에 작품을 완성시켰다. 그들의 육체가 사라진 뒤에도 그 작품들은 그들을 영원히 잊히지 않게 하는 매개가 되어주고 있다.
*
내가 품은 사소한 걱정 하나가 하루를 뒤흔들기도 하고, 작은 두려움 하나로 발걸음을 떼기 어려운 순간이 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대신 힘을 줄 수도 없는, 결국 스스로 움직여야만 하는 순간에 우리는 가장 쉽게 자기 자신을 탓하곤 한다. 무언가를 원망하고 싶을 때 가장 만만하고, 상처 주기 쉬운 대상은 언제나 나 자신이 되었다.
삶은 짧다고들 하지만 우울과 슬픔, 불안과 두려움이 겹쳐오는 날에는 한없이 길게만 느껴진다. 자책 아래 놓인 하루는 어둡고, 지난하며, 끝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쉽지 않더라도 나를 탓하는 굴레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어야 한다. 나를 조금 덜 미워할 수 있게 해주는 무언가를.
그 방법 중 하나는 다른 누군가의 실수와 자책의 흔적을 들여다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와 비슷하게 흔들렸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지금은 대단한 인물로 추앙받지만 그 역시 나와 같은 스치는 두려움에 발이 묶이기도 했고, 실패와 자책을 수차례 거듭하면서도 결국 살아내고, 완성해냈다는 것. 그 흔적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한 줄기 위안을, 조금은 가벼운 밤을 안겨준다. 하물며 그 인물이 내가 존경하던 거장이었다면 그 위력은 더욱 거대해진다.
거장들의 집안 가득 남겨진 이야기와 숨결이 묻은 공간이 여전히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곳에서 우리는 위대한 결과 뒤에 숨겨진, 한 사람이 치열하게 견뎌낸 시간을 만날 수 있다.
정답만이 가득하고, 점점 오답을 허용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나는 사람의 숨결이 많이 묻은 예술 작품에 마음을 주지 않을 수가 없다. 실수와 어둠, 사랑과 어리석음, 용기와 망설임, 젊음과 늙음의 순간들이 모조리 선과 색에 담긴 작품들을 나는 계속해서 좇으며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다. 그들의 생의 굴곡을 함께 걸어보며, 나의 생의 굴곡마저 기꺼이 경험하는 용기를 얻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