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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아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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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아이들>(극단 돌파구, 전인철 연출)의 무대는 단출하다. 검은 벽이 삼면을 둘러싸고 있고, 중앙에는 일인용 소파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인물들이 함께 소파에 앉아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없다. 누군가 앉아 있으면 누군가는 서 있어야 한다. 전화기, 물컵 같은 소품도 무대 가장자리에 흩어져 있다. 가정집이지만, 누구도 편안하게 머물지 못하는 공간이다. 이 불편한 무대 위에서 로즈와 헤이즐, 로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연극은 은퇴한 원자력 과학자 부부 헤이즐과 로빈 앞에 과거의 동료 로즈가 불쑥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28년 만의 재회다. 예상치 못한 방문에 당황한 헤이즐은 실수로 로즈의 코를 깨 버리고, 피와 함께 어색한 재회가 이어진다. 오랜만에 만난 것치고는 반가움보다 긴장감이 흐른다. 세 사람은 과거에 어떤 관계였을까, 로즈는 왜 옛 동료들을 찾아온 걸까. 연극은 이러한 질문을 바탕으로 일종의 미스터리극처럼 전개된다.
사실 이야기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모티브로 창작된 이 작품은 재난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조명한다. 무대 위에서 보여 주는 것은 어느 저녁의 몇 시간이지만, 그 아래에는 묵직한 과거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세 사람은 젊은 날에 핵 발전소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들이 은퇴하고 난 뒤 핵사고가 벌어지면서 세 사람은 사고의 피해자이자, 핵 발전소를 만든 책임자라는 아이러니한 위치에 서게 된다. 물론 국가의 주도로 핵 발전소를 만든 것이지만, 이들은 실무에 구체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책임을 느낀다.
<아이들>의 미덕은 이러한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인물들을 특별히 숭고한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연극은 핵사고와 관련된 이야기와 함께, 로즈-로빈-헤이즐의 삼각 관계를 한 축으로 배치한다. 로즈와 로빈이 과거 연인 관계였다는 사실, 로빈과 헤이즐이 결혼한 이후에도 로즈와 로빈이 관계를 이어갔다는 사실, 헤이즐이 로빈을 붙잡기 위해 임신을 계획했다는 사실 등이 차례로 드러난다. 얼핏 재난 서사와 무관해 보이는 사적인 이야기들이다.

이 개인 간의 갈등 서사는 인물의 캐릭터성을 분명히 다지면서도, 이들을 평범한 인간으로 그려낸다. 로즈, 로빈, 헤이즐은 욕망하고, 질투하고, 실수하는 인간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핵사고에 가지는 책임 역시, 추상적인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로 다가온다. 로즈는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고자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헤이즐은 어떻게든 일상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로빈은 죄책감 때문에 죽음에 대한 충동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로즈는 두 사람에게, 핵 발전소로 돌아가 잘못을 바로잡자고 말한다. 거기에 들어가 있는 '아이들'을 대신해서 우리의 실수를 감당하자고 말이다. 그것이 로즈가 옛 동료들을 찾아온 이유였다.
연극이 세 인물을 통해 재난을 보여 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재난의 스펙터클은 없다. 다만 연극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재난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보통 사람들이다. 수십 년 전의, 그것도 의도하지 않았던 잘못을 왜 책임져야 하는가. 과학자의 양심 때문에? 국가를 구하기 위해서? 그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이니까?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어느 정도의 결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들은 다른 답을 내놓는다.
연극 <아이들>은 제목처럼 그 답을 '아이들'에게서 찾는다. 실제로 작품에는 '아이'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 사람의 대화 속에는 여러 아이가 등장한다. 이 '아이들'은 로빈과 헤이즐의 딸 로렌이기도 하고, 로빈이 욕망하던 소녀 피오나이기도 하며, 핵 발전소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이기도 하다. 여기서 '아이'는 '나이가 어린 사람'을 이르는 사전적인 의미보다는 '기성세대의 영향을 받는 사람'에 가깝다. 로렌은 서른이 넘었는데도 부모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돌봐줄 사람 없이 자란 피오나는 부적절한 욕망의 대상이 되며, 익명의 젊은이들은 값싼 인력이 되어 핵사고의 뒤처리를 맡는다. 이 아이들은 단순히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성세대가 남긴 흔적을 떠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연극을 보며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 나온 시 <어딘가 묻어 있는 잘못>이 떠올랐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잘못을 남긴다. 그리고 언젠가 그것을 마주하게 된다. <아이들> 속 재난은 인간이 만든 재난이다. 또한 로즈, 로빈, 헤이즐 관계의 책임도 세 사람에게 있다. 작품은 사회적 재난과 일상에서 남기고 있는 잘못들을 나란히 놓으며, 이것을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화장실 물이 넘친 장면도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수압이 약한 헤이즐의 집에서 용변을 본 로즈 때문에 화장실의 물이 넘친다. 헤이즐은 분통을 터트리고 로빈은 대수롭지 않게 바닥을 닦는다. 이 장면은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한편, 강력한 은유로 작용한다. 우리가 남긴 똥, 우리가 남긴 흔적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물을 닦고, 막힌 곳을 뚫으며, 변기의 레버를 다시 내리는 것이다.
결국 로빈은 로즈와 함께 핵 발전소로 들어가기로 한다. 그리고 끝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헤이즐 역시 두 사람을 따라갈 것으로 추정된다. 연극 <아이들>이 이들을 통해 보여 주는 것은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다. 때로는 부도덕했고, 때로는 비겁했던 이들이 자신의 과오를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바로잡는 이야기이다. 이곳에서 살아갈 '아이들'을 위해서.
문득 나와 내 세대가 남기고 있는 흔적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직장인이 하루에 하나씩은 버리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에서도 넘쳐나는 혐오 표현, 귀한 줄 모르고 쓰는 에너지와 그로 인해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 지구의 온도 같은 것들. 우리는 그 흔적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을까. 끝까지 치울 수 있을까. 어른의 자리에 선 지금, 연극 <아이들>의 질문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사진: 극단 돌파구 제공 ©김신중, 김보연 / ©JT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