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불신론자다.
해서 신의 존재를 믿고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거부감은 없지만 신기하다는 생각만큼은 떨쳐낼 수가 없다.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고 불변의 진리를 좇으며 살아가는 사람의 세계는 어떨지 궁금하다. 거기에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모를 어두컴컴한 암흑이나 길을 헤매게 하는 안개가 없을까. 아니면 그 속에서도 이리로 걸어오라며 이끌어주는 빛이 있을까.
내가 그 세계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은 모를 일이다.
블랑슈 저는 세상을 경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두려워한다는 것도 영 맞는 말이 아니겠고요. 제게 세상이란 그 안에서 살 수 없는 환경일 뿐입니다. 아버지, 정말 그래요, 저는 그 소음과 번잡함을 생리적으로 견디지 못합니다. 제일가는 친구들과 있어도 마음이 기껍지 않아요. 길거리의 웅성거림에 벌써 정신이 얼떨떨하고요. 밤중에 깨면 두꺼운 커튼과 침대 휘장을 뚫고 들려오는 이 대도시의 끊임없는 소음, 새벽녘이나 돼야 좀 가라앉을 그 웅성거림에 싫어도 귀를 기울이고 지새우게 됩니다. 제 신경이 이런 시련을 겪지 않게 되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겠지요. 그래요! 아버지는 젊은 장교가 바다를 견뎌내지 못해 왕의 군함에서 복무하기를 단념하는 것을 비난하시겠습니까?
(26~27쪽)
제목이 말하듯 처음부터 끝까지 수녀들의 대화를 보여주는 희극 형식의 전개가 이어진다.
종교에 귀의한 사람들의 언어다 보니 일상적으로 접할 일 없는 단어들이 많이 나온다. 가장 먼저 마주한 난관이 이 부분이다. 몇 장 넘기다 단어를 찾고 또다시 몇 장을 넘기다 단어를 찾기를 반복했다. 수강 신청에 실패한 전공과목의 청강생으로 들어간 학생의 기분이 이럴까 싶었다.
뜻을 찾다 보니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언어의 편린을 엿봤다.
블랑슈 자매는 죽음을 무서워한 적이 한 번도 없나요?
콩스탕스 수녀 없다고 생각해요…… 아니, 어쩌면 있었던 것 같아요…… 아주 오래전,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던 때에.
블랑슈 그 후에는요……
콩스탕스 수녀 어휴! 블랑슈 자매님! 인생이 이내 너무나 재미있는 것으로 보였어요! 그래서 죽음도 역시 그러리라 생각했지요……
블랑슈 그럼 지금은요?
콩스탕스 수녀 음, 지금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삶은 언제나처럼 재미있어 보여요. 나는 분부받은 것은 할 수 있는 한 잘해보려고 하는데 그런 하명 자체가 재미있어요…… 사실, 천주를 섬기는 일을 재미있게 받아들인다고 야단맞아야 할까요?…… 아이들이 매일같이 보여주듯 재미나게 하는 일은 온전히 진심으로 할 수 있지요…… 쉽지 않은 일도 기꺼운 맘으로 할 수 있는 것과 꼭 같이……
(44~45쪽)
원초적 공포라는 건 유전자에 새겨진 일종의 본능이다.
우리는 모두 기본적으로 생명의 유지를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인 만큼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당연하다. 다만 그 죽음 끝에 구원이 있다거나 그 공포를 대신 짊어질 무엇이 존재한다면 이 무서움의 무게가 한층 가벼워질 것만은 분명하다.
수녀들의 대화를 따라가며 점차 이들에게 죽음이란 무엇인지, 내가 두려워하는 죽음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종교의 가르침 아래서 바라보는 죽음은 내가 바라보는 죽음의 선상에서 약 15도 정도 틀어진 위치에 있는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수녀들의 대화는 종교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모두에게 여러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에게는 죽음에 관하여, 누군가에게는 삶에 관하여, 누군가에게는 정답에 관하여 질문한다. 답이 없는 질문이다. 한쪽은 맞고 한쪽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수녀들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틀림의 논리가 아닌 다름의 논리를 빌어 답이 없는 질문의 답을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