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어느 지방, 죽으러 온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검은 숲이 있다. 한 천재 한국인 여성 건축가는 그 근처에 있는 집을 허물고 새롭게 설계한다. 사랑하는 언니와 그의 가족을 생각하며 집을 지었지만,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떠나고 그는 혼자 남겨진다.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돌보지 못한 그는 결국 과로사로 생을 마감하고, 그의 외로운 영혼은 자신이 설계한 집에 깃들어 25년 동안 머무르게 된다.
죽음과 고독의 기운이 스며든 검은 숲의 집을 얻게 된 이유가 단순히 “사기당했기 때문”이라는 그를 보면 긴 시간 동안의 외로움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듯 연극 ‘키리에’는 죽음과 고독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유쾌하게 풀어낸다. 삶이란 본래 그러하듯, 아무리 불행하다고 할지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잠시 행복해질 수 있다. 모든 개념에는 희로애락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의 ‘키리에 엘레이손’에서 시작된 기도가 비극적으로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키리에’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희망을 갈구하는 작품이며, 희비극을 아울러 다루고 있고, 이러한 방식으로 죽음과 고독을 유쾌한 리듬 안에서 대중적으로 풀어낸다.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인 죽음과 고독에 대해서 사랑이라는 거대한 해답을 아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툭 건네는 듯하다.

무대는 단순하다. 사물이나 장식이 많지 않고, 특정 공간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기 쉽지 않다. 공간에 대한 서술적 발화에 시간을 할애하는 법도 없다. 공간 이미지는 오롯이 관객에게 맡긴다. 다른 말로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수행하는 동작이나 표정, 작품의 텍스트에 집중하게 만든다.
배우들의 동선이나 감정 폭에서 다양하게 시도한 연출이 엿보인다. 무대 위 배우 없이 집(건축가)의 독백이 스피커에서 들리며 작품이 시작된다. 집은 마이크를 들고 등장하여 자신이 목소리의 주인임을 알린다. 생목소리로 넘어가기까지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집은 작품의 무게를 덜어주는 역할임과 동시에 각 인물이 가진 고독의 무게를 덜어주기도 한다. 이 과정을 관객인 나에게 투영하자면, 내가 머무르고 있는 집이나 혹은 아끼는 사물에 감정을 이입하고, 그것들이 나에게 전달하고 있는 소음이나 온도를 통해 고독의 문제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
특히 대부분의 사람이 가장 오랫동안 머무르는 ‘집’이라는 매개체를 건축가의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 설정한 데에 있어서 의미가 크다고 느껴진다.

‘키리에’의 무게감을 한껏 가볍게 만들어주는 ‘집’에 대한 소개가 끝나면 엠마가 등장한다. 전직 무용사이자 몸이 안 좋은 남편을 간호하고 있는 엠마는 혼자인 기분이다. 남편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했고, 남편은 자신에게 죽음의 기운을 불어넣기만 한다.
엠마는 죽음을 결심하고 용기가 날 때까지 검은 숲 근처에 있는 집에 머무르기로 한다. 엠마와 같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고독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고독과 같은 문제는 집과 엠마가 만났을 때에 집이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기쁨을 느끼고 힘을 얻듯 아주 작은 접촉만으로 해결된다. 아주 작은 힘만으로도 우리는 계속하여 살아갈 수 있다.
작품은 작은 힘을 위한 타자와의 접촉을 우주적인 사랑이라고 말한다. 집은 금세 엠마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다. 엠마는 죽음을 결심한 사람 같지 않게 활달히 움직인다. 집은 엠마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엠마가 하루하루 만들어내는 작은 힘에 감탄한다.
작은 힘을 내는 일이 힘겹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자연스럽게 발휘되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절망 상태에 빠져 있더라도 작은 힘은 사라지지 않고 내면에 머무르고 있다.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타자와의 접촉은 내면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도와준다.
엠마가 계속하여 작은 힘을 낼 수 있던 이유가 건축가의 영혼이 깃든 집으로 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엠마가 운영하는 여관으로 손님들이 찾아온다. 사랑하는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소설가 관수, 트라우마로 스스로를 학대하는 목련, 평생 희생만을 강요받아온 성직자 분재까지.
그들에게 엠마는 따뜻한 보리차와 밥을 내어주고, 고통을 잊게 하는 초콜릿을 쥐여준다. 그들은 엠마의 사랑 속에서 그들의 삶 주변부에 존재하는 사랑을 감각하고, 스스로에게 자비를 베풀기 시작한다.
우리가 타자를 볼 때는 내면을 들여다볼 수 없어서 흔히 오해를 하고는 한다. 하지만 자기자신의 내면은 적나라하게 보이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입체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추악함이 끔찍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과거는 결핍의 역사”라는 분재의 말처럼 추악한 과거를 잊어버리고, 오해일지라도 타인의 아름다움에 젖는다. 혹은 육체에서 벗어나 영혼의 형태로 자기자신을 타자를 대하듯 바깥에서 바라본다.
이렇게 인간이 가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 작은 힘이 생겨난다. 하지만 엠마는 집과 손님들에게 내어준 사랑을 정작 자기자신에게 돌려주지 못한다.

절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엠마를 위해 집이 작은 힘을 내어본다. 자기자신을 향한 사랑과 타인을 위한 사랑은 서로 상호작용하는 요소들이기에 집이 엠마에게 받은 희망이 다시 집에게서부터 엠마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막이 내리고 난 후, 얼굴에 닿는 밤공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배우들은 집이 되거나 영혼이 되고 때로는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를 모두 연기하면서 환상적인 요소를 오로지 텍스트로 표현했다. 무대를 장악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매우 인상적이었고, 철학적이거나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주제를 현실적인 텍스트와 유머로 낯설지 않게 풀어냈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상처 입은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도 이만큼 개운했던 적이 있었나, 생각한다. 각 인물의 결말이 모호하게 끝이 나지만, 결국 그들 모두가 희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