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업계 진출을 희망하면서부터 나는 일부러 새로 나온 광고들을 찾아보거나 우연히 지나가는 광고들을 유심히 시청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렇듯 어린 시절 나에게 TV 광고는 얼른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성가신 존재였다. 한창 재미있게 프로그램을 보다가도 "광고 후 계속"이라는 문구가 화면 하단에 작게 뜨면, 살짝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랬던 내가 오래도록 잔상을 곱씹었던, 거의 유일한 TV 광고는 바로 샤넬의 '샹스 오 비브' 광고였다.
다채로운 색감과 화려한 연출에 매료되어 가끔은 '그 광고를 또 마주쳤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원래 대부분의 향수 광고가 화려한 시각적 연출을 지향하기는 하지만, 유독 샹스 오 비브 광고가 오래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를 파고들어 가다 보니, 프랑스의 유명 비주얼 크리에이터 장 폴 구드(Jean – Paul Goude)를 발견하게 되었다.
장 폴 구드, 경계를 넘나드는 시각 예술가
장 폴 구드는 영화, 사진, 광고 등 다양한 시각 예술 분야를 넘나들며 창의력을 펼치고 있는 예술가이다. 샤넬, 라코스테, 디올 등 유명 패션 브랜드와 협업할 뿐 아니라 리한나, 퍼렐 윌리엄스 등 유명 아티스트의 화보를 작업하기도 했다.
기고문 작성을 위해 조사하던 중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그의 현재 아내인 카렌 박 구드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이었다. 카렌과 함께 한 사진 작업인 < Queen of Seoul >을 보면 마치 한국판 '붉은 여왕'을 보는 듯하다.
이번 글에서는 어릴 적 나를 매료시켰던 < CHANCE EAU VIVE > 광고를 비롯해 장 폴 구드가 작업한 샤넬 향수 광고 몇 편을 소개할 예정이다. 광고가 아니라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듯, 그의 감각적인 연출에 집중해 보는 건 어떨까.
강렬한 외마디, <에고이스트> (EGOISTE)
"Egoiste! Where are you."
흑백 영화를 연상케 하는 도입부, 분노에 찬 여성들의 외침. 그들의 목소리가 가진 색채만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내 그들이 가리킨 '에고이스트', 즉 한 남성의 손과 에고이스트 향수가 등장하며 컬러 장면으로 전환된다. 하이라이트는 이제부터다. 화가 잔뜩 난 여성들이 "Egoiste!"를 외치며 문을 열었다 닫는데, 마치 강렬한 뮤지컬을 보는 것만 같다. 화면에 비치는 여성들이 점점 많아지는 연출은 시각적 쾌감을 쌓아 올리게끔 한다.
이 문을 열었다 닫는 장면이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가? 그 옛날 가구 업체 '파로마'의 광고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 조금 웃었을지도 모른다. '파로마' 광고는 여성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파로마!"를 외치며 문을 열고 닫는 장면을 반복해 많은 이들을 당황하게 했던 광고로 회자되고 있다. 알고 보니 '파로마' 광고가 해당 광고를 패러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전위적인 아름다움, <코코> (COCO)
이 광고는 프랑스 출신 배우 바네사 파라디가 출연하며, 샤넬의 전설적인 광고 중 하나로 손꼽힌다.
광고는 바네사 파라디가 작은 새처럼 휘파람을 불며 그네를 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곡예를 하듯 그네에 매달리고, 그와 동시에 코코 향수가 병에서 쏟아지는 이미지를 보여주며 아슬하면서도 자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어 줌아웃이 되자 바네사 파라디가 갇힌 새장 옆, 코코 샤넬을 상징하는 듯한 여성이 코코 향수를 어루만진다.
영상 내내 천둥소리와 번개의 번쩍임이 이어지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여유롭고 관능적인 여성들의 이미지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서커스와 천둥번개, 와중에도 샤넬의 아이덴티티인 트위드 정장 차림까지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전위적인 아름다움을 형성한다.
경쾌한 감각의 향연, <샹스 오 비브> (CHANCE EAU VIVE)
샤넬의 향수 라인 중 '샹스' 시리즈는 비교적 젊은 연령대를 타깃으로 하며, 다른 라인들에 비해 가벼운 향이 특징이다. 그중에서도 '샹스 오 비브'는 자몽과 블러디 오렌지의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중심이 된다. 이 광고는 그런 밝고 경쾌한 이미지를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볼링'을 활용했다.
광고에 등장하는 네 명의 모델들은 '샹스' 시리즈 향수 각각의 색상에 맞춘 의상을 갖춰 입고, 동그란 향수병을 굴려 볼링을 치는 장면을 보여준다. 향수병끼리 부딪힐 때 다채로운 색감의 시각적인 자극은 물론, 경쾌한 소리까지 더해진다.
많은 명품 향수 광고들에서 향수병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굉장히 다양한 방식을 택해왔다. 모델이 별의별 포즈를 취하거나 향수병과 어울리는 오브제를 사용하는 등 수많은 시도를 봐 왔지만, 적어도 나에게 이 볼링 소재를 뛰어넘을 만한 연출은 없을 것 같다.
수많은 명품 향수 광고 중 <샤넬 & 장 폴 구드>의 작업이 기억에 남았던 이유
명품 향수 광고들은 화려한 시각적 자극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향수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아름다운 모델들을 기용하고, 운치 있는 풍경을 배경으로 해 그들을 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광고들 속에서 왜 장 폴 구드의 작업이 유독 기억에 남았을지 생각해 보면, 바로 그의 샤넬 향수 광고들은 미적인 감각에 더해 '재치'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아름다운 장면들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향수의 이미지를 분명하게 각인시키기 위해 감각적인 요소들을 배치한다. <에고이스트> 광고에서 여성들의 외침이, <코코> 광고에서 천둥번개가, <샹스 오 비브>에서 볼링 요소가 그러했다. 비록 짧은 영상이지만, 다 보고 나면 시청자에게 강렬한 잔상이 남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매끈하고 완전한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시선이 간다. 귓가를 찌르고, 무언가가 깨어지고 부서지는 이미지들은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단숨에 자리 잡는다. 완벽하고 빈틈없는 이미지가 익숙한 명품 광고의 세계에서 장 폴 구드의 재치, 즉 인간미는 시청자가 본인을 대입할 수 있는 작은 문을 열어준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