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동네 사람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늘 지나치던 골목의 작은 변화나 단골 가게의 사소한 소식, 산책길 담벼락에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의 이름 같은 것들. 대단한 뉴스거리는 아니지만 누군가에겐 삶의 전부이자 매일의 풍경인 이야기들이다. 최근 이처럼 지극히 사소한 일상 반경에 주목하는 '하이퍼 로컬(Hyper-local)'의 물결이 거세다. 이름 그대로 ‘아주 지역적인’, 흔히 말하는 로컬보다 훨씬 좁은 동네나 골목 단위의 작은 공동체가 주요 무대로 부상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히 거주지를 넘어 우리의 여행 방식과 정보를 소비하는 채널, 나아가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까지 바꾸어 놓았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 하나. 로컬 아닌 ‘하이퍼’ 로컬이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초연결 시대에 왜 우리의 시선은 좁은 동네와 골목으로 향하는 걸까.
마을의 오랜 서사가 주연이 되는 여행
최근 2030 세대가 열광하는 여행지는 거대한 랜드마크가 아닌, 이름조차 생소한 작은 동네의 골목이다. 대표적으로 강원도 동해 해안가 마을 '묵호'와 충남 공주의 원도심 '제민천'이 있다.
한때 명태와 오징어잡이, 국제항으로 호황을 누리다 긴 정체기를 겪었던 묵호항의 언덕 마을 '논골담길'은 주민들과 지역 예술가들이 함께 조성한 벽화 위에 그들의 삶을 투영한 서사를 입고 다시 태어났다. 이제 여행자들은 잘 닦인 관광 코스나 시끌벅적한 도심을 찾는 대신, 담벼락에 물든 인생사를 톺아보며 마을의 오랜 이야기를 차분히 되짚어간다.
충남 공주의 '제민천' 역시 마찬가지다. 낡은 한옥과 하숙 마을의 기억을 간직한 이 원도심은 지역의 자산을 깊게 파고든 로컬 크리에이터들에 의해 하나의 '동네 잡지' 같은 공간이 되었다. 거창한 볼거리 대신 토종 곡물을 연구하는 가게나 동네 어르신이 운영하는 낡은 책방에 머물며, 여행자는 단순한 방문객을 넘어 잠시나마 주민의 일상에 스며드는 경험을 한다.
이처럼 하이퍼 로컬 여행은 '보는 것'에서 '사는 것'으로 여행의 정의를 바꾸고 있다.
올드 벗 뉴, 우리 동네 신문의 오래된 미래
새롭게 등장한 개념처럼 보이지만, ‘하이퍼 로컬’ 미디어는 우리에겐 아주 익숙한 존재이다. 마을 신문, 동네 소식지, 게시판에 붙은 대자보, 전단 등이 그 원형. 장이 서는 날짜부터 누가 이사를 왔으며 누군가의 취업과 승진 소식, 혼사 등의 경조사까지 기록하고 알렸다. 비단 지면뿐만이 아니었다. 동네 슈퍼나 미용실이 지금과 달리 사랑방 역할을 해 늘 사람이 모여있을 땐 그곳이 곧 소식통이었다. 지금처럼 휴대폰이나 TV가 없던 시절엔 새로운 소식을 들으려고 일부러 장날에 맞춰 시장에 들르기도 했다. 알고리즘이나 피드 대신 대화를 통해 정보를 순환시켰던 아날로그 플랫폼이었던 셈. 오늘날 하이퍼 로컬 미디어는 이 오래된 방식 위에 서 있다. 형태는 종이에서 디지털로, 공간에서 플랫폼으로 바뀌었지만 우리 주변의 가장 가까운 소식을 전한다는 목적과 성격은 같다.
너무 멀리 연결된 시대의 역설, 하이퍼 로컬 미디어의 뉴 제네레이션
그렇다면 왜 로컬이 아닌 ‘하이퍼’ 로컬에 주목하는 걸까.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의 발전에 있다. 지구 반대편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수백, 수천 명과 친구를 맺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대부분 온라인에 머물러 있다. 일상을 깊이 공유하는 관계로 이어지기란 쉽지 않다. 또 소셜 미디어는 타인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만을 보여주며 비교와 소외감을 키우고, 고립감과 외로움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디지털 플랫폼에 머무는 시간이 늘 수록 정작 주변의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할 기회는 줄어들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큰 정서적 결핍을 느끼게 됐다. 이러한 변화는 코로나19를 기점으로 더 선명해졌다. 이동이 제한되며 생활 반경이 좁아졌고, 하루 대부분을 동네에서 보내며 가까운 공간에서의 연결이 얼마나 취약했는지가 드러났기 때문. 국내 도시와 지역 생태계를 연구하는 모종린 연세대학교 교수는 로컬의 변화를 다룬 책 『머물고 싶은 동네가 뜬다』에서 이렇게 전한다.
“클릭 한 번으로 모든 게 집까지 배송되고 스마트폰 하나면 온갖 콘텐츠를 누릴 수 있는 시대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는 역설적으로 오프라인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을 키웠다. 사람들은 여전히 오프라인만이 줄 수 있는 경험과 감성, 커뮤니티를 요구하다 보니 ‘로컬’에 모이게 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여전히 오프라인만이 줄 수 있는 경험과 커뮤니티를 원하고 그 바람이 ‘로컬’, 더 정확히는 ‘하이퍼 로컬’로 모이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같은 시기 생활 반경이 줄어든 변화 역시 이러한 흐름을 강화했다. BC카드 빅데이터센터에 따르면 거주지 500m 이내 결제 비중은 2018년 25.6%에서 코로나 시기(2019~2022년) 32.9%로 늘어난 반면, 거주지 5km 이상 원거리 결제는 같은 기간 38.4%에서 31.4%로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말 그대로 ‘동네 소비형 생활’이 늘고 있다는 분석. 집 가까운 생활권 안에서 먹고, 놀고, 쉬는 일상이 많아지면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레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시콜콜 우리 동네 이야기. 골목과 사람, 관계를 기록하는 저마다의 방식
하이퍼 로컬 미디어는 동네를 ‘취재 대상’이라기보다 살아가는 공간으로 바라본다. 빠르게 소식을 전하기보다, 한 동네를 오래 보고 천천히 기록하는 방식이다. 골목을 걷고, 가게를 들여다보고, 사람들의 얼굴과 관계를 기억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아래 소개하는 미디어들은 각자의 동네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 자기 지역의 분위기와 일상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쌓아가고 있는 사례다.
• 마포구 토박이가 걸어서 소개하는 로컬 매거진, 도보 마포
마포구에서 나고 자란 동네 주민이 운영하는 로컬 큐레이션 계정. 단순 정보 공유가 아닌, 주인장만의 주관적인 취향으로 엄선한 공간만을 소개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동안 소개한 공간은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밥’, ‘술’, ‘카페’, ‘빵’ 등으로 카테고리를 나눠 지도로 제작해 배포했다. 이 밖에도 보다 유쾌한 도보 생활을 위해 마포구의 각 동네 분위기를 담은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하거나, 자영업 사장님들의 정기 모임 ‘마포구 반상회’ 를 운영하며 이웃과의 사이를 돈독히 다지고 있다. 또 지난해부터는 월에 한 번 마포구에서 일어난 소식과 유용한 생활정보, 새로운 공간을 소개하는 뉴스레터를 발행하며 동네의 변화를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 @dobomapo
• 방황하는 성도님을 위한 흥미로운 성수 가이드, 성수교과서
성수동을 중심으로 동네 소식을 기록하는 로컬 매거진. 운영자 제레박이 성수에서의 일상을 기록하던 계정에서 출발해, 지금은 성수의 카페·맛집·팝업스토어는 물론 상권의 변화와 흐름까지 전하는 지역 콘텐츠 채널로 성장했다. 특징은 광진구와 성동구를 가르는 연무장길 동쪽 끝자락부터 서쪽 서울숲까지, 약 2km 반경의 아주 좁은 지역을 깊이 있게 다룬다는 점이다. 이 밖에도 ‘성수동 백과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지역민들과 정보를 나누는 온라인 채팅방을 4개 운영하고 있고, 매주 일요일 아침 9시에는 서울숲에서 쓰레기를 줍는 오프라인 커뮤니티 ‘SSJ 모닝클럽’을 이어가고 있다. + @seongsu_bible
• 시시콜콜 시골잡지, 월간 옥이네
월간 옥이네는 옥천의 ‘비옥할 옥沃’을 따 이름을 지었다. 그 이름처럼 옥천의 비옥한 땅과 역사, 그곳을 일궈온 주민의 삶을 차곡차곡 기록해 온 동네 잡지이다. 무엇보다 우리 사는 이야기를 편안하게 나누자는 목표 아래 자치·자급·생태를 핵심 가치로 삼고 있다. 지역 공동체의 문화와 사람,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담아내고자 한다. 그 바람을 담은 꾸준함으로 최근에는 100호 발간이라는 의미 있는 기록을 세웠다. + 2017년 창간(월간지) / @monthlyoki
• 목욕탕 라이프 스타일 매거진, 집앞 목욕탕
목욕탕이 가진 가치를 다시 바라보며, 진짜 쉼과 자기 돌봄이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조명하는 매체. ‘우리 동네 목욕탕’을 중심으로 보다 따뜻하게 나를 살필 시간, 이를 돕는 공간들을 소개한다. 잡지뿐 아니라 목욕탕을 주제로 한 팝업 프로젝트 《몰래탕》과 문화예술 프로젝트 《몰래탕 클래스》, 디지털 아카이빙까지 기획·운영하며 목욕탕 문화를 입체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 2023년 창간(월간지) / @bathhouse.mag
• 평범한 사람들의 사소한 이야기, 완두콩
완두콩은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사소한 이야기를 담아 매월 한 번씩 발간하는 마을 소식지다. 귀농귀촌인부터 마을 사무장, 초보 엄마, 전직 언론인, 지역을 고민하는 젊은 영화감독까지 다양한 주민이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 꽃도, 강아지도 마을 풍경도 모두 완두콩의 주인공이 된다. 지역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이야기를 다루며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 주민과 행정 사이의 거리를 좁혀 진짜 지역 공동체를 회복하는 걸 목표로 한다. + 2011년 창간(월간지)
*
한때 세계 곳곳으로 뻗었던 연결은 돌고 돌아 다시 너와 나, 우리의 거리를 좁히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우주여행을 다니는 세상이 도래해도 태초와 같이 '발로 뛰고 가서 만나는 세상'을 그릴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퍼 로컬은 가장 좁은 곳에서 가장 넓은 의미의 '사람'을 발견하는, 지금 시대의 다정한 문법이다. 맞닿지 않아도 연결되는 기술의 정점에서, 다시금 서로의 온기가 머무는 반경을 향해 걷는다. 그 옛날 동네 슈퍼와 미용실, 시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장 오래된 미래를 향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