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카레를 싫어한다. 특히 커다란 냄비에 양껏 담긴 노란 카레를.
인도식 카레는 가끔 먹긴 하지만, 그저 한 끼 때우는 식사 메뉴 중 하나이다. 일본식 카레는 그저 가라아게랑 같이 곁들여 먹을 만한 음식 정도. 그러다 첫 도쿄 홀로 여행을 계획하던 중 한 블로그 글에서 수프 카레에 관한 후기를 보게 되었다. 비주얼만 봤을 때는 꼭 어렸을 적 읽었던 판타지 책에서 자주 묘사되는 '스튜'와 비슷해 보였다. 노르스름한 국물에 채가 동동 띄워져 있는 비주얼이 어쩐지 나쁘지 않아 보였다. 먹어보기도 전이었지만 왜인지 이 카레는 맛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왔다. 일반 카레처럼 되직한 질감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눈에 띄었고, 무엇보다도 카레이지만 정작 카레 맛은 잘 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함이 합격이었다.
수프카레는 홋카이도의 삿포로에서 만들어진 현지 음식이다. 찾아보니 도쿄에도 유명한 가게들이 몇 군데 있어 이왕 여행을 간 김에 이 따끈한 국물 요리에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도쿄로 향한 후 긴자의 Yellow Spice라는 수프 카레 집을 방문했다. 저녁 시간에 맞춰 갔는데 운이 좋게도 웨이팅은 없었던 기억이 난다.
가게마다 조금씩 상이하지만, 대부분의 수프 카레 가게는 각자 입맛에 맞춰 커스텀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마련한다. 메뉴판을 보면 단계별로 메인 토핑, 육수 베이스, 맵기, 밥의 양, 추가 토핑 등을 고를 수 있게 되어 있어 마치 장난감 조립 설명서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한국에서도 수프 카레를 먹게 되었을 때는 일본에 비해 이러한 선택지가 조금 간소화된 가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Yellow Spice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전에 읽었던 블로그 글과 개인적인 취향을 반영해 닭다리 수프 카레와 밥에 올라가는 치즈 토핑을 주문했다. 밥 위에 치즈라니. 왠지 괴식 같지만 이제는 치즈 토핑을 추가하지 않으면 수프 카레를 못 먹을 지경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육수 베이스를 노란색, 검은색, 빨간색 등 색깔로 정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노란색을 택했다. 국물을 처음 맛보았을 때, 나는 수프 카레가 내 소울푸드가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확실히 카레 맛은 많이 나지 않았고 묽은 국물인데도 어떻게 그런 깊은 맛이 나는지 감탄했었다. 평소 채를 싫어하는 편이지만 그 어떤 채라도 이 국물에 들어가면 얼마든지 먹어 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해장이 되는 기분이라고 하면, 조금 이상하게 들리려나?
그래서 곧장 우롱 하이볼 한 잔을 시켰다. 은은한 향이 기분 좋게 올라오는 하이볼이었다. 그렇게 첫 수프 카레를 성공적으로 영접한 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수많은 수프 카레 집을 방문했다.
작년에 도쿄를 방문했을 때는 새로운 수프 카레 맛집을 찾는 것이 목표 중 하나였다. 특히 시모키타자와 쪽에 수프 카레 가게가 여럿 있어 그곳에서 자주 저녁을 먹었다.
여러 가게 중에서도 입맛에 가장 맞았던 곳은 바로 Ponipirika라는 곳이다.
방문 당시 웨이팅이 꽤 있었고, 라스트 오더 직전에 들어가 겨우 주문에 성공했다.
육수는 새우, 일본식(가다랑어 메인), 토마토 세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일본식 베이스를 선택했다.
가쯔오부시 맛이 꽤 많이 나서 처음에는 낯설었는데, 나름대로 중독적인 맛이라 계속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채소도 잘 구워져 들어가서 불향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처음에는 채의 양이 조금 적은가 싶었는데 종류가 다양하게 들어가 있어 먹는 데 부족한 느낌은 없었다. 다음번에 방문한다면 가장 인기가 좋다는 새우 육수를 맛보고 싶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국물에 진심인 한국인들이라면 분명 이 매력을 놓칠 수 없을 것이다. 수프 카레는 홋카이도에서 생겨난 만큼 추운 날씨와 잘 어울리는 음식이다. 따끈한 국물, 든든한 토핑, 그리고 몸과 마음을 데주는 채소들의 불향까지. 쌀쌀한 날씨가 다 가기 전에 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그리운 음식에 입문해 보는 건 어떨까. 카레를 좋아하지 않는 누군가도 분명 이 카레는 사랑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