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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팬레터>의 내용을
일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30년대 경성, 일제의 식민 지배로 조국을 잃은 국민이 찾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뮤지컬 <팬레터>는 희망 없이 삭막한 대지에서 불륜, 연애편지, 사랑의 밀어 등 가십거리에 관심을 가지며 자극을 추구하는 등장인물들을 가장 먼저 조명한다. 그들은 ‘칠인회’라고 불리는 문인 단체 소속으로, 소설이나 시를 쓰는 작가들이 함께 활동을 이어간다. 이는 김유정과 이상 등 당대 문인들의 모임 ‘구인회’에서 모티브를 얻어 창작된 것이다.
1. 뮤즈라는 존재 – 예술의 원천
천재 소설가 해진, 그를 동경하는 지망생 세훈, 베일에 싸여 비밀스러운 소설가 히카루를 중심으로 한 스캔들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세훈은 일본에서의 유학 중, 집필한 소설이 짓밟히는 등 무시당했다. 그 와중에도 문학에 대한 그의 갈망은 오랫동안 뮤즈였던 해진과 서신을 주고받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뮤즈는 빛을 뜻한다. 극의 연출에도 관객석까지 직선으로 뻗어내는 빛의 특성을 활용해 극의 풍성함을 더하기도 했다. 히카루라는 이름의 뜻도 뮤즈와 일맥상통한다. 세훈은 ‘히카루’를 자신의 집필 명으로 이름 대신 적어내며 본래의 모습을 숨기는데, 해진은 그 미지의 대상을 뮤즈로서 동경하게 된다. 히카루와 세훈, 남성과 여성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한 끗 차이로 사랑의 감정을 느낀 해진은 답신을 기다리며 점점 얼굴 없는 대상에 대한 열망이 커게 된다.
특히, 두 사람이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무대에서 각자의 손에 쥔 편지를 들여다보며 번갈아 대화하는 대목이 있다. 멀찍이 떨어져 있어도 마음과 마음 사이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거리감을 순식간에 좁혔다. 특히, 편지와 글이라는 매개로 만나 빛을 닮은 에너지를 나누고 채우는데, 더 나아가 이 애타는 마음은 무언가를 써야겠다는 소설 합작의 동기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대목들은 당시 일제의 개입으로 민족 사이 거리감이 생기려다가도 ‘글’이 있어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던 때가 흐릿하게 보이도록 한다. 동시에 사람들의 끓어오르다 못해 활활 타오르는 예술을 향한 열정을 느끼기에도 충분하다.
2. 글이란 염원을 감각하는 것
얼핏 보면 뮤지컬 <팬레터>는 히카루와 세훈 사이에서 방황하는 해진의 연애 스캔들 이야기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개념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르다. 그건 고유하게 느껴지는 것이자 존재한다는 감각이다. 그 안에는 가장 힘들었던 당대 예술가들의 치열한 고민이 혈흔으로 군데군데 남아있다. 닿지 못하는 간절한 소망을 예술로 풀어내려는 아득함 말이다. 유독 조선어 말살 정책이 극에 달했던 이 시대에서 문학 자료들을 검열하려는 움직임은 역설적으로 수많은 문학가의 진실한 눈동자를 또렷하게 비춘다.
그 와중에 세훈의 내적 갈등이 극에 달해 히카루 역을 맡은 배우와 대사를 주고받으며 음악과 함께 고조되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다. 세훈은 끝까지 해진에게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해진은 보이지 않는 히카루에 대한 열망이 나날이 거세졌고, 그 넘치는 마음이 무리하게 소설을 집필하는 일로 번지게 됐다. 상사병이 깊어지듯 해진이 앓고 있던 결핵은 더욱 악화해 죽을 고비에 다다르자, 결국 세훈은 해진의 집필을 막는다. 그때 해진은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넨다.
“글을 쓰지 않으면 나는 결핵으로 아픈 사람일 뿐이다."
뮤지컬 <팬레터> 中 해진
사랑하지 않으면, 열망하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할 수 없다는 이 말은 시간이 흘러도 매 순간 깨어나게 되는 예술적 철학이다. 결국 절망적이고 냉혹함, 참담함이 뼈 시리게 휘몰아치던 일제강점기 시대에서 등장인물들이 놓치지 않았던 것은 한 자루의 펜과 함께 지키려 노력했던 민족의 ‘정체성’이었다. 이런 마음으로 해진은 만나지도, 볼 수도, 느끼지도 못하는 사랑 하나만으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집필 활동을 이어가려 했다. 그건 문학에 대한 진심 어린 열망임과 동시에 뮤즈에 닿으려는 필사적인 간절함. 동시에 조국의 독립이라는 이상향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지막까지도 해진은 편지로 “언제나 답신을 기다리겠다”라고 말하며 예술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세훈은 집필을 멈추겠다고 선언했지만, 기필코 만류하던 생전의 해진의 말을 따라 계속 소설을 쓰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세훈의 존재 자체가 해진이 세상에 남겨둔 유작 그 자체가 아닐까. 막이 내린 공연을 뒤로 하고 나오는 길, 얼마나 많은 작품을 통해 답신이 이어져왔을지, 또 다른 누군가의 유일무이한 바람이자 뮤즈가 되었을지 문득 알고 싶어졌다. 그 형체 없는 끝을 마음껏 가늠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