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살면서 나를 제대로 돌봐본 적이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나를 돌보는 일. 그건 다른 것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일이다.


이런 건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나 대학을 다니며 적성과 특기를 탐구할 때나 해 봤다. 그마저도 내가 정말 이걸 좋아하나? 하고 의심하며 테스트에 응답하기는 했다. 결과는 나에 대한 것인지,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인지,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의 모습인지 알 수 없다. 그 모든 게 뒤엉켜 있다.


사람의 의식이나 자아를 말할 때 프로이트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에 대해 잘 모르고 조금 알던 것마저 많이 잊었지만 원초적 자아, 자아, 초자아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다.


원초적 자아는 나의 무의식, 본능과 본성. 즉 현실에 구애받지 않은 본능적인 욕망이다. 초자아는 도덕적 판단과 양심에 따르게 하는 것이다. 본능을 억제하며 사회의 테두리 안에 머물기 위한 통제를 보다 강하게 하는 것이 초자아다. 자아는 그 사이에서 욕망과 통제를 조절한다.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포함한다. 자아와 초자아가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자아는 조금 더 현실에, 초자아는 이상에 가깝다. 자아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는 욕망과 통제(규범)를 적절히 조절하고 참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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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잰 스캔런의 <의미들>은 그 자아를 회복하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어느 한 곳에 치우치고, 그 치우침으로 낙인 찍힌 순간들을 되짚는다. '미친 여자', '광기', '정신병원'등의 단어가 보여주듯 작가의 경험과 상처를 첨예하게 보여준다.

 

 

오늘 아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정문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아이가 학교교육에 집어삼켜지는 것이, 시간의 흐름이 보인다. 나는 1980년에서 아주 멀리 와 있는데도 그 시절은 또 얼마나 쉽게 다시 돌아오는지. 나는 그 시기를 뒤에 두고 떠나왔다고 내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 옆에서 산다. 이는 진실이고, 진실일 수 있다. 그러다가도 문득, 존 디디온이 말했듯,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슬픔의 소용돌이 속으로 확 끌려들어갈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삶이란 그 소용돌이에 저항하는 일에 달려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일을 해냈다고, 충격을 단어로 바꾸었다고 생각하며 글을 쓰는데, 그러다 보면 글쓰기 자체가 나를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린다. 나는 주방 식탁에서 울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식탁은 내가 가져본 그 무엇보다 책상과 가장 유사한 공간이다. 나는 그 날들과 주들과 그 시기를 글의 소재로 삼았다. 그 날과 주와 달들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나는 작가가 된 것일까? 이 책 역시 그 혼돈을, 그 형태 없는 슬픔을 다른 뭔가로 만드는 한 방식이다.

 

 

누가 이 말을 썼더라? "인류의 모든 문제는 방 안에 혼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데서 생긴다."

 

내 생각에 이 말은 광기를 정의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방 안에 혼자 앉아 있지 못하는 것. 내 인생에서 아주 여러 해 동안 나는 가만히 앉아 있는 걸 어려워했다. 거의 평생 그랬다. 내가 무너지기 전 몇 년 동안, 나는 나 자신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내가 느끼는 것이, 나를 압도하는 외로움이 무서웠다. 어떤 감정을 지닌 채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내 몸과 함께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몸은 하나의 문제였다. 나는 내 몸이 변화하고 자라고 변화되는 방식에 사로잡혔다. 몸과 함께, 몸 안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나는 마치 몸을 통제하려는 것처럼 살았다.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것은 고요함과 하나에 집중하는 정신의 조합이다. 하나의 문제와 함께 방 안에 혼자 조용히 앉아 있는 것.

 

(...)

 

그는, 이것은 인간으로 존재하는 데 따르는 문제다, 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방 안에 혼자 앉아 있는 걸 어려워한다는, 방 안에 혼자 앉아 있어야 한다는, 아예 방이 없다는 이 문제가.

 

 

그 학생이 말을 이었다. 그냥 내 말은 떨쳐지지 않는 생각을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정말이지, 셰익스피어나 식품학이나 양자물리학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한 육신 안에서 살아가는 일의 의미에 관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누가 그럽니까.

 

 

우리는 도움이 필요했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꼈다. 미국의 개인주의 원칙에서 보면 우리는 실패자였다. 우리에게는 회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진보의 서사. 이는 치료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료계와 계약계의 서사일 뿐 아니라, 정신 질환이 사회가 아닌 자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문화의 서사이기도 하다. 이런 서사대로 진행되지 않는 이야기라면 인정받지 못했다. 회복하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 혹은 호전됐다가 다시 나빠지기를 반복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의미들>은 작가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시절에 대한 회고와 읽고 쓰는 일을 하며 얻은 것이 교차되어 있는 에세이다. 작가가 정신병원에 들어가기까지의 이야기, 들어가서의 이야기, 나온 후의 일들이 모두 담겨 있다.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는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도발적이고, 때로는 마음을 무겁게 한다. 작가가 지니고 산 상처(이를테면 새엄마에 대한 것)들이 내밀하게 기술되어 있어 읽으면서 버거운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대를 하게 된다. 이런 작가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를 상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본 적이 있다. 그 사람이 누군가 그것을 보리라 생각하고 썼는지, 영영 자신만 보리라 생각하고 쓴 건지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일기에는 그가 겪는 아픔들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는 점이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것을 읽으며 아주 많이 울었다. 나는 그의 상처에 참여한 것이 조금도 없음에도.

 

누군가의 깊은 속내를 듣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픔이 서린 이야기라면 더더욱. 하지만 <의미들>이 그렇듯 아픔 이면에는 그것을 타개하는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의미들>의 작가는 문학을 읽으면서 변화했고 이후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바라보는 일을 한다. 문학을 읽은 것이 변화를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책 곳곳에 여러 작가의 이름이 언급되거나 작품이 인용된다. 그래서일까, 에세이면서 동시에 독서감상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책은 고통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하나의 '의미'로 만든다는 것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나아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읽기가 어떻게 돌봄이 되는가"를 증언하며, 상실의 자리에서 삶의 의미들을 회복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는 말처럼 '나'를 돌볼 나만의 방법을 찾고 스스로 의미를 찾아나가는 과정이 잘 담겨 있다. 그 의미는 날것의 나도, 통제된 나도 아니다. '나'로 살아가는 '나'다.

 

이 책이 작가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나아갈 길을 열어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작가는 상처, 우울, 불안 등을 가진 채 살았던 과거의 삶을 들추며 회복의 과정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누구나 회복할 권리가 있다'는 파동을 일으켜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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