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시즌 이후 2년 만에 뮤지컬 <레드북>이 돌아왔다. 마침 극장 내부가 '레드'로 붉게 물든 유니버설아트센터는 뮤지컬 <레드북>과 잘 어우러진다.
![[크기변환]안나 아이비.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10/20251026005856_wuvbuhod.jpg)
<레드북>의 주인공 안나는 수없이 많은 소문이 난무한 특이한 여인이다. 신사의 나라인 영국, 그중에서도 여성에게 가장 보수적이었던 빅토리아 시대에 안나는 결혼도 하지 않고 여러 일을 전전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 그런 안나 앞에 신사 중의 신사 '브라운'이 찾아온다.
변호사인 브라운은 자신의 할머니였던 바이올렛의 유언에 따라 안나에게 상속된 재산을 일부 전달한다. 그리고 여성은 재산을 소유할 수 없으니, 빠른 시일 내에 남편감을 찾아 결혼할 것을 친절히 조언한다.
![[크기변환]브라운 송원근.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10/20251026005917_xnwnwgtg.jpg)
브라운은 '언제, 어디서나, 신사답게!'를 모토로 삼는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신사로서의 도리와 법을 무엇보다 중요시 여긴다. 얼떨결에 안나를 자신의 타이피스트로 고용하게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브라운은 안나를 상대하기 위해 여성을 다루는 방법을 책으로 공부하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인 영국 여인상에서 한참 벗어난 안나에게 책 속 지식으로는 속수무책이다.
결국 그는 안나를 쫓아내기 위해 달콤한 말로 설득한다. '당신에게는 기적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어요'라는 말로 마무리 된 브라운의 수상한 응원은,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안나를 여성들만의 고품격 문학회 <로렐라이 언덕>으로 이끈다. 그곳에서 안나는 문학회의 고문 로렐라이와 회장 도로시, 회원 줄리아, 코렐, 메리를 만난다. 그곳에서 안나는 문학회 사람들과 마음과 뜻을 함께하게 되고,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떠올리던 첫사랑과의 추억을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당시는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던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안나의 소설이 담긴 잡지 '레드북'은 거센 사회적 비난과 위험에 부딪히게 된다.
![[크기변환]2025_red_book-poster_fin.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10/20251026005948_vegfouup.jpg)
<레드북>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안나의 성장 스토리다. <레드북>의 첫 넘버는 '난 뭐지?'라는 안나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안나는 자신이 속한 세상으로부터 자꾸만 겉돈다. 안나가 구직자로 전전하는 이유 또한, 약혼자에게 첫 경험을 고백했다가 파혼을 당하고 가문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안나에게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왜 여자가 꼭 결혼을 해야 하지? 왜 여자라는 이유로 재산을 가질 수 없지? 무엇보다 왜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내 뜻대로 솔직하게 행동해서는 안 되지?
아무리 세상에 질문을 던져도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대답 없는 세상에 의문만 늘어갈 뿐이다. 그래도 안나는 언젠가 이런 자신을 이해해 줄, 알아봐 줄 한 사람을 기다린다.
불쑥 안나 앞에 나타난 브라운은 안나의 첫사랑 '올빼미'의 외관을 쏙 빼닮았다. 어쩌면 자신을 이해해 줄 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싹트게 한다. 그러나 그런 브라운도 안나가 기다려온 운명의 한 사람은 아니다.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기 때문이다. 안나는 그 사실을 자신이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을 마주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결국 안나는 자신의 글을 읽고 위로를 받은 이들을 위해,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로 선택한다. 안나는 그 선택에 뒤따라오는 브라운과의 이별, 이후 영국으로부터의 추방 가능성까지도 각오한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사라지기를 강요하는 시대에 맞서 자신의 목소리를 굽히지 않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그렇게 안나는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그저 나로서 충분한,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 된다.
![[크기변환]KakaoTalk_20251026_005304688_01.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10/20251026010002_gbgnruyn.jpg)
<레드북>은 안나의 용기와 성장에서 막을 내리지 않는다. 안나의 이야기가 끝난 뒤, 곧이어 마이크를 '당신의 얘기를 들려줘요'라며 무대 아래의 관객에게 넘긴다. 제2의 안나가 되기 위해 로렐라이 문학회에 가입하러 온 사람들에게 로렐라이와 도로시는 말한다.
“제2의 누군가가 아니라 제1의 내가 되세요!”
그때가 언제라도
당신이 누구라도
거기 그 자리에서
지금 그 모습으로
당신이 누군지 말해줘요
당신의 얘기를 들려줘요
<당신의 얘기를 들려줘요> 中
좋은 극은 관객의 삶에 변화를 일으킨다. 단순히 주인공 안나의 성장이 아닌, 극을 관람한 단 한 명의 개인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인다는 점에서 뮤지컬 <레드북>의 메시지가 한층 또렷해진다. 몇 해 전 <레드북>을 보고 용기 내어 뮤지컬 후기를 적기 시작했던 내가, 이제 꾸준히 내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뮤지컬 <레드북>을 본 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세상이 되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