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비주류나 소수자는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언제나 비주류에 속할 수 있다. 사전적 의미의 비주류는 주류의 반대말로, “중심에서 벗어난 소수파”를 뜻한다. 나는 그 정의에다가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정의도 추가하고 싶다. 우리 사회에서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 하는 사람들은 꽤 많다. 성소수자,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족, 여성 등이 그러하다. 물론, 요즘에는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하여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비주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옛날에는 그 경계가 훨씬 더 명확했고 말이다.
문학은 시대상과 사회상을 담는 하나의 창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문학을 통해 그 시대와 사회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은 19,20세기의 문학을 보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비주류의 존재에 초점을 맞춰보려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피식민자와 여성이라는 2개의 갈래로 나누어서 살펴볼 것이다. 이는 어렵게 말해 ‘탈식민주의 비평’과 ‘여성주의 비평’으로 문학을 바라보는 방식인 것이다. 어떤 정체성으로 문학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들이 다르다. 우리가 여성의 정체성을 가질 때, 피식민자의 정체성을 가질 때 안 보였던 것들이 보이기 때문에 이렇듯 문학을 향유하는 방식도 중요하다.
예를 들면, 여성의 정체성을 갖고 보았을 땐 항상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상으로만 비춰지는 캐릭터가 눈에 들어올 수도 있고, 피식민자의 정체성으로 보았을 때는 제 3세계 피식민자가 항상 도구화되거나 타자화되는 부분이 눈에 거슬릴 수도 있다. 우리는 이렇게 여러 정체성으로 하나의 문학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비로소 문학을 완성해가고 재해석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 글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타자화되는 비주류들이라고 볼 수 있는 ‘여성’과 ‘피식민자’의 두 관점에서 문학을 바라보려 한다.
문학 비평이란 무엇인가?
문학을 비평하는 것은, 단순 문학을 수동적으로 읽는 것에서 한 차원 더 나아가서 문학을 여러 관점으로 분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작품을 보통 언어만으로 읽는다. 하지만 이런 문자 언어 너머에 있는 의미를 연상할 때는,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연상하게 된다. 그렇기에 같은 작품이라도 그 작품에 있는 언어 너머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그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비평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관점이다. ‘무엇을’ 읽느냐보다, ‘어떻게’ 작품을 읽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그 작품에 나타나는 의미를 자신의 세계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재구성하는 것이다. 문학 내에 나와있는 사회적 배경, 시대적 배경을 보고 각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문학을 다시금 읽는 것, 그리고 다시 재해석하는 것, 그래서 문학의 의의를 다시금 밝혀내는 것이 바로 문학비평이다. 이런 과정에서 작품은 단순히 언어에 고정된 의미가 아니라, 주관적으로 확장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문학 비평의 종류에는 구조주의 비평, 여성주의 비평, 탈식민주의 비평, 형식주의 비평 등이 있는데 나는 이 글에서 ‘탈식민주의’와 ‘여성주의’ 비평으로 두갈래로 나눠서 설명하고자 한다.
1. 여성주의 비평
여성주의 비평이란 ‘페미니즘’ 비평과도 같은 의미로 쓰인다. 이는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문학 비평이다. 당시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와 억압이라는 현실 상황을 자각한 많은 이들이, 문학에서 비평할 부분들을 발견하고 여성의 고정된 가치를 재정립하고자 만들었다. 이러한 여성주의 비평은 사회가 강요하는 작품 속 여성상에 대해서 고찰한다. 그리고 여태까지 문학에서 서술 되었던 남성 중심의 담론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여성의 주체성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한다.
문학에서 여성주의 비평이 대두되기 시작한 시점 또한 비슷하다. 영문학계에서도 남성 작가가 월등히 많았고, 문학 내에서도 남성이 항상 주목받는 주인공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여러 여성작가들이 있었기에 단순 고정적인 여성상에서부터 현대에는 보다 주체적인 여성상으로 많이 변화한 것 같다.
당시 여성이라는 신분으로 문학을 썼던 작가들은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 샬롯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버지니아 울프, 실비아 플러스 등이 있다. 이와 같이, 메리 셸리나 울프 등의 과거 글에 나타난 진정한 여성을 찾아가려는 노력들이 현재 여성의 권리를 확립하는데 자양분이 되어주었으며, 여성주의 문학비평의 지평선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이렇듯 여성주의 관점으로 문학을 바라보고, 비평함으로써 고전 문학 속 소외되어있던 여성이나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 했던 여성에게 더 초점을 맞춰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 문학비평은 문학 내에서 단순히 순종적이던 여성상을 주체적인 여성상으로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 있다.
'제인에어'를 여성주의 관점에서 비평하기
샬롯 브론테의 ‘제인에어’는 19세기 유명한 영국소설 중 하나로 꼽힌다. 19세기 영국 당시 상황은 여성 작가가 많이 나오고 있을 시대였다. 샬롯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와 같은 브론테 자매나 ‘프랑켄슈타인’을 집필한 메리셸리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만큼 남성 작가 위주였던 영문학이 변화하고 있는 시대였고, 여성의 역할도 변화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불어넣어주었다. ‘제인에어’에서는 영문학에서 거의 처음으로 ‘주체적인 여성상’인 ‘제인’이 주인공이 된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 전까지 영문학에서 대표적인 여성상은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상’에 불과했다. 항상 남성이 시키는대로만 하고, 남성의 부로만 생활하고,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인간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샬롯 브론테는 그러한 편견을 깨고자 이 책의 주인공인 ‘제인에어’를 주체적인 여성상으로 그려내고자 했다.
제인은 빅토리아 시대의 순종적이며 봉사하는 이상적인 여성상 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름답지도 않고, 가난하고 신분이 낮으며 심지어 고아이다. 그러나, 자의식은 강한 아이로 설정되어있다. 가진 것이 없더라도 불의에 절대 참지 않으며,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면, 미래의 호주가 될 ‘존 리드’라는 인물이 제인에게 책을 던지고, 훈육을 시킬 때 제인은 순종적으로 그 가부장적인 모습을 받아들인다기보다는, “고약하고 잔인한 녀석! 넌 살인자 같아 - 노예감독 같고 - 로마황제 같아” 라며 되받아친다. 이를 통해 수동적이고 남성의 말만 들었던 과거의 여성상과는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책 속에선 “일반적으로 여자는 매우 차분하려니 하지만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느끼며 남자형제와 똑같이 능력을 기르고 그것을 펼칠 수 있는 분야를 필요로 한다. 엄격한 속박이나 너무 심한 정체는 남자에게와 마찬가지로 여자에게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통해 브론테는 책 속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존재라는 걸 언급하고자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극 후반부에 로체스터가 제인에게 청혼했을 때, 자신은 남편의 소유물이 되지 않겠다고 말 하며 거절하는 부분이 있다. 이 장면에서는, 당대의 억압 속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여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브론테는 이렇듯 주체적인 여성 인물을 통해 여성의 자아실현 과정을 보여준다.
2. 탈식민주의 비평
탈식민주의 비평이란, 영어로 post-colonialism 이라고도 부른다. 식민주의 이후에 일어난 문학 비평인데, 여러 문학을 비평할 수 있는 장치로 쓸 수 있다. 탈식민주의 비평의 개념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비롯한 서구 중심의 근대성에서 벗어나려는 일련의 사상·문학적 운동을 총칭하는 말이다.
우리는 15세기 후반부터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안다. 식민주의의 역사는 꽤나 오래된 것이다. 그렇기에 탈식민주의 비평을 할 수 있는 문학은 굉장히 많으며, 이 비평 또한 꽤나 쓸모있다. 탈식민주의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이라는 책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을 발간하고나서, 탈식민주의에 대한 관심은 더 세졌다.
‘제인에어’를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비평하기
‘제인에어’는 이미 앞에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비평을 했지만, 이와 동일하게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도 비평할 거리가 굉장히 많은 작품이다. 샬롯 브론테가 이 작품을 쓸 때 영국의 사회적 배경은 제국주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19세기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을 얻을만큼 당시 대영제국은 여러 나라를 식민지배하고 있었고, 이에 영향을 받은 사고방식은 문학 속에 무의식적으로 반영되어있다. 그 당시 영국인들은 제국에 대한 충성심, 유럽 백인의 인종적 우월성 그리고 식민지 국민을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원리를 있었기 때문이다.
‘제인에어’에는 ‘버사 메이슨’라는 서인도제도 여성이 나온다. 당시 영국은 서인도제도를 식민지배하고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극 초반에는 여러 곳에 흔적만 보이다가, 극 중반쯤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제인에어’ 속에서 버사는 광기있는 여성, 무서운 여성으로 묘사될 뿐이다. 책 속 구절을 인용하자면, “무시무시하고 소름 끼치는 얼굴, 잔인한 얼굴, 무서운 유령, 흡혈귀 같았다” 라는 말로 버사를 표현한다. 또한, “제정신이 아닌, 반은 요정, 반은 귀신” 이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제인에어’만 읽었을 때는 버사가 제인과 로체스터의 결혼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과연 그것만이 현실일까? 우리는 문학 비평을 하기 때문에, 그 당시 사회와 시대상은 어땠는지를 파악하고 이 텍스트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제인에어’가 나오고 여러 해가 지난 뒤, 다른 작가가 이 문학을 다시쓰기 한 작품이 나오게 된다. 그것은 바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제인에어에서 광기있는 여성으로 등장했던 ‘버사’를 주인공으로 한 문학이며, 제인에어 책에서 나오지 않은 버사의 서사를 잘 담아주는 책이다. 이 책의 작가 ‘진 리스’는 ‘제인에어’ 속에서 타자화 된 서인도제도 여성인 ‘버사’에게 초점을 맞춰서 서사를 진행해 나간다. 작가는 버사가 크레올 여인이라는 사실을 놓치지않고, 그녀가 겪었을 험난한 인생을 찾아 들어간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버사는 단순 평범한 서인도제도의 여성이었으며, 영국인 로체스터의 물질적 욕심과 제국주의적인 사고로 인해 광기있는 여성이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버사’라는 이름도 원래 자신의 이름이 아니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앙투아네트’ 였지만 영국인 남편 ‘로체스터’가 노예처럼 부르기 위해 지은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로체스터’는 버사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부를 영위하고자 결혼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다. 당시 영국법 중에 부인은 자신의 모든 부를 남편에게 준다는 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쓰기 한 소설을 통해서 ‘제인에어’는 당시 사회적 편견이나 시대적 아픔과는 동 떨어진 이야기였고, 오직 ‘제인’에게만 초점이 맞춰져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정체성으로 문학을 읽는 능력
문학을 비평한다는 것은 굉장히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과정을 통해 그 문학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고, 문학과 시대의 연관성을 찾아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 즐거움이나 향락의 목적으로 문학을 읽는 것에서 벗어나, 문학 하나를 분석하고 재해석해보는 문학 비평 또한 많이 했으면 좋겠는 바램이다.
또한, 앞서 설명한 작품들 말고도 아직도 비평을 받아야 할 여러 가지 문학들이 존재한다. 한국 문학에서도 탈식민주의 비평이나 여성주의 비평을 할 수 있는 문학들이 많고, 이는 많은 이들이 문학을 더 읽을 수 있는 이유가 되주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우리만의 정체성을 가지고 문학을 읽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만약 자신이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문학 속 다문화인이나 혼혈인에게 감정 이입을 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아시아인이라면 영문학이나 서양 문학 속에서 아시아인이 어떻게 서술되는지에 초점을 맞춰서 읽고, 이에 대해 더욱 더 효과적으로 비평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 비평의 미래를 이끌어나가는 건 오직 우리가 가진 특별한 정체성을 갖고 해나가는 방법밖에 없다. 문학비평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고전문학의 재해석이나 재창조가 일어나, 문학계가 더 활발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